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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탈출(6) : 게으름으로부터 (잠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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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6) : 게으름으로부터 (잠 6:6-11)

제가 이 시간에 10개의 질문을 할 텐데 주의 깊게 들어 보시고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면 O 표를 해 보십시오. 

1. 지난 6개월 동안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
2. “넌 너무 게을러!”라는 지적을 종종 받고 있다.
3. “난 게을러서 못해!”라며 맡겨진 일이나 할 일을 자주 피하고 있다.
4. 게으름이 삶 전체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5. 삶의 지향성이나 목표가 없다.

6. 즉각적 쾌락을 주는 대상(술, 게임, 쇼핑, 약물 등)에 점차 중독되어 가고 있다.
7. 난 무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8.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빈번이 실패했다.
9. 대인관계를 피하고 점차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10. 내 인생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문요한 의사가 쓴 “굿바이 게으름”이란 책에서 나오는 진단표입니다.
(O표 4개 이상: 병적게으름을 의심, 6개 이상: 병적게으름)

게으름의 사전적 정의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입니다. 나태와 태만과 비슷한 단어입니다. 요즈음 여름 방학이 되어 대부분 어머니들은 이 게으름으로 아이들과 전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청소해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공부하라고 해도 공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아이들과의 전쟁입니다. 

게으름의 또 다른 현대적 표현인 “귀차니즘”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귀찮다+-ism"을 붙여 귀찮은 일을 몹시 싫어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교회에 와서도 귀찮아 성경도 펴지 않고, 귀찮아 찬송도 하지 않습니다. 심방 받는 것도 귀찮아하고 교인들과 대인관계 갖는 것도 귀찮으며, 관심이나 간섭받는 것도 귀찮아합니다. 속도의 문화, 영상 문화, 자기중심의 나 홀로 문화에 익숙하다 보니 귀찮은 것은 싫은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는 “니트족”이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통계청의 '1월 고용동향 조사'를 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니트족"이 201만 5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배우고 싶지도 일하고 싶지도 않으며, 모든 의욕을 잃고 누워 사는 무기력을 러시아에서는 "오브로모프병(病)" 이라고 했습니다. 곤차로프의 대표작 '오브로모프'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30을 갓 넘은 지주의 아들 오브로모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까지 나왔지만 집에서 무능력, 무관심, 무취미, 무기력 상태로 하루 종일 누어서 삽니다. 옷도 입혀 달라 하고, 식사도 식당 가기가 귀찮아 방에서 불러다 먹여 달라고 합니다. 연애할 기력마저도 상실합니다. 이 병이 볼셰비키혁명을 유발했다고 합니다. 이런 게으름은 로마제국을 망치게 한 로마병(病)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으름을 가리켜 영국 철학자, F.베이컨은 “태만은 모든 악의 근원이요, 근본이다.”라고 했습니다. 영국 수필가, 해즐리트는 “태만은 온갖 불행의 근원이다.”라고 했고 영국 동양학자, R. 버어튼는 “태만은 모든 일을 망친다.”라고 했습니다. 에쎈 바하는 “게으름은 절망과 이복형제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버트 버튼은 “게으름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며 악의 온상이며 온갖 재난의 근원이며 일곱 가지 대죄의 하나이며 악마가 휴식하는 방석이자 베개이며 악마의 형제이다. 게으른 개는 불결하다. 게으른 인간 역시 불결하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정신이 나태해지는 것이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벌레가 들끓는 것처럼 게으른 자의 머릿속에는 부패한 생각이 만연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혼은 악마의 포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게으른 자는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는 부자가 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 설령 바라는 만큼의 재물을 풍족하게 제공받더라도 나태함이 없어지지 않은 한 그들은 기쁘지 않을 것이고 몸도 마음도 결코 만족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방치와 나태는 인생의 독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게으름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게으름은 죄라는 사실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게으른 사고를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게으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9절 같이 읽겠습니다. 게으름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좀 더 확대 적용하면 게으름은 악한 것이니 영적 게으름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게으름의 잠, 전도의 게으름의 잠, 예배의 게으름의 잠, 사랑의 게으름의 잠, 순종의 게으름의 잠, 자녀 교육의 게으름의 잠, 자기 개발의 게으름의 잠, 달란트 개발의 게으름의 잠, 인간관계의 게으름의 잠, 사명의 게으름의 잠 등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게으를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게으름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게으름에 대한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게으름은 태생적으로 타고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주일학교 교사 부부로 섬기던 교수님이 제게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내와 이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부 집사님으로 교회에서 열심히 섬겼는데 이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아내의 게으름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집에 들어오면 집안이 쓰레기통이라는 것입니다. 