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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익이 조금도 없는 것 (골 2: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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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이 조금도 없는 것 (골 2:16-23)


사람이 사상적으로 미혹당하기는 참 쉬운 일입니다. 
역사에 나타난 최악의 사상 중에 하나인 공산주의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럴싸한 논리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시절에 그런 공산주의를 고무하는 사상서적 한 권을 우연히 읽게 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중공의 모택동을 찬양하는 책자였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난 후에, 제가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최소한 모택동이라는 인물에 대한 저의 판단만큼은 잠시 동안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모택동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를 읽게 된 후에야 그런 착각에서 깨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수백만 자국민을 굶겨 죽이고 있는 북한의 소위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머릿속에 아주 훌륭한 사상인 것처럼 주입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또한 제일 처음 공산주의가 선전되면서 소위 '잉여가치 착취'란 논리를 가지고 선동해 왔을 때, 노동자 계층에서 그 말에 쏙 빠져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란 것은 사람에게 실상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아니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논리만큼은 일견 지극히 그럴싸하고 지당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회 안에도 그런 미혹적인 사상들이 있습니다. 
바로 참된 신앙 진리를 떠난 이단들입니다. 
이단 역시 언뜻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하고 도저히 반발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사상들로 무장하고 있는 까닭에 그 선전에 단박 넘어가기가 참으로 쉬운 것이고, 또 한 번 빠져 들어가면 마치 공산주의자에 세뇌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좀처럼 다시 돌아오기도 힘든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바로 그와 같은 이단의 미혹에 빠지지 말라고 소리 높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소리들은 지극히 합당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 유익이 조금도 없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사망의 길로 빨려 들어가는 길이라고 골로새 교인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된 이단 사상들을 우리 성도들이 조심하고 끌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1. '의식적 율법주의 종교'가 대표적인 이단입니다. 

본문 16절과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경고하기를 "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사도 바울은 강력한 어조로 말했는데, 이것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Let no one sit in judgment on you.)는 뜻입니다. 
'그 문제들이 언뜻 듣기에는 그럴싸하고 너희의 신앙생활을 다시 재고해 보아야 할 만한 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런 문제로 너희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너희들이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라고 사도 바울은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문제와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성수"에 관한 문제라고 했는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율법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먹고 마시는 것'이란 바로 구약의 율법에서 금지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과 또한 당시 우상 신에게 먼저 바쳐졌다가 시장으로 나와서 팔리고 있던 음식을 신자가 먹어도 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막 7:19)고 명하셨으니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었고, 후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음식 자체가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니 관계없지만 연약한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삼가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내에는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자들이 그런 음식 문제를 가지고 따지고 들면서 신자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절기 성수에 관한 문제도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당시 다른 민족들에게도 '절기나 월삭'은 있었지만 '안식일'은 없었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은 구약에서 말하는 날들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구약의 절기를 문자적으로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못 박았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미 안식일은 주일로 바뀌고 있었으며 다른 절기들 역시 구약의 제도를 따라 문자적으로 지키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절기와 월삭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안식일 성수의 문제에까지 사도 바울이 이처럼 단호하게 선언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안식일 성수는 십계명 제4계명에 뚜렷하게 선포되어 있는 규례이며 다른 여러 율법 조목들 중에서도 가장 강조된 것 중에 하나인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조차 마치 일고의 가치도, 들을 필요도 없는 말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이었습니까?
바로 17절이 그 대답입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주의자들이 그처럼 목숨을 내걸듯이 중요하게 여기는 그런 문제들은 단지 "장래 일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며, 그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와 같은 구약의 의식들은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 대로 어디까지나 신약에 대한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의 의식은 장차 오실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그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예언적 가치를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옛날의 그림자를 본체와 동등시한다든지 아니면 본체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율법주의적 의식들을 가지고 신자의 신앙에 대해 따져 들고 비난하는 말은 아예 들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가지고 있는 참된 신앙에 대하여 확신과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때 골로새교회의 경우와 똑같이 율법주의, 의식주의를 가지고 우리를 사로잡으려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안식교나 유대교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건전한 영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신도 맑게 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음식을 잘 가려 먹는 것'이 신자의 필수 조건인 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요일의 안식일 성수를 강조하면서, 신자가 십계명의 다른 아홉 계명들은 그대로 지키면서 왜 유독 제4계명만 어기는 것이냐고, 마치 우리에게는 궁색한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양 당당하게 기세를 올리는 것입니다. 

