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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대감 (시 42:1-2) -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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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 (시 42:1-2)

뉴턴의 제1법칙을 ‘관성의 법칙’이라 합니다. 관성이란 물체가 가진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입니다.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 상태에 있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움직이는 것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움직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버스가 갑자기 앞으로 출발을 하게 되면 승객은 정지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므로 뒤로 몸이 쏠리게 됩니다. 그런데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정지를 하게 되면 승객은 버스가 가던 방향으로 몸이 쏠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를 싫어합니다. 조금 불편해도 참고, 전에 했으니까 하면서 그냥 해오던 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전에 안 하던 것을 새롭게 해보려 하면 귀찮아하거나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는 어떠합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예배를 드리니 일 년이면 52번을 드립니다. 10년이면 520번을 드립니다. 그렇게 예배를 많이 드렸으니 이제 예배자로서는 프로가 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5년 전이나 10년 전보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달라졌으며 더 큰 은혜를 체험합니까? 아니면 여전히 예배 시간에 늦게 오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주의가 산만하여 다른 데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기에 이번 예배 시리즈를 계획했습니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하여 응답하며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행동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당에 갈 때는 ‘예배를 보러 간다’고 말하고 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도 ‘예배 봅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인데 알게 모르게 예배를 보는 구경꾼으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소위‘예배 보는’교회의 특징은 뒷자리부터 항상 찬다는 점입니다. 뒷자리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홀가분하고 또 멀리서 강단과 찬양대를 바라볼 수 있어서 구경하기에 편안합니다. 목사가 예배 인도하고 장로가 기도하는 것을 구경합니다. 앞자리에 앉은 교인들의 뒷모습을 구경합니다. 어쩌다가 안내하는 분이 앞자리에 앉히려 하면 싫다고 기어이 뒷자리로 가는 분도 있습니다. 

이제 교인들은 더 이상 ‘예배 보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예배자로서 예배에 참여하여 그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성공의 7가지 법칙”의 첫 번째 주제는 ‘기대감’입니다. 무엇을 기대하며 이 자리에 나오셨나요?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그저 습관적으로 나와 이 자리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기대하라

기대감이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 기대감이 없다는 것은 그 일이 자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힘을 쏟고, 돈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감이 있다면 그 일이나 대상이 자기에게 가치 있다고 여기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기대감이 있을 때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서 참여합니다. 대통령을 만난다고 가정해봅시다. 옆집 아저씨 만나듯이 집에서 입던 후줄구레한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가시겠습니까? 목욕도 하고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그래도 제일 반반한 옷을 입고 그분을 만나면 어떻게 대할까 생각하며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서 최고의 예배, 최상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대하면 때로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더욱 만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생수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그 배에서” 하는 말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중심을 말합니다.  “생수의 강”은 예수님께서 부어주시는 “진리와 생명으로 충만한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생수를 나누어주시는 분이시요 생수 그 자체이십니다.  주님께로 나오면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갈급한 심령에 생명수를 채워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만족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기는 만족은 마음속에 생수의 원천이 되므로 지속적이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생수의 강이 성전에서 흘러나와 죽은 물이 살고 흘러가는 곳마다 생물이 번성하는 역사가 나타나듯이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세상은 소성되고 치료되고 열매를 맺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1800년대 초의 인도는 도덕적, 사회적, 지적,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들이나 어린 아이들은 잘못된 관행과 악습에 의해 비참한 희생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고행주의, 천민계급, 신비주의, 미신, 우상 숭배, 마법 등 그릇된 관습에 젖은 인도를 바라보면서 윌리엄 캐리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 흑암의 땅에 오게 하셨는지 그분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도를 향해 행하실 위대한 일을 기대했고, 이 일이 실현되도록 위대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과학과 역사책을 인도에 처음 출판했고, 처음으로 증기기관을 소개했고, 근대적인 인쇄 기술을 들여왔고, 저축은행의 개념을 도입하여 경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아시아에서 첫 번째 대학을 발족하였고 여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개가식도서관의 개념을 처음 시도하였고, 40여개의 인도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그는 현대 선교운동의 아버지였으며 복음전도자였습니다. 한낱 영국의 구두수선공에 불과했던 청년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인도처럼 큰 나라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가 특출한 천재요 위대한 성인이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윌리엄 캐리는 선교사로 영국을 떠나기 전에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 번민의 시절을 보내야 했고, 아내와 함께 한 인도 선교사 시절에도 가정불화는 물론 수많은 갈등과 역경을 경험한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분께서 이루실 일을 지속적으로 기대했습니다. 기대만 하지 않고 위대한 일을 시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 계획은 바로 우리의 기대감을 통해 실현됩니다. 반면에 기대하지 않을 때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기대도 커진다

