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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 (딤전 4:6-9) - 단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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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탄한 신화를 버리라 (딤전 4:6-9)

여러분, 징크스(Jinx)라는 말을 아시지요? 사전적인 의미로 ‘징크스(Jinx)는 재수 없고 불길한 현상에 대한 인과 관계적 믿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징크스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집단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있습니다. 집단적인 징크스라는 것은 예를 들면 ‘13일의 금요일은 불길하다’라든가, 우리 신앙인들은 믿지 않지만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해야 집안에 우환이 없이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비싼 이사비용을 들이고서라도 손 없는 날에 이사를 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인 징크스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운동선수들 가운데는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에는 속옷을 비롯해 양말을 안 갈아 신는다던지, 머리를 안 감는다던지, 선을 밟지 않는다던지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징크스 때문입니다. 

또 ‘2년생 징크스’라는 말도 있습니다. 첫 해에는 아주 잘 하던 선수도 2년째 되는 해에는 꼭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만 징크스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에는 빨간색 넥타이를 매면 좋은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빨간색 넥타이를 매는 사람도 있고, 수능시험을 치루기 전에 엿을 먹으면 좋은 점수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징크스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수능시험이 100일 남았을 때에 학생들이 소나타 자동차에 붙어있는 S자를 떼어내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S자를 가지고 있으면 시험을 잘 봐서 서울대(S대)에 갈 수 있는 점수가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징크스라고 말하는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보면, 징크스는 분명 그릇된 신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그런 징크스를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앙인들 가운데도 징크스를 믿는 그릇된 신념을 갖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빠졌더니 그날 재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십일조를 빼먹었더니 큰 불행이 닥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손해를 보았다’느니 하는 것도 모두 징크스를 믿는 그릇된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징크스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징크스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은데, 어느 순간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굉장히 크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번 중 1번밖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징크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징크스에 대한 그릇된 신념을 갖고 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아주 강하게 말씀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망령되다’는 말은 문지방은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곳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삶의 자리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거룩함의 문지방을 너머 세속으로 건너가서는 안 됩니다. 거룩함의 문지방을 넘어 세속으로 넘어가는 것이 망령된 것입니다. ‘허탄한 신화’라는 말은 ‘늙은 노파가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헛된 말’이라는 뜻입니다. 할머니가 어린 손주를 재우면서 아이를 잠재우기 위해서 들려주는 동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부분 우화이거나 거짓으로 지어낸 말들입니다. 요즘과 같이 책을 통해서 읽은 이야기를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할머니가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서 말해주기도 하고, 때론 말문이 막히면 지어낸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할머니가 해 주신 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으면서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상들의 이야기 가운데서 사실적인 것들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재미있게 해 주기 위해서 없는 것을 꾸며내 이야기해 줍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허탄한 신화’입니다. 

신화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신화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꾸며내는 것이 신화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단군신화가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일연이라는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이겠지만 제가 다시 한 번 해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환인에게 그것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버지 환인은 환웅의 요구를 허락해줍니다. 그래서 환웅은 풍백과 우사와 운사라는 세 신과 함께 3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태백의 산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인간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같은 굴에서 살던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환웅은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톨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몸과 마음을 갈고 닦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곰과 호랑이는 굴속에 들어가서 쑥과 마늘만 먹고 지내는데, 성질이 급한 호랑이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고, 끈기 있게 참았던 곰은 21일 만에 아름다운 여인이 됩니다. 그가 바로 웅녀입니다. 

여자가 된 웅녀는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웅녀와 결혼하려는 남자가 없자,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신하여 웅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생겨난 아들이 바로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왕검은 주전 2333년에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조선’입니다. 이 단군왕검은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중국의 주나라 무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기자라는 사람을 조선의 왕으로 봉하자 단군왕검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나중에 아사달로 몰래 숨어 들어와서 산신이 되었습니다. 그 때 단군왕검의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합니다. 

