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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하고 아름다운 형제의 동거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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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 아름다운 형제의 동거 (시 133:1-3)

오늘 성경말씀은 1, 2, 3절인데 해석은 거꾸로 해야 합니다. 3절부터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생활 가운데 아주 좋아하는 세 가지가 1, 2, 3절에 나열되어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먼저 3절을 보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는 말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헐몬산을 정말 좋아합니다. 헐몬산은 유대인들에게 사랑받는 산입니다. 사랑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대지방인데도 헐몬산은 만년설이 있는 특이한 산입니다. 열대 지방에서 눈을 볼 수 있다니 얼마나 특이한 산입니까? 이스라엘과 그 근방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일 년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입니다. 눈을 좀 볼 수 있는 것이 왜 사랑의 조건인가? 눈이 녹아내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장 어려운 점이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물 전쟁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우물 전쟁이 계속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를 지나간 태풍 때 제주도는 하루에 540밀리미터 비가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1년 내리는 분량입니다. 그렇게 물이 적은 나라이기 때문에 눈이 녹아내린다는 것은 구세주 같은 소식입니다. 

헐몬산에서 녹아내린 물이 갈릴리 호수로 들어오고 그 물이 요단강 물줄기를 타고 이스라엘 국토의 중앙으로 흘러 맨 마지막에는 사해바다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갈릴리 호수에서는 민물고기를 길러내고 어부들의 생계 터전이 되고 거기서 잡힌 고기들은 이스라엘 국민들의 식탁을 기름지게 하고 요단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그 물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유일한 농업용수와 식수의 근원이 되니까 사랑받는 헐몬산, 사랑받는 갈릴리 호수, 생명의 젖줄 요단강 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가시면 길에서 지도를 파는데 하나 사십시오. 인공위성에서 이스라엘 전체가 사진 한 장에 나오는 사진입니다. 확대해서 파는데 사무실에 제 키보다도 훨씬 더 큰 이스라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 사진을 쳐다보면 지도의 맨 북쪽 거의 끝 부분에 헐몬산이 있는데 칼라로 하얗게 눈이 덮여있는 것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헐몬산을 바라보며 눈이 덮인 것에 희망을 갖는 사랑받는 산입니다. 

오늘 말씀에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한 것은 헐몬산에 눈이 녹아 내려서 온 땅을 적셔주는데 대한 시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차를 타고 오갈 때 한강물이 만약 바짝 말라 붙어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새파란 물이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산더미같이 저렇게 날마다 흘러내려가는 것을 보면 우리들 마음이 아주 풍부해집니다. 

박정희 정부 때 정부에서 이스라엘 기브츠 농장법을 배워오라고 이스라엘 농업 기술자를 한국에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숙소가 워커힐호텔이었습니다.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주 좋은 방을 주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저녁에 짐을 풀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려고 창밖을 내다보니까 한강 물이 새파랗게 산더미같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뛰어 내려가서 보니까 바닷물도 아니고 오염된 물도 아니고 식수로 마셔도 쓸 수 있는 좋은 물이 그렇게 많이 내려가는 것을 목격하고 그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기브츠 농장이라는 것은 물이 없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연구한 졸렬한 영농방식입니다. 이렇게 물이 많은 나라가 무슨 기브츠 농장이 필요합니까? 제가 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이 나라는 너무 부러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냥 갔습니다. 

저는 기브츠 농장을 견학 갔다 온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는 기브츠 농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강물, 낙동강물이 저렇게 많은데 무슨 기브츠가 필요합니까? 우리나라 수준으로 말하면 헐몬산의 눈도 아이들 말의 표현으로 “새 발의 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그게 굉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산입니다. 

두 번째 2절 말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고 했습니다. 3절 말씀이 육신적 상황의 기쁨이라면 2절 말씀은 영적 상황의 기쁨입니다. 

성경을 보면 알게 됩니다. 유대 나라의 백성, 아브라함 후손의 삶의 기초는 영적인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 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에게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심정 통치 국가를 이룬 특이한 제도를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항상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해 줄 것인가를 기대하고 아브라함도 거기에 택함을 받은 사람이고 모세도 그러한 사람이고 다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백성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따르라. 모세가 200만 인구를 출애굽시킬 때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가야 한다.” 그래서 백성들도 모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출애굽 민족 이동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모세가 죽으니까 또 어떻게 됩니까?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그래서 또 그때는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하나님 말씀으로 민족 형성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라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삼손, 기드온, 입다, 드보라…. 

