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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역에서 오는 영적시험 (시 77:1-3, 고후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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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에서 오는 영적시험 (시 77:1-3, 고후 7:5-7)


살다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할 때도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시험도 있고 어려움도 동반합니다. 그 어려움은 대부분 사람에 의한 어려움입니다. 하나님 사역하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희대의 인물입니다. 1세기에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한 인물입니다. 

하늘이 만든 위인

사도바울은 우선 출신성분이 참 좋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예루살렘에 유학을 한 명사의 집안입니다. 바리새인으로 철두철미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유대교에 열심이었습니다. 유대교와 반대되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냥 핍박이 아니고 증오심을 갖고 아주 열정적으로 핍박하였습니다. 학문도 깊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가장 권위 있던 가말리엘 율법사 밑에서 수학하였습니다. 헬라 철학에도 능통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보면 출신성분이 아주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회심을 합니다. 바울은 이번에는 회심한 후에 복음전파를 위해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전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데 불태웠던 열정을 이제는 복음전파를 위해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지칠 줄 모르고 자신만만하고 거침없이 없었습니다.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로 로마를 휘젓고 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가는 곳 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도 들어갑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들에게 서신서를 통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장)”고 강조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의 트레드 마크처럼 각인된 말씀입니다. 대단한 신앙입니다. 바울은 체질이 다릅니다. DNA가 다릅니다. 

사도바울이 전도하다 경험한 극적인 장면이 사도행전 16장에 나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어느 점쟁이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쫒아 줍니다. 그 여인을 통해 점치며 먹고 살던 사람이 고발하여 성경을 보면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많이 쳤다는 말은 40대 매를 맞았다는 말입니다. 당시 벌 중 하나였습니다. 터지고 찢어지고 피 흘리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꼬에 채워져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 새벽 2-3시경에 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시니 참 대단하였습니다. 그 환경에서 찬송을 부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웃으신 것입니다. 그때 이 땅에서는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파괴하는 지진이 아니고 회복시키는 지진이었습니다. 그래서 잠겼던 차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 얼마나 신이 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재판받으려 로마로 갑니다. 배타고 압송 중 바다 가운데서 풍랑만나 배가 파선하여 일주야를 뱃조각을 붙들고 표류하다가 멜리데라는 섬에 가까스로 기착하게 됩니다. 날씨가 추워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더니 나무에서 독사가 나와 손등을 물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순간 바울은 죄인이다 곧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저 사람은 신이라 여기고 섬기려고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3개월 후 다시 배타고 로마로 재판받으러 갔는데 로마에 가서 자유가 주어져 전도를 합니다. 

꿈에도 그리던 로마에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바울은 기원 35년에 소명을 받았습니다. 44년에서 48년까지 1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51년에서 53년까지 2차 전도여행을 하며 데살로니가서를 기록합니다. 54년에서 58년까지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후서,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투옥되어 로마로 호송된 후 옥중에서 소위 옥중서신이라고 하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합니다. 그 후 석방되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고 67년에 순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을 대 사도라 대 전도자라고 부릅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목회자들의 모범입니다. 모든 선교사들의 모델입니다. 모든 신학자들의 모델입니다. 뭐가 부족합니까. 능력과 영력과 지성과 자질과 열심과 출신성분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아주 완벽했습니다. 바울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습니다. 독사에 물려도 여상했습니다. 옥중에서 찬송을 부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3층천을 갔다 왔습니다. 그의 이력서에 실패란 없어 보입니다. 

의기소침

그랬던 그 사도바울도 마침내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영웅일수록 겉모습은 화려한데 뒷모습은 인간적인 법입니다. 스타들은 참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화려함과 박수와 인기에 묻혀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대 뒤로 들어가면 그렇게 쓸쓸한 삶을 산다고 합니다. 극도의 외로움에 빠져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타들은 남모르게 매일 술로 마약으로 우울증으로 살아가다가 때로 자살하기도 합니다. 어느 스타는 “자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의외로 영적침체를 겪습니다. 소외감을 느끼고 초라함을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신중치 못함에서, 야곱은 욕심 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졌는데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서 상처받아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역의 어려움이 이 사람 문제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목회합니다.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영성으로 열심으로 빠지지 않는 전도자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3층천 즉 낙원에 갔다 왔습니다. 뜨거운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습니다. 지식이 해박합니다. 이 정도면 아주 완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런 사도바울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큰 사도들에게 마음이 뺏겨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전 1:12)”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음을 서운하게 생각해서 기록한 문장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 즉 참고 비방을 받은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2-13).”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너무 교만하였습니다. 바울이 책망하면 모욕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고린도교회의 교만함을 책망하고 권면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이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고린도교회 교인은 사도바울이 전도하고 양육하고 육성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을 영적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을 양육하느라 희생하고 수고하고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 더 큰 게바와 아볼로에게 마음을 뺏겼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마음이 씁쓸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도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번듯하게 생긴 자들이 와서 우리는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력을 부풀려 늘어놓습니다. 말을 잘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들과 외모와 생김새 그리고 어눌한 언변에 비교가 안 됩니다. 못 따라갑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반격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할 수 없도다. 나는 그런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13).” 자기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에 따라 한다.” 바울은 여기서 거짓 교사들의 위선을 경고하고 성도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바울의 이 진실한 마음을 성도들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과장하고 언변으로 현혹하는 사람들에게 열광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이 슬픈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바울도 사람인데 왜 서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전하면 너희가 잘도 용납하는구나.” 그리고 고린도후서 11장 20절에서 더 극단적으로 말합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는 잘도 용납하는구나.” 