예배는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은 더욱 커지고 우리의 예배는 더욱 깊어집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의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어찌 기대감이 없을 수 있습니까? 

진정한 예배자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영어의 예배(worship)는 가치라는 뜻을 가진 ‘worth’와 신분이라는 뜻을 가진 ‘ship’의 합성어입니다. 그 뜻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과 위엄을 우리가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예배드리러 나오는 복장이나 예배드리는 자세가 지금과는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예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샤하’인데 이 말은 ‘굴복한다, 엎드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을 합하여 전인적으로 최대의 존경과 복종을 표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출 4:31). 

교회 안에서 보는 것처럼 편안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뒤로 젖힌 자세를 하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서 예배를 보고 있는 자세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 온다면서 다른 데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고품격 서비스를 받기 원합니다. 편안한 시설, 첨단 음향 시스템, 훌륭한 강사와 프로그램, 그리고 자기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직책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가장 신경을 써야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실까요? “너 정말 나를 원하니? 나에게 정말 예배하고 싶은 거냐?” 

만남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전심은 전심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실 때 자신의 일부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조용히 죽으셨어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위하여 쇳조각과 뼛조각이 달린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전심으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만나볼까 한번 들어볼까 하는 자세를 갖고 예배자리에 나온다면 그것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다가 성전 뜰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자들도 은혜로 만나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전 뜰’의 만남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는 없습니다. ‘지성소’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지성소’의 만남은 하나님께 전심으로 나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의 의미는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찾고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성, 감정, 의지의 전인격적인 촉각을 만남의 기대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인간보다 하나님께서 이 ‘지성소’의 만남을 더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집니다. 어제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체험했다고 해도 오늘 또 새롭게 받을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또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하나님은 앞으로 알아갈 하나님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분적입니다. 기왕 하나님을 사랑할 바에는 뜨뜻미지근하게 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집중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을 과도하게 주신 예수님의 깊은 뜻, 복음의 정수를 깨닫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또한 기대하는 자에게 보상하십니다. 매주 예배 참석하기 5분 전부터 하나님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월요일 아침부터 기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일주일에 하루밖에 못 만나는 경우 다음 날부터 기다리지 않습니까? 너무 보고 싶어 하루도 못 지나서 전화하지 않습니까? 한 주일 내내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굶주림은 강력한 기대감이다