이 14명의 통치자가 그때마다 나타나는데 그때마다 성경말씀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누구누구에게 말씀하시니라.” 그러면 그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국가 형성을 해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나라가 커지고 국민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영적 지도자와 행정 통치자를 구분해서 “왕권 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왕을 요구했을 때도 사무엘이라고 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사울이나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적 문화 속에서 탄생했고 그러한 역사를 항상 살아왔기 때문에 삶 자체가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들 주변에 있다는 것은 마치 식량을 많이 쌓아놓은 것과 같은 든든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 성경 첫머리에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요한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에는 “들판에 가서 메뚜기를 잡아먹고 석청을 먹었더라.”라고 묘사했습니다. 옷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고 했습니다. 요즘 문화로 말한다면 정상적 생활을 하지 않는 야인 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요즘에는 이런 사람이 딱 하나 좋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TV 프로그램에 나올 수 있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광야에 나와서 소리를 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그랬더니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전국에서 다 모여들었다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민족이지 세례는 알지도 못하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런데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세례 받는 종교 예식을 이 세례요한이 행하니까 왜 그런 것을 행하느냐고 반항하는 사람 한명도 없이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다.”라고 하면서 다 세례 받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왜 그런 야인 한 사람이 나타나서 외치는 소리가 그렇게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는가? 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해서 선지자가 안 나왔습니다. 세례 요한이 끊겼던 300년의 역사가 하늘의 소리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가 언제 오실 것인가 하고 모두 다 기다리는 그런 시기에 세례요한이 나타나니까 “이는 메시야다.”하고 다 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메시야인줄 알고 세례 받으라고 한 것을 다 받는 현상이 나타났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그러면 뭐하는 사람이냐?” “나는 메시야를 영접하는 사람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가 메시야다.” 예수님이 나타나시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분이 메시야다.” 그래서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은 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고대하고 고대하고 지치고 또 지친 상태에서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하늘의 음성이 들리니까 모두 다 나가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영적 문화 민족은 하나님의 종이 탄생한 것을 보면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어떤 때는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에 핍박을 하면서도 없으면 못하는 애증 관계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은 하나님의 종 제사장 임직식입니다. 이 제도는 출애굽기 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9장에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이 되는 성례전 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 의복을 가져다가 아론에게 속옷과 에봇 받침 겉옷과 에봇을 입히고 흉패를 달고 에봇에 정교하게 짠 띠를 띠게 하고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거룩한 패를 더하고 관유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 그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영원한 규례가 되게 하라.” 그때부터 전해 내려온 제사장 임직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아래에서 쳐다봅니다. 그러면 먼저 제사장이 된 선배들이 모여서 젊은 제사장 후보생을 가운데 앉혀놓고 이 모든 순서를 하는데 이 제사장 될 사람은 젊어서도 수염을 반드시 길러야 합니다. 성령이 내리는 의미로 머리에 관유를 붓는데 이 관유는 일곱 가지 식물로 짠 기름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름 부어 세운 종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에다 기름을 부으면 잔이 얼굴로 흐를 거 아닙니까? 그러면 수염으로 흘러갑니다. 그렇게 수염에 흘러서 옷깃까지 내림 같고 온 몸에 뚝뚝 떨어져서 성령의 임재가 그의 온 몸에 임했다고 하는 뜻으로 그의 기름을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간에 밑에서 바라보는 백성들은 막 손뼉을 치면서 우리말로 “할렐루야”를 부르면서 “여호와의 거룩한 제사장이 우리 가운데 또 한사람 탄생하였도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려줄 것이며 큰 하나님의 축복을 나에게 줄 기도를 드려줄 것이며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제사장의 탄생을 기뻐하노라.” 그러면서 환영하는 것입니다. 헐몬의 눈은 육신 생활의 도움이기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고 제사장 탄생은 영적 삶의 도움이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1절은 무엇인가? 이것이 제일 중요한 말씀입니다. 2절과 3절 말씀은 두 말씀이 모두 1절을 설명하기 위해 예화로 사용된 말씀이 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2절, 3절보다 더 좋은 것이 “형제가 함께 동거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었는가? 

오늘 말씀 그 위에 보면 “다윗의 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유대 백성들은 생명과 같은 존재 하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물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언약궤라는 것입니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궤짝입니다. 길이가 1.10m이고 폭과 높이가 67cm로 되어있는데 안과 밖을 전부 금으로 입혔고 밑에는 금고리가 달린 네 발을 만들어서 놓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궤짝 속에 뭐가 들어있나? 십계명, 두 돌판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영원한 언약의 말씀이 거기 들어 있고, 그 다음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내려주신 식량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나가 들어있습니다. 그 다음에 모세와 아론의 영적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고 살구나무 열매가 맺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바로 그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거기에 보관해서 “이것은 하나님이다.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 되어진 현실이다.” 그래서 그 궤짝 안에 이 세 가지를 보관하고 그것을 생명과 같은 국보 1호로 보존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성을 생각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블레셋 백성과 전쟁하다 빼앗겼습니다. 20년 동안 기럇여아림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찾아와야 되겠는데 예배드릴 구심점이 없어지니까 백성들은 다 흩어지고 20년 동안 영적 정신사가 다 망가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하든지 저 언약궤를 다시 빼앗아 와야겠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찾아왔습니다. 그랬더니 흩어졌던 이스라엘 많은 형제들이 다 몰려와서 예배가 회복된 기쁨을 하나님께 모여서 노래하고 흥겹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렇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고? 헐못의 이슬이 시온에 내려 식량이 풍족해있는 기쁨과 같으며 관유를 머리에 붓고 제사장이 탄생하는 그 기쁨과 같도다.”하고, “흩어진 형제의 만남은 어떤 것보다도 기쁘도다.” 

