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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 (요 1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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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 (요 13:3-15)
   
오늘 9월 마지막 주일이 추석-한가위와 겹쳤습니다. 추석의 음식은 송편입니다. 설의 명절식이 떡국이고요, 추석의 명절음식은 송편입니다. “가을 맛은 송편에서 오고 송편 맛은 솔내에서 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송편이라는 이름은 송편을 찔 때에 솔잎을 깔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추석이 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는 속담을 말합니다.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추석이 되면 음식을 나누고, 덕담을 즐겼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대사회로 올라가보면 제천의식이 많았습니다. 고대국가 부여에서는 정월에 지키는 영고(迎鼓)가 있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10월에 지키던 동맹(同盟)이 있었고, 동예에서는 10월의 무천(蕪天)이 있었습니다. 이들 명절은 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추수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는 민족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미국에서 들어오고 보니, 미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을 받아들였지만, 본래 우리 한국에는 추석이라는 좋은 추수감사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씨 뿌리는 파종이 끝난 5월에 단오를 지키고, 추수가 끝내고 10월에 제사를 드린 것은 다 풍요를 기원하였며 추수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절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우리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처음부터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켰다고 하면 기독교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미국교회를 그대로 한국에 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이해하면서 복음을 토착화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나 초기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문제를 간과하므로 추석을 기독교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부터 추석을 추수감사절의 정신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교인, 기독교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중국인들이 만든 가차문자(假借文字)를 그대로 사용한 말입니다. 가차문자라는 말은 본래 글자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 음(音)만 비슷하면 글자를 빌려 쓰는 것을 말합니다.  주로 외래어(外來語)를 표기할 때 사용합니다. 프랑스라는 말을 그대로 쓸 수 없어서 불란서라고 합니다. 이탈리아는 이태리(伊太利)라고 했습니다. 피터(베드로)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으니 비슷하게 발음할 수 있도록 피득(彼得), 에베소는 이불소(以弗所) 히브리는 희백래(希伯來) 이런 식으로 비슷하게 발음하는데, 본래 글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음만 비슷하다면 빌려 쓰는 문자를 가차문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무엇이라고 표기하였느냐 하면 기리사독(基利斯督)라고 했습니다. 중국말로 ‘지리스뚜’라고 발음하였습니다. 예수는 야소(耶蘇)라고 했습니다. 음을 빌려 사용하였다고 하여 가차문자, 또는 취음(取音)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한문으로 ‘기리사독’이라고 했습니다. 중국말로는 ‘지리스뚜’라고 발음했다가 축약형으로 기독(基督- 지뚜)라고 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가차문자로 만들어 사용한 한문 그대로 기독(基督)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기리사독(지리스뚜)이 되었고, 우리는 기독이 되었습니다. 정말 전혀 엉뚱한 말이 되고 보니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 기독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한참 설명하니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이해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칭호는 안디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11: 26에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라는 사도가 다소에서 찾아가서 바울을 만나고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왔고, 두 사도가 교회에서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으며, 예수의 제자들을 부를 때에 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그 이름은 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은 사람, 제자, 도를 좇는 사람, 성도, 형제들, 믿는 무리라는 말을 사용하다가 드디어 그리스도인이라고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경멸하고 조롱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노스 ’라고 할 때에는 지독하게 잘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라, 예수쟁이, 예수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아주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한 두 마디로 말하면,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새로운 종교로 보아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칭호는 안디옥 시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반영한 말이었습니다. 저들이 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 분을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왕으로,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시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답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요13:15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본(本)’이라는 말은 본보기라는 말의 준말입니다. 본이라는 것은 옷을 만들 때에, 만들려고 하는 옷을 생각하면서 먼저 종이 위에 그려보고 잘라 내어 본을 뜹니다. 이것을 본을 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감-기지를 본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재단하여- 잘라서 옷을 만듭니다. 무엇이든지 본이 있어야 잘 만들 수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서 명품을 잘 눈여겨보고 그대로 사진도 찍고 본을 떠야합니다.

제가 공부하던 때에 중학교에 들어가면 달라지는 것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교복을 입어야 하였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유치원,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배우고,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할 정도로 교육환경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웠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는데, 꼬불꼬불한 알파벳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글씨본이라는 공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영어의 알파벳을 배울 때 ‘펜멘십 노트’를 놓고 따라 그려가므로 영어 알파벳을 배웠습니다. 펜멘십노트에는 영어 알파벳이 점선으로 그려져 있고, 화살표 방향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화살표 방향을 따라 점선으로 그려진 알파벳을 쓰고 익혔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먼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으로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었습니다. 

본이라는 것은 본보기입니다. 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휘포데이그마’라고 하여 ‘본보기’, ‘모형’, ‘복사’, ‘견본’, ‘표본’, ‘집의 기초설계’라는 뜻입니다. 본보기라고 하지만, ‘표준’이나 ‘모범’이라는 말이 더 좋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당신처럼 살아가라고 본보기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행한 것 같이 우리 성도들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주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발을 씻어주시면서 이렇게 먼저 섬김의 삶을 살아가라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고 봉사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섬김이요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할 수밖에 없으니 하는 일입니다. 이 모범적인 행위로 예수님의 긍휼과 온유 겸손하시고 섬기시는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고, 우리로 예수님처럼 살아가라고 보여주셨습니다. 

