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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막 9: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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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막 9:38-48)


한국 교회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에 크게 성장했습니다. 비록 요즘 들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의 겉모습은 지금도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면은 과연 어떻습니까? 과연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은 먼저는 구원의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우리도 실족하지 말아야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마다 9월이면 한국 교회의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개최합니다. 이번에는 좀 다르겠지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너무 안타깝습니다. 어느 교단은 돈을 주고 용역을 샀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총회를 하면서 깡패들의 힘을 빌려서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또 우리 교단은 목회자 연금 관리 상태를 감사한 결과를 보고하면서 회의를 비공개로 하는 바람에 안팎으로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왜 비공개로 하려고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공개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반가운 소식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어느 교단에서 교회 세습 방지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정말 통쾌한 소식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왜 그런 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까? 그런 법까지 만들어야 하는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이 정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언제부턴가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아니 전체적으로 교인 숫자가 줄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구교는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불교 신자들도 꾸준히 늘고 있고 심지어 이슬람교 신자들도 제법 많이 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 하자가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향해서 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요한이 주님께 말했습니다. 아마 잘 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 패거리 의식의 대표적인 행태입니다. 요한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선한 일을 할지라도 자기들과 한 패가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놀라운 일을 할지라도...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가 불우 청소년들을 잘 섬긴다고 소문이 나자 많은 청소년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청소년들을 누가 다 쫓아낸 줄 압니까?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저희 교회 청소년들이 그들을 다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요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9~40) 그런데 제자들과 주님이 왜 이런 대화를 나눴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당시 교회는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몸집을 키우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누구를 한 패로 삼을 것인지 아주 신중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를 비방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이미 많이 생겼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교회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교회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생각을 주님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상당히 너그러운 마음가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교회를 당장 뭐라고 비방하지 않는 자들도 장차 얼마든지 교회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잠재적인 적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하기 쉬운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이비 이단 집단을 대하는 태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관대하셨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그리고 주님은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긍적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으며 투쟁적인 생각이 아니라 지극히 평화로운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느닷없이 물 한 그릇과 상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 당시 교회는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지, 또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자치 잘못하면 장차 교회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싸울 수도 있었고 반면에 교회를 심하게 괴롭힐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 대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물 한 그릇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알면서 손을 내민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교회도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에 오늘 한국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어서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 말씀은 과연 주님의 말씀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지나치게 끔찍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막 9:42 하반절)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막 9:43 상반절)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막 9:45 상반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막 9:47 상반절)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주님을 믿는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 거기가 어디입니까? 남을 실족하게 한 자나 스스로 범죄한 자가 던져지는 지옥이 바로 거기가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주님은 심판하시는 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주님이 오셨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는 가운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우상은 본래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말했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믿음이 강한 자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그것을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전 8:10) 믿음이 강한 자들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멸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족하게 되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2) 결국 이 문제는 죄의 문제에 도달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하신 말씀의 정신이 사도 바울에게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놓치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장차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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