그동안 우리가 20년 동안 흩어져서 도망 다니고 이렇게 어렵게 살았는데 하나님의 임재성이 있는 언약궤를 다시 회복시킴으로 말미암아 모여든 형제들과 기쁨을 노래하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행복을 위해서 첫 번째 내리신 축복이 창세기 1장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은 인간 자체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복의 조건이다.” 그래서 이 형제라고 하는 것은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주신 후 성경에 틀림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함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행복 조건이 됩니다. 사람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남한은 인구가 5천만이고 북한은 2천4백만입니다. 반도 안 됩니다. 그러면 북한에서 생각할 것입니다. ‘아! 똑같은 자연환경에서 똑같은 국토를 가지고 똑같은 사람이 같은 역사에서 사는데 5천만이면 그 좁은 땅에서 무엇을 먹고 사나?’ 그럴 거 아닙니까? 인구가 많아질수록 더 잘 먹고 살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 인구가 많은 나라들이 이민을 오라고 이민정책을 쓰겠습니까? 사람이 많이 와야 자기들도 행복하기 때문에 오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흉악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늘어가니까 임금님이 대신들에게 “어떻게 벌을 주어야 백성들이 무서워서 죄를 덜 짓게 될 것인지 연구하라.” 그래서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는데 그 중에 제일 훌륭한 결정이 “그 놈을 사람이 없는 곳에 보내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살게 죽게 하라.” 그래서 생긴 제도가 귀양살이입니다. 사람에게 사람을 못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까? 사람과 못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공범자는 독방에 가둡니다. 아무도 말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율법이 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파스칼이 본 인간”이라고 있습니다. 

“인간이 행동하는 모든 일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오셨습니다. 여신도들은 화장품을 추석에 선물 받아서 바르시고 오셨습니다. 내가 보려고 내 얼굴을 단장합니까?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음악가가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들으려고 합니까? 들려주는 것입니다. 

영화배우들이 멋진 연기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웃, 형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하게 됩니다. 자연 소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곧 나를 살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웃은 곧 너다. 그러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교합니다. 선교할 대상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제가 LA에서 목회할 때 시장이 저한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지역 시와 당신의 교회가 합작해서 시민들을 위해서 봉사를 하자.” “그럽시다.” 그래서 만났습니다.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했더니 우리 시에서 예산 편성을 할 테니 교회는 일주일 내내 사용하지 않는 교회 건물을 시민에게 개방해서 쓸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교육관이 대학을 해도 되는 교육관으로 만들어놨으니까 교육관을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봤더니 어린이집을 운영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 맞벌이하는 부부가 많은데 엄마들이 아이들 보육 때문에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를 다른 곳에 보내면 월급 나가서 받으나 마나 하게 되니까 이들을 위해서 교회와 시청에서 수고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서 선생님들 월급을 주고 우리 교회는 건물을 대여함으로써 그 시에서 맞벌이하는 부부들의 어린아이들을 맞아서 하루 종일 돌봐준 적이 있습니다. 거기 오는 아이들을 보니까 보통 3~6살입니다. 

그런데 저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사실 귀찮기도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다칠 때도 있었고 아이들이 교회 물품 깨뜨릴 때도 많았습니다. 교회를 지저분하게 해서 청소도 자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다 시민 봉사다. 우리가 이런 것을 다 감수해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하고 교인들에게도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열심히 도와주어서 시에도 굉장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 모인 아이들을 보고 저는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모릅니다. 우선 이 아이들이 총천연색입니다. 피부색깔이 솔직히 말해서 새까만 아이들도 있고 하얀 아이들도 있고 중간 색깔도 있고 나처럼 노르스름한 아이들도 있고…. 제가 남자, 여자 어린이 국적 조사를 했더니 한 10개국도 넘었습니다. 

제가 이 아이들 노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했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 베트남, 노르웨이, 영국, 이탈리아 할 거 없이 모든 나라 어린이들이 다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 보니까 서로 상대방 색깔을 그리워합니다. 그것 참 신기합니다. 하얀 아이들은 자꾸만 검은 칠을 합니다. 검은 아이들은 자꾸만 하얀 밀가루를 바릅니다. 서로 상대방과 같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인종, 피부 색깔 아무 장벽이 없고 아이들끼리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흑인 아이가 백인 아이에게 질문을 합니다. 