우리 민족이 그런 단군신화에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지 못할 때 그 뿌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말씀으로 바꾼다면 ‘허탄한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국신화일 뿐입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기록한 책이 두 권이 있습니다. 하나가 고려 제17대 왕인 인종왕의 지시로 편찬한 『삼국사기』이고, 다른 하나가 앞서 말씀드린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의 책임 하에 11명의 학자들이 쓴 우리나라 역사의 정사입니다. 반면 『삼국사기』보다 150년 후에 기록된 『삼국유사』는 일연 스님 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야사입니다. 단군신화는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없고, 한 사람의 승려에 의해서 쓰여진 야사인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단군신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건국신화를 사실화하려는 사람들은 단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단군상을 공공장소에 세우려 하였습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에게 국가적 자긍심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전국 초등학교에 단군상을 설치하려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3600개의 단군상을 설치하려 하다가 우리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369개를 세우고 중단되긴 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그런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그 일을 계속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문화운동연합이라는 단체는 ‘단월드’라고 알려진 단학선원이라는 세력이 만든 단체로 단군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단체입니다. 단군은 우리가 섬겨야 할 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설화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설화나 신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를 신으로 섬기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입니까? 단군신화를 그냥 신화 정도로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백설공주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또는 효녀 심청이 이야기를 해 주는 것처럼 옛날 이야기로 해준다면이야 괜찮지만, 그것이 우리의 역사이고 더 나아가 단군을 신으로 숭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 모든 문화 속에는 신화가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리스-로마 신화가 있습니다. 지금도 문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나 로마 신화에서 최고의 신으로 나오는 주피터를 진짜 신으로 섬긴다면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신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화는 그저 신화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이지 역사적 사실로 만든다든지 그것을 진짜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런 이야기는 우리의 경건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6절에서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인 디모데가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양육을 시켜야 하는데,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양육시키는 방법이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고, ‘좋은 교훈’은 거짓된 교훈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교훈을 말합니다. 오늘로 말하면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으로 양육을 받을 때에 좋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꾼으로 양육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되는 것으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언급하면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버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재해석되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삼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양식이 되거나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영양소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에도 가끔 그리스-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때로는 유명한 문인들의 문학작품을 예화로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예화일 뿐이지, 그것이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문학작품을 읽거나 들을 때에는 재미있고 감동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 영혼에 양식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을 살찌우고, 우리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우리의 삶의 양식을 삼으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엄히 경계하신 것들에 매료될 때가 있습니다. 그건 비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화나 문학작품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1:4절에서는 또 하나를 우리게 경고해 줍니다. 그것은 ‘끝없는 족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만큼이나 족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 조상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는 가문도 있습니다. 
 
제가 울진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제가 섬기던 지역 옆에 영덕군 영해읍이 있습니다. 그곳에 안동 권씨 집성촌이 있는데, 그곳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새로 부임한 후 목사님께서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데, 목사님이 가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어떤 목사인지는 몰라도 우리 같은 양반들이 사는데 뭐하러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꾀가 났답니다. 다시 가서 인사를 하면서 ‘교회 목사로 새로 온 안동 김가 아무개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인사를 받아주고 집안에 들어오라고 말도 걸어주더랍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안동 권씨나 안동 김씨 아니면 양반 축에도 못 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양반이니까 사람 대우 해 준 것입니다. 몇 백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당신 조상들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 묻는다면 아마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이야기 하라고 해도 끊임없이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씀합니다. 조상들 이야기 아무리 많이 해 봐야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지 않으면 조상들의 이야기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때로는 조상들의 이야기 때문에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족보 이야기에는 언제나 위험한 요소가 내재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족보 이야기는 대부분 구전을 통해서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리고 실수하고 잘못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잘했던 것들만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그렇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지는 것도 있지만 조상들의 행적이나 사람됨을 멋지게 꾸며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해서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조상들이 영웅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영웅의 자손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바르게 세우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양반이라는 이름 아래 고리타분한 구시대적 문화나 사고를 그대로 간직하려는 풍습이 우리 가운데 있음이 그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문의 지난 역사가 아무리 자랑스럽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내 신앙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히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태복음 3:9) 

이 말씀을 거꾸로 읽으면 지금 너희는 이 돌들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그들의 허탄한 신화와 같은 족보 이야기를 그렇게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그건 비단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내가 왕년에 이런 사람이었는데’라는 과거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 역시 ‘허탄한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고서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을 해 보십시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그 질문에 우리 스스로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 질문에 ‘나는 옛날에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직함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렇게 대답한다면 그것 역시 허탄한 신화에 우리 스스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 나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묻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지 않는다면 지난날의 내 자신의 모습이 무슨 의미가 있는냐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옛날에 이랬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옛날이 지금의 나를 어떻게 만들었고, 지금 나는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어떻게 연단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지 않으면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연단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지난날의 내 모습으로 만족해버리는데,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앞으로 전진해갈 수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만이 자신을 연단시켜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숙에 있어서 만족할 수 있는 단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만큼이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에베소서 4:13) 자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닮았다고 말할 때까지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나는 예수님을 온전히 닮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 다할 때까지 변화되고 자라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라가야 합니다. 

자라가기 위해서는 연단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안주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안한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 합니다. 좋았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평안함을 통해서는 우리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총회가 제정한 ‘단군상 문제 대책 기도주일’입니다. 단군신화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숙해져갈 수 없습니다. 신앙적인 입장을 떠나서도 그것을 단순히 신화라고 받아들이면 될 뿐이지, 그것을 사실화하려 하거나 더 나아가서 신격화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허탄한 신화’도 아울러 버려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허탄한 신화일 뿐입니다. 

우리는 경건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연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부패해지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허탄한 신화’에서 벗어나십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경건에 이르도록 우리 스스로 연단하십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 가십시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힘주시고,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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