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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계명을 주노니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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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을 주노니 (요 13:31-35)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31-32)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영광을 얻었고(31-32)

가룟 유다가 예수님 곁을 떠나자마자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지금 영광을 받았고...받으셨도다.”(31) 영광이란 말은 어떤 일이 완성된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일이 진행 중인데 영광이란 말은 하지 않습니다. 전쟁은 이겨야 영광입니다. 사업은 성공해야 영광입니다. 시험은 합격해야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선언하신 것은 어떤 완성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가 떠난 시점에 주님은 어떤 완성을 내다보셨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죄악의 제거입니다. 12제자 중에 섞여 있던 가라지가 뽑혀버렸습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면 순도는 높아집니다. 유다가 떠남으로써 12 제자라는 작은 집단이 깨끗해졌습니다. 나아가서 유다가 떠남으로 더 큰 인류의 죄악이 제거되었습니다.(히9:26, 요일3:5) 유다는 예수를 팔았고, 예수님은 그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탄은 멸망당하고, 인류를 더럽힌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의 배반은 악이 제거되는 영광입니다. 
  
둘째로, 사탄의 제압과 인류 구원의 완성입니다. 인류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쫓겨났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의 심판을 받았고, 죄 때문에 두려움과 허무와 공포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서!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관찰했던 로마의 백부장은 그 죽음을 보면서 이렇게 감탄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27:54) 주님의 십자가는 위대합니다. 그 십자가로 가는 길이 바로 유다의 배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떠나간 시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순간이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영광이라 여기고 있습니까? 시간 세계에서 잠깐의 고난보다 영원한 승리가 영광입니다. 배반당하고 죽는 것도 영광임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주님은 자신이 배반당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장은 고통이나 영원히 평안한 것이 영광이요, 지금은 가난해도 영원히 부요한 것이 영광이요, 지금은 박해를 당해도 영원히 권세를 누리는 것이 영광이요, 지금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것이 영광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광을 볼 줄 아는 신령한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이어서, 주님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33)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먼 타국에 가는 줄로 알았습니다.(7:33-34)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결하려는 줄로 알았습니다. (8:21-23) 제자들 역시 그 말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를 의미할까요? 적어도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이 죽으실 십자가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떠나신다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도 버리겠습니다.”(36-37) 하면서 장담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하니까, 뭔지도 모르고 마시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십자가에 이르기는커녕 하루도 못 되어 예수를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요한 역시 잔을 마시기는커녕 멀찍이서 십자가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고독한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승천입니다.(14:2, 3:5, 7:33-34, 8:21-23)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지 40일 만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4:2) 그러므로 주께서 처소를 예비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 주님이 계신 곳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영계와 물질계를 오가시고, 내세와 현세를 오가시며, 사망과 생명 사이를 왕래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따를 수 없는 세계입니다.
  
아무튼, 주께서 떠나겠다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근심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특히 따라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신다는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유언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34절에 나오는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제자들에게 당부한 새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 자체는 새 계명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에게 명하셨던 옛 계명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

‘사랑’이라는 단어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며, 항상 쓰이는 말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랑’은 누구나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말과, 주님이 명하신 사랑은 내용이 다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 바로 거기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죄인들을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건 우애, 부모 사랑, 자녀 사랑의 얘기는 흔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합한다 해도 주님의 죽음과 견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발적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제물이 되기 위해서! 무슨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편없는 죄인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 신앙의 근거입니다. 저는 처음 예수 믿고 얼마쯤 교회 생활을 하다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이 신앙을 계속 지켜야 될 까닭이 무언가? 꼭 기독교에만 빠져야 되는가?” 그러다가 저는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위해 죽어줄 사람이 있을까? 나를 끔찍이 아끼시는 어머니도 나대신 죽지 못합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아들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신 사실을 가슴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떤 성인군자가 이 못난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단 말인가! 예수님 밖에 없다. 그래 예수님만 믿자! 주여, 나는 죽을 때까지 주님만 굳게 믿겠습니다.” 주께서 만난 사람들을 보세요. 살인강도 바라바, 탐관오리 삭개오, 마태, 남성 편력에 빠진 수가성 여인, 간음하다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여자, 나병 환자, 혈루병자, 38년된 병자,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 교만에 도취된 유대인들, 귀신들려 공동묘지에 버려진 자. 이들을 위해서 죽음을 자청하신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새로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마5:44)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 사랑에는 못 미칩니다. 원수사랑은 누구도 실천해보지 못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결점이 많은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다소나마 나를 미워하고 반감을 품은 사람은 더더욱 사랑치 못합니다. 원수란 수굽니까?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나를 보고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 사람 망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기를 기다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예기(禮記)에 보면 ‘불구대천지수’란 말이 있습니다. 같이 하늘을 대하고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아버지의 원수, 형제의 원수, 친구의 원수는 꼭 갚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그 어떤 원수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무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양심이 마비된 원수,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원수, 허랑 방탕한 원수, 아집과 교만으로 찌든 원수, 신성모독의 원수! 영원한 하나님의 배신자들. 이런 하나님의 원수들을 위해서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결코 실행된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랑입니다.  
  