지난 부흥회 때에 ‘역사의 거울’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본을 삼고, 거울로 삼아서, 따라야 하는 것이 있다면 보다 잘 따르고, 버려야 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벧후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도 똑같은 ‘휘포데이그마’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본을 삼았다는 말은 그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교훈을 삼는다, 거울이 되란 말입니다.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았는데, 소돔과 고모라고 음란에 빠져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으니, 이것이 거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본을 삼으라고 하신 것은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약5:10에서는 좋은 본보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하던 선지자들은 고난을 받았고, 오래 참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오래 참아야 주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공생애를 마감하면서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습니다. 이번 유월절 만찬은 최후의 만찬이었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사랑하는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시간에 이르렀습니다. 마귀는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고 하는 생각을 넣어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팔아버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1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은 참으로 소중하고도 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오시면서 제자 중에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면서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막14:14)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내로 들어가서 물동이를 이고 가는 한 사람을 만났고, 그 여주인은 흔쾌히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에 예수님을 12제자를 데리시고 마가요한의 어머니 마리아가 준비한 객실 2층의 큰 다락방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는 중이었습니다. 이 식사는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신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일어나서 선생님의 발을 씻어드려야 하는데, 누구 한 사람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것이야 종이나 하는 일이요, 하인이나 하는 일로 알고 누구도 손발을 씻어주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먼저 나서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된 사람으로 선생님에게 발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염치도 없고, 먼저 나서지 못하여 송구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발을 내밀기를 주저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이 말은 차라리 씻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는 정말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인정도 있습니다. 위아래도 알아봅니다. 선생님의 하실 일이 있고, 제자들이 할 일도 있는데, 이러시면 정말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미루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아예 사제지간의 관계를 끊고,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발을 내어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옵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동안 실물교육을 하셨고, 솔선하여 본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13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면서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제3기 말씀 묵상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지금까지 가져본 수련회 중에 가장 은혜가 되었고, 깊이가 있고, 5명이 신청하였으니, 시작은 미약한 것 같았지만, 마치는 시간에는 상당한 깊이를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였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심애숙집사님이 하신 말씀 묵상을 읽어드려 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 사명을 다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다가왔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그려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많이 아팠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속상한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꼭 깨우쳐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녁식사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고 닦으십니다. 당시 유대사회에는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발을 씻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발을 씻어주는 일은 종의 일이었고, 직접 종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에 제자들은 많이 당황해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고 거부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시면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십니다. 

은30냥에 자신을 팔 가롯유다의 발을 씻기는 모습도 봅니다. 내일이면 그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텐데, 저 같으면 ‘나를 죽이려는 나쁜 놈이라’ 욕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정성을 다하여 깨끗하게 씻기십니다. 미움의 맘도, 원망의 맘도 없이 고통과 인내와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십니다. 내가 죽어야 했을 때 대신해서 죽어준 사랑,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나와 모든 것을 함께하는 사랑, 끝까지 믿어주고 아무리 많은 배신을 해도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받아주는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끝없는 사랑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이제 제 차례가 왔습니다. 저의 발을 예수님께 내놓기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으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제 발을 씻기실 예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을 것 같아, 저도 시몬 베드로처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제 발을 가만히 붙잡고 “왜 이렇게 상처가 많냐?”하시면서 어루만지십니다. 회개의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가만히 고개를 들어 나의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적인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이런 내가 예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나의 세상적인 더러운 때를 구석구석 말끔히 씻어주시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더러움을 묻히지 말라, 세상 일로 아파하지 말라, 내 안에서 편히 쉬라”고 하시면서 가만히 안아주십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시고 “내가 너희 발을 씻긴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고는 다른 사람의 발을 결코 씻길 수 없습니다. 선생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이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나는 예수님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젠 이기심을 버리고 낮아지겠습니다. 

묵상하면서 흙과 모래와 먼지와 오물들로 더러워진 발을 왜 씻어줬을까? 왜 발이였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만큼 낮아지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나를 높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 듣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던, 자기를 한없이 낮췄던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다른 사람들 앞에 낮아지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세상에 속해 살면서 이기적인 생각에 잡혀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만 보고 내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물질의 부요함을 더 높게 섬기고, 높아지려고 위만 보면서 살았습니다.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섬김의 자세를 본받아 이웃들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한 삶을 살겠습니다. 생명까지도 내어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쓰임 받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소망하며 내 맘에 살아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추석 한가위입니다. 거룩한 주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 부모와 형제, 친척들을 잘 돌아보고, 사랑하고,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사랑하고 섬기는데,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야겠습니다. 나를 섬겨주신 예수님,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이제는 나를 통하여 예수님의 섬김이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겠습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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