사도 바울도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성도들에게 진정어린 충고를 할 필요를 느껴 이렇게 고백(고후 11:18)합니다. “여러 사람이 육신과 출신을 자랑하지만 나도 자랑하겠다!” 지난 14년 동안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3층천에 갔다 온 이야기를 바울은 비로소 하게 됩니다. “너희들이 훌륭하다고 믿는 저 사람들에 비해서 나는 조금도 빠지지 않는다, 내가 학벌이 부족하냐? 학문과 열심이 부족하냐?” 그리고 고린도후서 12장11절에서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내가 나를 이렇게 자랑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고 너희가 시켰기 때문이라, 나는 너희에게 칭찬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다, 나는 어떤 지극히 크다는 사도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도다.” 그 말은 “너희들이 나를 몰라줘도 너무 몰라준다.”는 말입니다. 

극도의 소외감과 탈진 

살다보면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무서운 때입니다. 그래서 왕따 당하는 아이들이 열병을 앓고 자살도 하는 것입니다. 어른도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을 이지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이 왕따 문제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오늘은 교회생활에서도 왕따 현상이 일고 있습니다. 끼리끼리, 이것이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하는 아주 나쁜 현상입니다. 사도바울이 극도의 소외감을 느낀 것이 이 문제입니다. 사도들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사도들은 “네가 무슨 사도냐, 예수를 보기라도 했느냐, 누가 너를 전도자를 시켜주었느냐, 어디 신학교 나왔느냐”고 따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네가 무슨 사도냐고 따집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마저도 베드로와 아볼로를 더 크게 따라다닙니다. 바울이 설교를 잘 못한다고 비난을 일삼습니다. 그때마다 사도바울이 받았을 소외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바울은 극도의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열심히 전도한 것 같습니다. 다음의 구절은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며 유대인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4:12).” 

자기 교회 목회자의 소중함을 모르는 교회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한번 왔다 가는 부흥사에 깊이 빠지고 따라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기소침 하고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바울은 이 복음 전파를 위해서 결혼도 포기했고 몸에 늘 그를 괴롭히는 병도 지닌 채 일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의 심정을 너무 몰라줍니다. 

그래서 급기야 바울은 피로함을 느낍니다. 용기를 잃게 됩니다. 그때 바울은 이젠 죽어 천국의 주님께로 갔으면 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뉘앙스가 풍기는 구절이 빌립보서 1장 21-23절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래도 내가 육체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니라.” 그렇다고 바울이 자살하려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만큼 영적 침체를 느꼈고 소외감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런 영적 침체를 겪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이 오늘 목회자들이 어렵게 목회하다가 위로받고 격려 받는 대목입니다.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들도 모두 영적 침체를 겪었습니다. 오늘 본문 보면 천하의 사도바울도 심각하게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사역하다가 보면 이런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랬으니 오늘 우리들이야 말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들도 사역하다가 보면 이렇게 시험당하고 침체에 빠지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모두 사람들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천사가 아닙니다. 다 격려자가 아닙니다. 때로 어떤 분들은 사역자들과 헌신자들에게 낙심하게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사람들에게 시험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회복

마침내 사도바울이 회복을 합니다. 두 가지 때문에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위로(고후 1:6)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이시로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느니라.”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해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어려운 일도 당하게 됩니다. 그때 주께서 왜 위로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답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의 위로입니다. “그러나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다(6)”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이 생각해 보니 너무 잘못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을 너무 상심하게 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디도를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바울은 디도의 옴을 “하나님이 저를 위로자로 보내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금방 마음이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심성이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자기가 전도하여 성장시킨 청년회장 디도가 와서 위로하는 것에 바울은 그렇게 위로받고 기뻐하였습니다. 

결론입니다. 이런 일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이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욥도 다 겪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해결 방안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자꾸 사람에게 연연하면 더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기도 속에서 위로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관계로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주변에서 침체자를 발견하여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해야 하고 이웃을 낙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문제를 만들면 안 됩니다. 문제를 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회복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사역이고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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