셋째로, 이유 불문하고 먼저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누가 나를 사랑하면 사랑합니다. 그나마 내게 이익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주님은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0,19) 우리는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도 서로 먼저 손 내밀기를 싫어합니다. 친한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고 나서도 먼저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항상 갈등 속에 돌아갑니다. 주님은 조건 없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장벽이 허물어지고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사랑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교회의 법이요 교회의 표식입니다

주님이 새 계명을 주신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불신 세상을 향한 계명이 아닙니다. 세상은 어차피 사람의 계명이 지배합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신 후에 시내산 아래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새 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애굽의 법, 즉 세상 법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법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부르신 새 백성입니다. 구약시대 선민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선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이 영적 이스라엘이 지켜야 될 계명이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참 교회의 표지는 사랑입니다. 몇 천 명 몇 만 명이 모였으니까 참 교회가 아닙니다. 당회가 조직됐으니까 참교회가 아닙니다. 교리가 잘 되어 있으니 참 교회가 아닙니다. 유명 인사가 많으니까 참 교회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겉모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증표는 될 수 없습니다. 참 교회는 사랑 위에 세워져 있어야합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사랑하고, 양과 양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35) 

주님은 ‘교인’이나 ‘신자’란 말을 사용치 않으시고 ‘성도’란 말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제자’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란 스승의 가르침과 행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를 따라야 돼요. 예수님은 사랑의 법으로 사셨습니다.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교회도 주님이 주신 사랑의 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구나!’하고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인끼리 서로 싸우면 참 교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를 따르는 사람들인고?” 참 교회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 밖의 세상은 철저하게 세상 법으로 다스려집니다. 유대교인들은 613개조의 율법으로 사회를 다스렸습니다. 로마는 기가 막힌 법 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래된 서구 사회는 오늘날 가장 법치주의가 잘 시행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이런 나라들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헌법과 각종 법을 만들어서 다스리는 우리 사회는 과연 잘 나가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단군 시대에 법은 여덟 가지에 불과했습니다. 함무라비 왕은 돌기둥 하나에 나라 법을 다 기록했습니다. 오늘의 법은 트럭에 실어도 모자랄 만큼 방대합니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악해져만 갑니다. 왜 그럴까요? 법이 잘못 된 것일까요?  
  
세상 법치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법은 양심을 전제로 만들어집니다. 법은 최소한의 제한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그 선을 넘지 말라고 만듭니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악한 인간들은 법을 하한선으로 보지 않고 상한선으로 봅니다. 최소한 지켜야만 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최대한 어길 대상으로 삼아요. 법은 어기려는 사람에게 못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회에서 법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어기려는 자들이 법률가를 동원하여 어길 궁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죄형 법정주의’나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법을 어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구세주와 같은 원칙입니다. 둘째로, 인간은 영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육체를 가둬 놔도 마음이 제어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제도나 형식으로 얽맬 수 없는 존재입니다. 몸을 묶는다고 마음까지 묶일 존재가 아닙니다. 특히 죄를 짓는 일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영혼으로 죄를 짓습니다. 육체를 묶고 처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전혀 개선되지 않습니다. 개선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 법의 맹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천국 백성이 모인 곳입니다. 구성원들은 하나님 자녀들입니다. 이들을 세상 법으로 지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법, 새 계명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 법이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천국 백성은 남이 강제로 묶어야만 되는 노예들이 아닙니다. 스스로 영혼에서, 양심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스스로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법은 철저하게 자기 제어를 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고전13:4-6) 

사랑은 완벽한 자기 제어의 법입니다. 이 법이 바로 교회의 법입니다. 교회는 천국 시민이 지상에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왕국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임금이시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왕국 시민입니다. 주님은 자기 왕국의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 주셨습니다. 교회는 왕국이로되 사랑의 왕국이요, 왕권이 있으되 사랑의 왕권이 지배합니다. 오늘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이러한 교회 통치의 원리를 알고 교회를 세워간다면 바로 세워질 것입니다.  
  
사랑의 법은 교회만의 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적용되는 공동체의 원리입니다. 가정의 법도 사랑의 법이어야 합니다. 가정의례 준칙이 가정의 법이 될 수 없고, 모세의 율법도, 논어 맹자도 가정의 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 이전에 사랑의 토대가 있어야 됩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을 제쳐놓고 도리를 따진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사랑 없는 매나, 사랑 없는 섬김은 불행일 뿐입니다. 대발이 아버지가 호랑이 같아도 집 나간 딸 때문에 밥을 먹지 못하니까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가정을 아름답게 합니다. 기업도 역시 사랑으로 운영돼야합니다. 요즘 부쩍 인간 경영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 회사라지만, 기업이 사람을 위하지 않는다면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경영자가 근로자를 귀찮은 생산 도구로 생각하거나, 근로자가 경영자를 배부른 돼지로만 생각한다면 살벌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법치주의 세상이라 해도 법으로만 다스려진다면 지옥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형사 노릇을 하던 조선인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잡지 않고 도망치게 한 일을 놓고 마음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서로 쫓고 쫓기는 신세가 됐지만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모든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종교인, 교육자, 학생, 근로자. 모든 계층의 부조리와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허물을 들추어 매질하기 전에, 먼저 이들을 동족으로서 사랑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매를 때려도 미워서 때리지 말고, 사랑으로 때려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사회 지탱의 방법입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행복의 계명입니다. 가정도, 교회도, 회사도, 학교도, 사회도 사랑으로 다스려질 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님이 주신 영원한 새 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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