일견 지당한 논조처럼 들리는 말이며, 무엇이 틀렸다고 대응할 길은 전혀 없어 보이는 듯한 논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빤한 율법주의적 논리와 사상 앞에 우리의 신앙을 미혹당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모두가 다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들을 마치 실체인 양 오도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몸' 즉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간단하게 다 해결되었던 문제를 공연히 어렵게 말하면서, 오늘날의 신약교회 신자들을 예수님 초림 이전의 구약 상태로 다시 되돌려 놓고자 하는 종교는 아무 재고의 가치조차 없는 이단일 뿐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외식적 신비주의 종교'도 실상은 아무 유익 없는 이단입니다. 

18절과 19절에 기록하기를 "18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아까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 대신 "누구든지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상을 빼앗다"라고 번역된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부당한 판결을 주다'라는 뜻이며, 거기에서 파생된 의미로서 '경쟁에 나갈 자격을 박탈하다' 혹은 '상을 빼앗다' 혹은 '정죄하다'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볼 때 오히려 '자격을 박탈하다'(disqualify)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즉 '이러이러한 점에서 당신은 모자라니 상급 받을 자격도, 구원받을 자격도 없소.'라고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부당한 판단을 결코 당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그래 가지고서는 아직 중생 받은 사람이 아니오.'라고 함부로 정죄하는 말을 이미 참된 신자가 된 사람이 곧이곧대로 듣고 빠져 들어가 실족당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미혹에 빠지게 되면 그야말로 모든 구원의 은혜와 상급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까? 
여기서 "일부러 겸손함"이란 말은 외식적인 경건생활을 하면서 그것을 남에게 과시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자기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어떤 고차원의 경건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그런 수준에 따라올 수 없다고 여겨지는 다른 신자를 은근히 내리깔고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천사 숭배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 대신에 천사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 교제할 수 없으므로 '천사의 중보'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면서 천사숭배 사상을 고조시켰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바로 그런 천사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 천사와 항상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주후 363년경에 모였던 라오디게아 회의의 기록에도 보면 "신자들이 천사들에게 찬미를 올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많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남달리 높은 수준의 경건생활을 유지한다고 하는 자, 천사의 중재를 거쳐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 범인(凡人)들은 알 수 없는 어떤 고차원의 영역에 속한 척하는 자 - 초대교회 교인들 중에도 이런 자들에게 쉽게 그 심령을 미혹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에 대하여 무어라 말했습니까?
그들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신비한 것을 보게 될 때 바로 그것을 의지하는 자 즉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 눈으로 본 환상에 도취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육체의 마음"이 된다고 했는데, 이 뜻은 '육신적 생각'이란 말입니다. 
  