예배자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시인은 사슴이 물을 찾아 메마른 광야를 헤매어 뛰어다니다가 결국 찾아 못하고 그 힘이 다해 헉헉거리며 목말라하는 모습을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여기서 ‘갈급하다’로 번역되는 ‘아락’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목말라하는 모습뿐 아니라, 목마름 때문에 숨을 헐떡이며 울부짖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슴이 물이 없어 고통을 겪듯이, 시인은 생명 되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울부짖습니다. 시인의 영혼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라는 의문사는 시인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얼굴을 뵙기를 소원합니다. ‘가서’라는 말은 ‘들어가서’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시인은 전에 다윗의 장막에서 웅장하고 감격스런 예배를 경험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적국의 포로로 잡혀와 이국땅에서 예배를 그리워하며 노래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것은 고국 이스라엘에서 드렸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드렸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던 예배입니다. 시인은 과거의 예배를 회상하며 하나님을 향해 헐떡거립니다.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이 자신에게 도움과 위로가 됨을 애절하게 고백하며 진정한 예배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갈급함이 예배에 대한 가장 강력한 기대감입니다. 회중예배는 세상에서 채우질 수 없는 영적 양식이 채워지는 가장 강력한 현장입니다. 문제는 예배드리는 회중이 이런 갈급함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기도를 드렸는데 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나 다른 한 사람의 기도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는 선행으로 가득 찬 자로 착각합니다. 바리새인의 우월감은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일어났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1:1로 직면했습니다.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영적 굶주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자신의 굶주림을,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자,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나’에게 있습니다. 내 아내, 내 친구, 내 아들보다 지금 예배드리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변해야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도 변합니다. 내가 변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얼마나 굶주려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드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나의 죄, 상처, 아픔, 연약함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서툰 영어 때문에 힘들어하고, 문화차이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인종차별 때문에 상처 입고, 사춘기 자녀들로 인하여 상한 마음을 안고, 육신의 약함을 안고 하나님 앞에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open 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욕심, 욕망, 야망, 비교의식, 경쟁의식을 우리는 제대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찌들은 나를 주의 형상으로 빚어주시옵소서. 나는 나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굶주림이 하나님을 갈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일주일을 집중해서 살면 하나님의 응답을 풍성하게 경험합니다. 간절한 기대감을 가지고 주일 예배에 참여할 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거룩한 기대로 6일을 보내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깊이와 넓이는 우리의 갈급함의 양과 질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안에 영적인 갈급함이 없다면 완전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기대가 없다면 예배는 우리에게 죽은 의식이 됩니다. 구약제사의 특징은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거룩한 기대’속에 모였습니다. 그 거룩한 기대감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태도, 말씀에 대한 순종, 헌신 등으로 드러납니다. 

제사장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백성들도 제사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을 두 눈으로 보고, 오감으로 체험하고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제물이 태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임재하신 곳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40일 간 지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일일이 지시하시는 그 많은 율법과 성전 설계도를 다 받아 적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젊은 시절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고, 성전에 거하는 것을 사모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모세가 성막을 떠난 뒤에도 청년 여호수아는 성막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 이미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을 열정적인 마음으로 사랑했던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위업을 이루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성령을 기다릴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것을 기대했고 또 실제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휘장이 찢어진 것을 알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배드릴 때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계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기대하며 모였고 살아계신 능력으로 그들과 만나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거룩한 기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기대감의 연료이다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생명의 역사, 치유와 회복의 은혜, 회개와 헌신의 결단의 역사, 영적인 사건들이 매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 무슨 놀라운 일이라도 일어나겠는가 하는 태도로 예배에 임합니다. 기대가 없으니 역사도 없고 예배를 통한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질 것으로 받아들이고 눈에 보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마치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고 또한 하나님은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실 수 있고 또 이행하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대감이 커집니다. 기대감이 크면 클수록 믿음의 증거들이 많아집니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가 2005년도 봄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벌러르라는 한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되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몇 달 전에 선교사님의 기도팀에 의해서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기적을 체험한 자매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니 예배 몇 시간 전에 잃어버린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다가오자 소를 포기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녀가 소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선택한 믿음이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서 밖에 나갔는데 잃어버렸던 소가 나타났습니다. 그 소가 예배 처소를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벌러르 자매의 믿음을 받아주셨습니다. 주일 예배를 향한 기대감,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을 주께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했던 그 자매에게 예배와 소라는 두 가지 기쁨을 동시에 주셨습니다. 예배는 이론이 아닙니다. 예배는 기대감을 갖는 성도에게 드러나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배자입니다. 예배의 관객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의 선수로 뛰어야 합니다. 예배 시작 적어도 15분전에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과 자비를 묵상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본 ‘높이 들린’ 하나님의 환상을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요한이 ‘눈은 불꽃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은’ 그리스도를 본 그 장엄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타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목사나 예배 순서 맡은 자들에게 둘러싸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교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둘러보아 중보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들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이런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모든 사람들의 예배 체험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해결을 받으며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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