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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로뎀나무 아래서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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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로뎀나무 아래서 (왕상 19:1-8)

엘리야는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편이었습니다. 3년 6개월 만에(눅 4:25; 약 5:17) 쏟아지는 빗줄기는 엘리야의 갈멜산 승리를 확인시켜주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멜산에서의 승리는 엘리야를 더욱 더 위기에 처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멜산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아니했고 도리어 이세벨의 살기등등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전쟁에도 겁내지 아니했던 엘리야는 이세벨의 사자가 전해주는 살기 띤 통첩을 받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유다 브엘세바로 도망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격전지 갈멜산상에서 승리의 영광을 엘리야가 독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광야로 이끌어내시고 사막 가운데 한 로뎀나무 아래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한 로뎀나무 아래서 준 자와 받은 자만이 아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 체험을 하는 축복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Ⅰ. 위기를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19장 3절에 『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본문 『 이 형편 』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불로써 응답을 받은 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기손 시내로 데려다가 쳐 죽였습니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만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고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가는 아합왕 앞에 달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을 브엘세바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세벨을 피해 광야로 향하는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위한 비겁한 도피가 아니였습니다. 결코 육신의 죽음이 두려워서 피하는 도피 행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불러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신 섭리적인 도피였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계시 전달을 위해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불러내기 위해함이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왕후 이세벨을 충동시켜 엘리야에게 살육의 통첩을 보내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이 부름에 응한 엘리야는 사막의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상의 승리의 영광에 취하여 안주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또 다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자 축복입니다. 


Ⅱ. 자신의 한계상황을 입으로 고백하게 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19장 4절에 『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을 목표로 하고 하룻길(약 40km이내)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 상황에서 자포자기하거나 침륜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엘리야 역시 자신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하나님에게서 찾겠다고 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야의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마태복음 26장 38절에 『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결과 무엇인가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지경에 처한 자신의 처지에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자신이 선조들의 노력에 비해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한데 대해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한계상황에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전능자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드리겠다고 서원을 받아내기 위하여 한나를 성태치 못하게 하셨습니다(삼상 1:6). 
그리고 모든 주위 상황을 동원하여 한나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마침내 한나의 서원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 뿐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다가 그 나무 아래서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19:5).

로뎀나무(Broom tree)는 사막지방에서 자생하는 관목입니다. 주로 계곡이나 자연적으로 생긴 언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나무의 높이는 3m 안팎의 높이이고 오늘날 아랍 사람들은 이 나무를 금작화(a genista)라고 부릅니다. 

가느다란 긴 가지와 작은 잎사귀와 흰 꽃과 노란 꽃이 어울려 피는 나무입니다. 특히 사막 지방에서는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을 받고 있는 나무입니다. 아랍인들은 이 나무를 땔감이나 숯을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한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나님께 고백하다가 피곤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잠이었습니다. 
시편 127편 2절에 『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잠을 주신다는 말은 평안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베드로도 경험한 잠입니다.
사도행전 12장 6절에 『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라고 했습니다. 


Ⅲ. 대면해 주시는(브니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본문 19장 5절에 『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 천사 』는 여호와의 사자(19:7) 곧 구약시대에 현현하신 신약에 나타날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세기 16장 7절에 『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6장 13절에 『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신약에 나타날 그리스도가 되는 증거는 ①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② 제 1위 되신 성부 하나님을 본 자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출 19:21-24; 삿 13:22). ③ 성령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여호와의 사자는 곧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야곱도 『 어떤 사람 』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였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하여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했습니다(창 32:30). 그리스도가 『 어떤 사람 』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 하나님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을 공개하셨습니다. 
천사가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19:5). 여호와의 사자가 또 어루만졌다고 했습니다(19:7). 
"어루만지며"에 해당하는 "나가"( )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단 8:18; 10:10). 
제 2위 되시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되신 모습을 예견하시는 장면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예표적인 어루만짐입니다. 어루만졌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소유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2) 인격적인 음성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19장 5절에 『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7절에도 『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신약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체험하게 하시는 묵시적인 교훈입니다. 

3) 떡과 물을 가지고 찾아 오셨습니다. 
본문 19장 6절에 『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친히 가지고 오셔서 허기에 지친 엘리야에게 주시는 떡과 물입니다. 숯불에 구운 떡은 우리를 위하여 찢어 주신 주님의 살을 의미합니다. 한 병의 물은 우리를 위하여 쏟으신 주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요 6:55). 숯불에 구운 떡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한 병의 물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주님의 살과 피로 인하여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 55-57절에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떡과 물을 먹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는 주님이 가지고 오신 떡과 물이 있었습니다. 
이 떡과 물은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이 떡과 물은 말씀과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이 같은 체험이 가능한가하는 문제입니다. 

천사와 여호와의 사자의 어루만짐과 일어나서 떡과 물을 마시라고 하시는 음성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통하여 이 같은 체험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소유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인격적인 주님을 체험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속에 주님의 어루만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솟아나는 생수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4) 그가 받은 사명수행을 위해 힘과 능력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본문 19장 7절에 『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8절에 『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피곤에 지친 엘리야는 떡과 물을 먹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성찬의 체험으로 엘리야는 다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수 없습니다. 이세벨의 칼날에 도륙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19:15).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신의 뒤를 계승시켜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19:16). 

요즈음 코미디프로 가운데 "어르신"코너에서 소고기 노인의 한 장면처럼 허무의 반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소고기 사먹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고기를 사 먹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림동에 300여 평의 땅과 홍천의 45,000여 평의 땅을 받았다고 자만하면 안됩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신다고 하셨으니 나의 하나님이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이시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할 일이 남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시지 않습니다. 할 일이 남은 자에게는 생명을 취하여 가시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거리를 주시기 때문에 피곤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유형무형의 아합과 이세벨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은 죽도록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광야로 잠시 피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야말로 광야 같은 세상 중에 한 로뎀나무와도 같습니다. 신사동에 세워진 갈보리교회는 한국과 아시아와 세계에 세워진 참된 그리스도 교회 가운데 한 로뎀나무, 그 로뎀나무입니다. 그 로뎀나무는 신사동의 그 교회, 곧 갈보리 교회입니다. 

오늘의 진리의 교회는 사탄의 불같은 도전을 피하는 도피처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만민이 기도하는 눈물의 밀실密室입니다. 
오늘의 진리의 교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와서 쉼을 얻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동산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죄로 인하여 불안한 휴식을 취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시달린 몸을 뉘어서 평안의 잠(휴식)을 자는 곳입니다.

영원한 안식에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영원한 안식도 얻지 못합니다. 
오늘의 진리의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각자가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하는 역사의 광장입니다. 

오늘의 진리의 교회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신령한 식음작용을 통하여 새 힘을 얻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각자의 육체에 채우는 일을 계속하는 축복의 전당입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서 받은 주님의 사랑 그것은 오늘 우리가 한 로뎀나무인 갈보리교회에서 받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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