스타킹도 돌아다니고 심지어는 속옷까지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도저히 이제는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 집사님은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부가 다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챙길 줄 몰랐습니다. 그냥 방치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게으름을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게으름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고 사회적, 환경적 문제로 돌리면 게으름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나의 의지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내가 게으를 수도 있고 내가 부지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지배계층이 피지배 계층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한 지배 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배층의 소수의 게으름을 가능케 하는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권이 신장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겐 게으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러셀이나 피에르 쌍쏘 같은 사람은 게으름을 악덕이나 죄악이 아니라 지혜이자 미덕이라고 말합니다. 게으름이야말로 마음의 부를 쌓는 수단이라며 칭송합니다. 자연 친화와 탈 물질주의적 가치들이 가미되어 미덕으로 승격시키고 ‘삶의 여유와 인간성 회복’을 위해 느림의 삶,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름을 예찬한 사람들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느림과 여유이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게으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유는 능동적 선택이고 할 일을 하면서 충분히 쉬는 것을 말하지만 게으름은 할 일도 안 하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효율성으로 미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름을 삶의 철학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름을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원인을 외부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름을 타고난 것 혹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게으름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부도덕한 것입니다. 게으름은 높은 지연 경향성, 낮은 성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택을 피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결정을 미루고 떠넘기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시작을 지연합니다. 해야 할 일이나 하기로 한 일의 시작을 자꾸 미루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고지서 납부 일을 넘기고, 약속시간에 늦게 나가고, 마감일을 넘겨 과제를 제출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딴 짓을 합니다. 시험을 보는데 책상 정리를 하는 것처럼 눈앞에 닥친 중요한 문제를 애써 회피하고 나중에 해도 되는 사소한 문제를 잡고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게으른 사람은 꾸물거립니다. 하기로 한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을 그냥 대충대충 슬렁슬렁한다는 것입니다. 옷을 벗어놓고 잘 치우지 않거나, 잘 씻지 않거나,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삶에 계획성도 없고, 활동도 없고, 스스로 돌아보지도 않습니다. 우유부단하여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누군가 전화해서 놀자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버립니다. 매사 해야 할 일을 제 때에 하지 않아 쫓기듯 살아갑니다. 조금하면 싫증을 느끼고 순간적 기쁨을 얻기 위해 중독에 빠집니다. 게으름을 신중함으로 미화하기도 하고 게으름을 여유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매사를 환경이나 선천적 요인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게으름은 죄입니다. 게으름은 “무기력, 활력 감소, 추진력 상실, 행동의 둔화, 적극성의 상실, 삶에 대한 활력의 감소” 등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굿바이 게으름”의 저자 문요한 씨가 말하는 것처럼 게으름이란 “삶의 에너지가 저하되거나 흩어진 상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고 자신을 망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죄라는 사실을 철저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게으름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합니까? 게으른 사람은 움직이기를 싫어한다고 말씀합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 

게으른 사람은 기회를 놓친다고 말씀합니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게으른 자들은 일을 복잡하게 하여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말씀합니다.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5:13) 

게으른 자들은 핑계를 잘 대고 책임전가를 잘한다고 말씀합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잠 22:13)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게으름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자기 개발이나 습관 치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이 하라는 것 하지 않으면 죄이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면 그것이 죄입니다. 죄를 지으면 마땅히 대가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듯이 게으르지 말라는 말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게으름이 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게으름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출발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마치 늪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힘듭니다. 게으름은 천성이 아닙니다. 게으름은 말씀의 외면하는 결과입니다. 선택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반복된 회피하면 자기 합리화에 익숙하게 되고 습관이 되어 벗어날 수가 없게 됩니다.


2. 모범을 통해 게으른 행동을 교정해야 합니다.

