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 (고후 4:16-18)

첨부 1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 (고후 4:16-18)
   
저는 한 주간 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참 행복하였습니다. 아주 기쁘고, 감격스럽고 억지가 아니고 좋은 마음으로 “행복 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행복 합니다”라고 인사를 나누어 보십시오. 장로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권사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라고 인사를 해야 합니다. 

진해에 살고 활동한 시인으로 월하 김달진선생이 어느 글에선가 쓰기를 “인생 60대는 해마다 늙고, 인생 70대는 달마다 늙고, 인생 80대는 날마다 늙고, 인생 90대는 시간마다 늙고, 인간 100세는 분마다 늙는다”고 하였습니다. 인생 6학년이 되면, 해마다 늙습니다. 작년하고 올해가 다릅니다. 그런데 세월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정말 빠릅니다. 쏜살같이 날아갑니다. 시간의 속도감은 나이가 들면 자기 나이의 갑절로 달리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60대에는 120km로, 70대에는 140km로, 80대에는 160km로 달려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번 교단 총회에 다녀왔는데, 왕성하게 활동하고 발언하시던 선배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1500명 총대 중에 제가 알 수 있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몇 십 명이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1-2년 사이에 은퇴하신 분들이 많고, 새로 총대가 되어 오신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분들도 몇 분이 있었습니다. 

가을 하늘을 보면 인생무상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가을이 되면 “이별의 노래”를 생각합니다. 사랑하던 친구들이 한 사람, 또 한 사람 떠나갑니다. 저의 동창생들 중에 20여명이 세상 떠났습니다. 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 ‘이별의 노래’가 있습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3절 가사가 정말 가슴이 찡합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우리의 남은 날에 최선을 다하고 영적으로 준비하고, 남은 것이 얼마 없으니 소중하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시간이란 절대로 흘려보내지 말고, 다 사용하고 보내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에게는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속사람이 지음을 받았고, 우리의 육신이라는 겉사람 속에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으며,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겉사람은 누구며, 속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나라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겉사람이 있고 속사람이 있느냐고 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나’라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 속에는 육신의 이목구비를 가진 겉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세계, 그의 영혼의 세계는 밖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속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전인(全人)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인간을 알아듣기 쉽게 이원론적으로 말하여 영혼과 육으로 나누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 개, 세 개로 자꾸만 나누려고 하면 성경에서 벗어나게 되고, 창조의 진리와 섭리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의 사람이지, 영혼과 육을 나누려고 하지 말고, 전인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전인으로서의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서로가 상호작용하며,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알아듣기 쉽게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전인으로서의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겉사람이라고 할 때의 '겉'이라는 이 말은 밖에 외부에, 바깥쪽에(Outside)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고후4장에 들어와서 육신을 ‘질그릇’이라, ‘몸’이라, ‘죽을 육체’라고 하다가 ‘겉사람’이라고 합니다. 겉사람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육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중에 겉사람과 옛사람은 구별해야 합니다. “옛사람”이란 거듭나지 못하고 타락한 본성을 지닌 존재, 구원받기 이전의 죄인을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겉사람은 날로 쇠하여가고 후패하여 갑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주어진 인생을 잘라먹고 살다가 마침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제한된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겉사람이란 현세적인 실존을 말합니다. 우리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후패와 노쇠의 길을 가다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구원받지 아니한 사람의 겉사람은 후패의 길로 가다가 어둡고 침울한 멸망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가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은 것처럼 영적인 몸,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우리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이란 중생하고 거듭나고 구원받은 영적실존을 말합니다. 참된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사람은 내세적인 실존으로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갈 중생한 영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들어 있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고 지존한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높이고 경외할 수 있고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극적인 반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란 말입니다. 이 헬라어 “디오”라는 말은 “그러므로”라고 번역하는데, “그런 까닭에”, “왜냐하면”, “이런 이유로”, “이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그러므로”에는 엄청난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참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육체에 모셔놓고 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신 예수님이 보배이십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4:14절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축복과 은총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 죽을 육신도 살려주시고 신령한 몸으로 바꾸어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말을 가지고 새로운 학설이나 보다 성숙한 주제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1.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본문 1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낙심하고, 고민하고 번민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나약한 부분들이 다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낙심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낙심하지 않습니까? 때로 용기를 잃고 지치고 낙심합니다. 

사람이 소심해집니다. 죄의 종노릇하고 보면 허탈해집니다.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죄에 끌려 다닙니다. 속이 상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이런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하여 낙심하게 됩니다. 

여러분, 겉사람을 보면 낙심합니다.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나이만 먹고, 겉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겉사람, 우리의 육체는 낡아집니다. 낡아지니 조금만 심하게 사용하면 찢어집니다. 한번 늘어지면 원상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자주자주 고쳐 써야 합니다. 