즉 그렇게 스스로 본 환상에 도취되면 그 심령 역시 맑은 기운을 잃어버리고 영에 속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에 마음이 끌려가는 상태가 됨을 뜻합니다. 
그 결과는 자연히 그 본 것을 과장하게 되고 교만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의 실체를 그 얼마나 정곡을 꼭 찔러 드러내는 말씀입니까? 그처럼 무슨 신비한 현상에 의지하게 되는 자나 자기 자신의 경건생활에 자만하게 되는 자는 곧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가 아닌 다른 것을 대신 붙들고 있는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그런 자들은 자신의 경건 생활을 자기 신앙생활의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천사를 그리스도 대신 머리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바로 붙어 있어야 다른 온 몸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자라날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자가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끝장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외식적인 경건주의나 신비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혼란케 해 왔습니다. 
중세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일부 교파에 있는 수도승들의 모습은 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야, 이 사람은 정말 무언가 거룩한 사람 같구나.'하는 홀림에 빠지게 만듭니다. 
천사숭배 같은 신비주의는 천주교 내에서는 지금까지도 아주 흔한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언젠가 어떤 천주교 신부가 자기가 평생 모았다는 무슨 신비한 장면의 사진들을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보여 주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꽃 화원을 찍은 사진인데 그 배경이 묘하게도 한 여인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이라든지, 혹은 해변의 산책길을 멀리서 찍었는데 그 끝에 있는 난간이 머리에 두건을 쓴 여인처럼 보인 것을 두고 소위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진은 한 아기가 성당에서 허공을 계속 응시하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그 신부의 부언 설명에 의하면 그 아기의 눈에 무언가 신비한 것이 보이지 않고서는 그처럼 나이 어린 아기가 한 곳을 그렇게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는" 말들이 아니겠습니까?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신앙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개인적인 체험이 더 강조되는 종교는 결국 자만이며 교만일 뿐입니다. 
'당신은 나처럼 기적적인 경건의 능력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없으니 아직 참된 신자가 아니오.'라고 참된 신자를 부당하게 정죄하는 이단의 소리에 결코 현혹당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속적 금욕주의 종교' 역시 참으로 미혹되기 쉬운 이단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20절 이하 23절에 말하기를 "20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점을 우선 먼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함께 죽는다는 의미는 종이 목숨을 바쳐 그 상전을 섬기는 것과 같은 강력한 결속관계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결속됨으로써 자연히 세상의 초등학문 같은 유치한 원리에서는 이미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이 그처럼 확고부동하지 않은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마치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같이" 여전히 "사람의 명과 가르침"에 따라 사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의문(규정)에 순종하는 자"들이 흔히 사로잡히게 되는 말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라는 따위의 규정입니다. 
이것은 바로 금욕주의자들의 표어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경건한 신앙생활과 직결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자기네들만 그렇게 한다면 별 일 아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항상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런 생활을 강요하면서 은근히 억압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고만 가르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자랄 때나 잠시 써먹을 수 있는 교육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치한 교육을 성숙한 기독신자에게까지 강요하는 것이 바로 이단의 또 하나의 특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식의 교훈을 가리켜서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런 말들은 잠시 한 때 쓰일 뿐 곧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에게, 그것도 아주 철없는 단계에서 잠시만 쓸 수 있는 말일 뿐이지 조금만 자라도 쓸모없는 교육방식인 것입니다. 
그런 만사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금욕주의는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꾸며낸 종교 생활과 겸손, 그리고 자기 몸을 학대하는 일에 대해서는 일가견 있는 말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실로 금욕주의의 정체가 정확하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금욕주의 이단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제일 끝에 있는 말씀대로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이 금욕주의이지만, 정작 정말 금해야 할 것 즉 사람의 죄악된 육체의 욕망을 근본적으로 억제하도록 만드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 하등의 효력이 없는 것이 바로 금욕주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욕심 때문에 모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그 욕심만 없애면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라는 것이 소위 석가모니가 오랜 수도 끝에 깨우쳤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런 금욕주의가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떨쳐 버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기에만 거룩한 종교생활처럼 보이는 것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몸을 학대하는 고행주의와 잘 연결되는 것일 뿐, 결코 실제적인 유익은 전혀 없는 이단 사상인 것입니다. 

진정한 성별이란 '무엇을 하면 안 된다'라고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됨'으로써 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난 자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확실히 내 구세주로 믿어지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좋아했던 세상 낙들을 자연히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확실히 나의 왕이심을 고백하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의지했던 세상의 우상들을 절로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영원한 친구 되심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절로 세상의 술친구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세속적인 금욕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은 이것 하면 안 되고 저것 하면 안 된다.'라고 겁을 주는 소리에 말려들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종교생활이며 자기 몸을 학대하는 데에나 효과가 있을 것이며 열심히 행하면 행할수록 오히려 '부패'에 돌아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일견 경건하기 짝이 없게 보이는 금욕주의는 사실상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결합하게 되면 신자로서 당연히 멀리해야 할 것들을 자연히 금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실상에 있어서는 우리 신앙생활에 아무 유익할 것이 없는 말들이, 헛된 사고방식들이, 잘못된 이단 교리들이 오늘도 실로 그럴 듯하게, 아주 권위 있는 것처럼, 마치 거룩한 것인 양 우리를 꾀며 위협하며 미혹하려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 말씀을 더 잘 순종하는 신앙처럼 유혹하고, 신비주의는 무슨 특별히 선택받은 엘리트 신앙인 것처럼 우리를 꾀고, 금욕주의는 가장 유치한 것을 가장 거룩한 것처럼 가장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상이 이처럼 많은 사람을 쉽게 미혹하며 결국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마는 것처럼, 이단 사상 역시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여 결국에는 단체로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기에는 너무나도 그럴싸하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교묘하고도 무서운 미혹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끌려가지 않고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체만을 더욱 굳게 붙잡는 데에 있습니다. 
'몸'이신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림자'를 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야 우리는 '거짓말'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사는, 이 강력한 영적 결속을 체험해야만 우리는 진정 모든 이단적인 '의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똑바로 잘 믿는' 여기에 모든 것이 다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단'은 '타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이단은 신앙처럼 보이면서 실상은 참된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며 기독교처럼 보이면서 실제로는 기독교 내부에 침투해 있는 가장 무서운 적인 것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 유익도 없는 것들에 어처구니없게 폄론당하거나 자신의 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오직 참된 신앙의 본체와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실로 '함께 죽고 함께 살' 정도로 더욱 가까이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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