게으름에서 탈출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후에는 문제의 생각으로부터 발생되는 문제의 행동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생각는 게으르지 말아야 하겠다고 하는데 몸이 따르지 않습니다. 저희 집도 아침이면 계속적인 전쟁을 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저녁에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엄마는 학원에서 오지 않은 고3 딸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 아들에게 우산을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게을러터진 아들은 그걸 눈치 채고 제 방에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아들,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 때 아들은 “예, 잡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자는 녀석이 어떻게 대답을 하니?”라고 말하자 아들은 
“잠꼬대인데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퇴근하여 들어오면서 이 광경을 본 아버지가 
"아들, 밤에 늦게 돌아다니며 놀지 말고 일찍 일찍 들어와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도 있잖아."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 하지만 벌레는 일찍 일어났다가 죽었잖아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그 벌레는 새벽까지 놀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이었어.”라고 했답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당신은 요? 좀 부지런해 봐요.” 
“내가 왜.” 
“꼼작거리기 싫어 식탁에 차려진 밥도 드시지 않지 않아요.” 
“그야 밥그릇은 뚜껑을 덮어 놓고, 반찬 랩으로 씌워 놓아서 그렇지.” 

그 말을 하고 아내는 보던 TV 마저 보려고 소파에 앉았습니다. 밥을 주지 않고 계속 TV에 빠져있는 아내를 보고 남편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밥을 해주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사 먹고 올 거야."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오 분만 기다려요." 

남편이 "오 분만에 밥이 다 돼?"라고 말하자 아내는 
"아니요. 외출 준비하는 데 오 분이면 돼요."라고 했습니다. 

게으름을 서로 비난하지만 자신의 게으름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게으름을 고치기 위해서는 게으름의 원인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게으르게 만들고 있는지를 분별하여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밤늦게까지 자는 것이라면 잠을 일찍 청하는 것입니다. 위장이 나빠서 저혈압이라 그렇다면 그 원인을 찾아 원인을 제거하면 됩니다. 인생의 목표, 사명이 없기 때문이면 인생의 목표와 사명을 정하고 목표 성취 사다리를 만들어 어제의 오늘이 아니라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기대하며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니면 부정적인 사고 때문이라면 그 사고방식을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교정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문제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6:6)” 

개미를 멘토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개미를 모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개미가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개미의 어떤 부지런함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7절을 보십시오. 개미는 감독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둘째는 8절에 보십시오. 개미는 장래를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평가 받을 날이 있다는 사실을 상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께서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바꾸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규범과 모범입니다. 계명,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사랑하라.” 등과 같은 강화체를 통해 인간에게 교훈합니다. 그것으로 사람이 변화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모델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의 모델, 정직의 모델, 성실의 모델, 부지런함의 모델 등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의 모델을 보여 주십니다. 가장 위해한 모델 중의 모델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의 부지런하신 모습이 얼마나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까?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대하36: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렘 7:13)”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7)”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단 한 번도 게으르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막 3:20)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 여인을 만나 그녀의 인생 난제를 해결해 주실 때는 피곤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요4:6). 그 정도 부지런히 사역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지시기까지 사명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역하였습니다. 

한 평생 사명 붙들고 부지런히 사신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7)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8)” 

우리도 마지막 죽음 앞에서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적당히 살지 말고 사명 붙들고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3. 결과를 예측하고 철저히 게으른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게으름이 습관화되면 참 고치기 힘이 듭니다. 습관을 다스리지 못하면 습관이 인생을 지배합니다. 게으른 잘못된 생활 습관이 자신의 삶을 망칩니다. 모든 일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부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곽금주 박사는 그의 저서 "습관의 심리학"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은 습관과 싸워 이기는 것이다. 습관을 다스리지 못하면, 습관이 당신을 지배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데는 다섯 가지 방법이 좋다고 말합니다. 첫째, 이전의 반응을 새로운 반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단것을 먹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탕 대신 과일을 먹습니다. 둘째, 지치거나 불쾌한 반응이 생길 때까지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역겨울 때까지 담배를 억지로 피움으로써 담배에 대한 혐오감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그 반응을 부추기는 자극에서 그 사람을 떼어놓는 것이고 넷째,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자극을 점차적으로 도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큰 개를 무서워하는 어린이에게 강아지를 가지고 놀게 함으로써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가장 비효과적인 방법으로 벌을 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벌을 주는 것은 가장 습관을 고치는데 가장 나쁜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는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9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습관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잠입니다. 자녀들과 게으름 전쟁을 치루는 것 중에 50% 이상은 이 잠과의 전쟁일 것입니다. 스스로 통제하기 쉽지 않습니다. 잠만 잘 통제해도 부지런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파괴형, 소비형, 창조형입니다. 잠은 이 세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잠을 잘 자면 창조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알라처럼 22시간을 쿨쿨 자며 문제는 심각합니다. 게으르기로 소문난 나무늘보처럼 20시간을 잔다더니 여우원숭이나 햄스터처럼 16시간을 자면 문제가 보통이 아닙니다. 파괴적인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런던 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하루의 수면시간은 7시간이 가장 적당하다고 합니다. 적정시간보다 더 자는 사람 중 7~8% 정도에게서는 기억력과 인지능력 저하현상이 관찰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자도 조기 사망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수면 시간은 사회생활, 정신 및 신체건강, 조기 사망 등 삶과 다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10절 11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좀 더 누워있자 하면 어떻게 됩니까? 11절 같이 크게 읽겠습니다.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 6:11)” 