어쩌다가 사진 찍어보면 속이 상합니다. 사진은 나이를 속이지 못합니다. 웃지 않으려면 찍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진 보기가 흉합니다. 그래도 조금 웃어야 봐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곱던 얼굴이었는데, 형편이 없습니다. 

속사람이 건강하면 겉사람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엡3:16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목표가 분명하고 성령 받아야 속사람이 능력이 있고, 강건하게 살아갑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고 성령이 성전을 삼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에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롬8:14-15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요, 아들들입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 사탄이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자의 영, 성령, 구원을 인치시는 성령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루 세 때 식사해야 됩니다. 육신의 몸이란 잘 먹어야 하고, 잘 쉬어야 하고, 적당한 운동과 관리를 통하여 건강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몸, 영의 몸,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중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사람으로 살지 말고,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1년에 한번 성경을 읽자고 하였는데, 많은 분들이 동참하시는 것 감사드립니다. 12월 가서 날 잡아서 읽자고 하지 말고,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일독하시는 원로장로님들을 보세요. 10-12월까지 3개월이 남아 있으니, 우리도 마음 독하게 먹으면 3독까지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1독하시고 선물도 받으시고, 영혼이 잘되고, 속사람이 건강해져야 합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사는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17절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받은 환난이란 잠시 받는 것이요, 견디기가 쉽습니다. 경하다, 가볍습니다. 환난이란 다른 말로 억압이요, 고난이요, 괴로움과 고통입니다. 이 환난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받으시던 고난을 오늘 성도들에게 남겨주셨습니다. 

빌1: 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한 짐 지고 갈 사람을 찾으면 내가 지겠다고 나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이라도 전도해야 하고, 건축해야 하고, 물질을 부담하라고 하면 뒤로 빠집니다. 한 짐 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흥회 때에는 자리만 채워주어도 감사하고 빈자리를 채우려고 왔다가 은혜는 그 사람이 다 받아가지게 됩니다. 

골1:24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낳은 순교자들은 영광스런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는데, 그들은 모두가 환난을 통하여 순교자들이 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도 잠시 받는 것이요, 주님이 보상하는 영광의 무거운 것과 비교해보면 정말 가벼운 것입니다. 

롬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의 개역성경에는 의역하여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 같은 가치를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충분히 만족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른과 갓난아기를 비교한다면 정신이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환난의 밤은 지나갑니다. 미움도 원망도 다 지나갈 것입니다. 실패도 낙심도 지나갑니다. 다 지나가는 것인데, 지나가지 못하게 붙잡지 말고, 그냥 혼자 가게 내버려두세요. “이것도 지나가리라” “이것도 지나가리라”하고 절대로 붙잡지 마십시오. “실패. 이것도 지나가리라”, “소외감, 이것도 지나가리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붙잡아야 합니다. 속사람으로 새롭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8절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의 영안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을 뚫어지게 보고 계십니까? 부귀, 영화, 명예, 이성, 그런 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으로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됩니다. 어린 청소년이 나쁜 것을 보고, 나쁜 사람이 됩니다. 화려하고 멋진 것만 보니까, 탈선하고 가출하고 성적인 방탕이 벌어집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육체의 남은 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베드로사도는 육체의 남은 때와 지나간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벧전4:2-3입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운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신령한 세계를 그려보고, 위의 것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신령한 세계, 성령의 충만한 역사, 말씀의 무궁무진한 진리의 세계가 있습니다. 

골3:1-2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국민일보에서 한 간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지난 2005년 파키스탄에 발생한 지진 현장에 일어난 기적을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키스탄의 지진 피해지역에서 이재민들을 돌보던 기독교인들, 기아대책 긴급 구호팀이 흙더미에 깔려 있는 청년을 흙속에서 끌어내었습니다. 그는 숨도 그치고 맥박도 없고 싸늘한 시체였습니다. 그래도 살려 보겠다고 피를 뽑기도 하고 인공호흡도 시키고 콧속에 입김을 불어넣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중에 목사님 한 분이 우리 이러지 말고 다같이 기도하자고 하여 안수를 하고 전부 다 이 청년의 영혼이 돌아와서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최후로 목사님이 “청년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소리쳤습니다. 왜 그리 소리쳤느냐고 하니까, 에스겔서에 보니까 마른 뼈를 보고 에스겔이 명령하여 말하기를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음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외쳤더니 그들이 일어나 큰 군대가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서의 말씀이 생각나서 한번 외쳐보자고 해서 “청년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일어나라!” 그러니까 휴~ 하더니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사람이 다 놀라고 제일 많이 놀란 사람이 “청년아 일어나라”고 한 목사님이 제일 많이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느냐고 물으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데, 하나 들리는 소리는 어디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고함을 치는데 고함소리가 날 때마다 몸에 힘이 확확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면 하나님의 생기가 따라가고 힘과 능력이 따라갑니다. 

속사람으로 새롭게 살려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속사람으로 새롭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하게 사는 사람은 불같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감동하고, 사랑으로 감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항상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