“How can I be like you?” “내가 어떻게 너 같이 될 수 있느냐?” 그러면 백인은 대답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I want to be like you.” “나는 너 같이 되길 바란다.”

얼마나 얘들이 은혜스럽게 노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때 느꼈습니다. 어른들도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스스로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날마다 누가 높으냐 싸웁니다. 높은 지위에 앉으려고 자리싸움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매일 천국입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 우리 대한민국은 2천만 인구가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이동합니까? 부모, 형제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매일 슬퍼지는 문화가 있습니다. 가족 만나기 점점 어려워집니다. 이제 몇 십 년 후에는 통계적으로 1인 1가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아집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만남이 없어집니다. 사람은 만나기 어려워지고 기계 만남이 상식 수준을 넘어가는 심각 수준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제 앞으로 스마트폰이 점점 더 신제품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 하나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싸우게 됩니다. 돈 많이 소비합니다. 피곤합니다. 귀찮습니다. 신경 써야 합니다. 하지만 기계와 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성폭행 당하고 죽는 줄도 모르고 엄마가 PC방에 가서 있지 않습니까? 기계가 좋은 것입니다. 점점 더 그렇게 됩니다. 사람이 싫고 기계가 좋아지는 세상이 됩니다. 

우리 기독교가 가는 길을 분석하면 첫째가 영혼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인간됨의 최고의 가치를 영적 존재라는 사역을 하셔서 예수님의 설교는 모두가 다 종말론적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지상의 삶이 끝나고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다소 세상에서 고생스러워도 실망하지 말라고 그렇게 살라고 권고하고 사도 바울은 인생 말년에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지키고 믿음을 지켰다.” 왜 싸우면서 믿음을 지켰는가?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마련하였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일평생 싸우며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생활 해야 건강한 신앙생활이 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면 예수 믿고 천당만 가면 되느냐? 이 세상의 삶은 무시하느냐? “아니다.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라.”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하면 행복해 질 것이다.” 세계 평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 중국과 일본, 한국은 때 아닌 영토 분쟁 때문에 전쟁이 날 거 같습니다. 그거 손바닥만 한 돌덩어리 몇 개를 놓고 온통 세 나라가 신경전을 벌리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해 보면 실제로 그 돌멩이를 차지하는 국가도 실제적 유익은 별로 없습니다. 또, 포기하는 국가도 큰 손해는 없습니다. 자존심뿐입니다. 사실 정치가들의 계산이 더 많습니다. 21세기 우리 성숙한 인류는 그런 문제를 어느 국가도 손해 없이 얼마든지 평화적 협상이 가능한 성숙한 인류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말에 빈대 몇 마리 잡다가 초가 상간을 다 불태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빈대가 없습니다. 이도 없고 벼룩도 없어졌습니다. 왜 없어졌느냐 하면 6·25 전쟁 때문에 다 불타 없어졌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우리나라에 가져온 게 그 전에 DDT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나와 보니까 기생충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초등학생부터 일렬로 세워놓고 머리카락 속에도 집어넣고 집집마다 이 DDT를 뿌렸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약이 없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가져온 DDT가 대한민국의 빈대, 벼룩이니 하는 것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저도 전에 머리에 많이 맞았는데 여러분 가운데 그거 맞으신 분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 없어진 것입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이 빈대를 없앨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으로 했느냐 하면 인두를 새빨갛게 달구어서 집안의 기슭에서 자라는 빈대를 인두로 지지는 겁니다. 새빨간 인두로 지지니까 초가상간에 불이 나서 빈대 잡다가 불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합선되어서 불나는 것만큼 많았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입니다. 이제 돌멩이 몇 개 때문에 초가 상간 다 태우고 세 나라가 다 전쟁할 지도 모릅니다. 이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 년 중 가장 좋은 추석이라는 가족 만남이라는 시간이 잘못하면 이혼율이 높아지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불화의 동기가 되기 쉽고 지루하고 짜증만 나는 길바닥의 고난 시간이 되기도 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선물 때문에 허전하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 살아있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 많이 기쁘다.’ 이렇게 생각하고 만나야 그게 만남이지 보따리부터 풀어놓고 계산하는 추석은 지나가나 마나입니다. 행복은 자기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이 계절에는 우리가 살아있는 형제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성경 말씀대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 그런 추석 명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은 진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나이다. 오늘 추석 명절을 맞이해서 오고 가는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만남이 행복할 수 있는 은혜의 계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을 떠난 많은 형제들이 무사히 일을 마치고 행복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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