가난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상벌을 통해 습관을 고치시길 원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적당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상벌로 습관을 바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악 중에 출생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게으름은 가난으로 향하는 첩경입니다. 게으름은 가난의 어머니입니다. 가난하게 살고 싶으면 게으르면 됩니다. 

게으름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게으른 사람은 미루기 중독에 걸려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름의 결과는 인간관계가 불행해집니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게으른 사람은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여 상황을 악화시켜 버립니다.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잠15:19) 

게으른 사람은 게으름으로 마침내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도태되어 버립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 25:26)...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30)” 

손이 부지런한 사람은 부유하게 됩니다.(10:4) 부지런한 사람의 손은 남을 다스립니다.(12:24)
부지런한 사람은 귀한 재물을 얻습니다.(12:27)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습니다.(13:4) 부지런한 사람의 계획은 반드시 이득을 얻습니다.(21:5)

자녀 교육에 게을렀던 엘리 가정을 보십시오. 아들들이 예배당에서 간음을 하고 헌금을 훔치고 예배를 멸시하는데 거의 포기한 상태로 자녀들을 보고만 있습니다. 엘리의 게으름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습관이 되었습니다. 사무엘 상 1장 9절에 보면 엘리가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나가 눈물로 통곡하고 기도하니까 술 취했다고 합니다.(14절) 

게으름으로 영적 감각을 잃은 것입니다. 분별력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빼앗겨 백성들이 떨고 있을 때 4장 13절에 보면 엘리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합니다. 법궤는 자신의 문제이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무릎 꿇고 엎드려 통곡해야 할 상황인데 그저 앉아 있기만 합니다. 

4장 18절에서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질병의 70%는 게으름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게을러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명이 결핍된 것입니다. 언약궤를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위임해 버립니다(4장 4절) 

결국 엘리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들들도 죽고 엘리도 죽고 며느리도 아이를 낳을 때 이가봇이라 이름을 짓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게으름이 우리의 인생을 몰고 가는 방향입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 나갔는데 한가하게 게으른 잠을 자다 음행한 다윗을 보십시오. 그 후 얼마나 그 대가를 치렀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 12:10)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삼하 12:11)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하 12:12)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삼하 12:13)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삼하 12:14)”

게으름의 대가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함의 댓가 역시 큰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벌이 분명합니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피아노도 없는 기초수급 소녀이 세계적 콩쿠르 우승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17세 문지영양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장애 2·3급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서 한 달에 80만원씩 정부 지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너무 가난하여 교회와 학원 돌며 혼자 하루 8시간씩 연습하여 독일에서 열린 제13회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런던 올림픽에서 화려하게 우승을 하는 선수들을 보고 환호하지 않습니까? 다 부지런함의 대가입니다.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10년씩 몸에 베일 정도로 꾸준히 연습하고 연습한 부지런함의 대가들입니다. 적당히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철저히 게으른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미 굳어 버린 게으른 습관을 고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더러운 연못도 더러운 물을 빼고 깨끗한 물이 흘러 들어가면 살아있는 깨끗한 연못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게으름에서 탈출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게으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게으름은 죄라는 사실을 철저히 받아들이고 게으른 사고를 바꾸어야 합니다.
모범을 통해 게으른 행동을 교정해야 합니다.
결과를 예측하고 철저히 게으른 습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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