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 21:1-11)

첨부 1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 21:1-11)

예전에 어린 다윗이 골리앗에게 승전하고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에 "사울은 천천을 죽이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다"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다윗에게 화근이 되어서 일평생을 사울에게 도망을 다니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사울은 다윗에게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같은 인생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가르쳐 주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기셨습니다. 그러던 예수님께서 마지막 한 주간을 남기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전에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모습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펴고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를 살펴보면서 그 놀라운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사건을 이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되었던 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전부터 계획된 사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자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재로 이 땅에 보내주시겠다고 선지자를 보내서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유월절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는 유월절이 되기 엿새 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때를 바로 이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엿새 전에 먼저 감람산 쪽의 산을 오르십니다. 이 산 마루에는 두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벳바게였고 다른 하나는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감람산의 등선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두 명에게 아주 중요한 일감을 맡겼습니다. 그 일감은 다름이 아니라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왔습니다. 그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며 만유의 주재가 되시는 데 하필이면 길들이지도 않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셨습니까? 마치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아서 당선 된 예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티코를 타고 들어가는 모습과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입성하신 것에 대해서는 이미 500년 전에 스가랴서 9장9절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는 날입니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며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새끼를 타고 뒤뚱거리면서 오고 있을 때에 아주 많은 무리들이 보고 어떤 사람은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오시는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통령이 취임할 때에 카페트를 까는 것이 공식적인 절차인 것과 같습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메시아를 기대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무리 중에서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 무리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앞에서 가고 뒤를 따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무리들이 외쳤던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찬양 속에서 이 말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님에 대한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무리들이 지금 로마로부터 압제받는 상황에서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걸었던 메시아로서의 기대는 영적인 메시아보다도 다분히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는 로마정권을 때려 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그 분이 오시면 당장에 로마를 박살 낼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인 메시아는 탱크와 군마를 거느리고 타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종의 코미디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동물이 나귀였습니다. 그 나귀 중에서 더욱더 가치가 없었던 새끼나귀를 타고 터덜터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코미디 중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본 예루살렘이 소동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예루살렘에는 두 번째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첫 번째 소동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소동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입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 성안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대략 이백 오십 여만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모였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때 반응을 지진에 의해서 흔들리는 상태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이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파문을 일으켰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는 민란과 반란에 대하여 매우 과감하게 대처하였습니다. 특별히 유월절 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 해방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당국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모종의 계획을 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손을 내밀었던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살해하는 음모를 집행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소동하였던 무리들 중에 한 사람이 '이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을 하자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핵심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나사렛인'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예수님은 하시는 사역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말씀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내고자 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동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허물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사역을 수행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소동이 아무리 거셀지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그 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위한 평화의 왕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그 분의 입성은 바로 죄와 사망 권세를 정복하시기 위한 승리의 입성임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에수님의 모습을 상고해 보면서, 그 분의 메시야 되심과 그 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 우리의 신앙고백을 확고히 하고, 또한 그 분의 순결하심과 겸손하심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죄와 사망 그리고 저주와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시며,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서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서 다시 오시는 우리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 주가 쓰시겠다 하라.

특별히 본문 3절의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용되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 나의 시간과 몸을 온전히 드리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귀새끼가 자신을 주님께 드렸을 때 주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가신 것입니다. 

또한 이것의 전제조건은 나귀새끼의 임자가 나귀를 타고 갈 수 있도록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중요한 삶의 수단일 수도 있는 나귀새끼였지만 즉각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가장 소중한 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무서운 이단은 세속적 휴머니즘, 즉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목숨도, 건강도, 인생도 모두 예수그리스도가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주권을 높여드릴 때 주께서 우리를 쓰십니다. 나귀새끼와 그 임자의 헌신도 귀합니다. 또한 본문 8절의 말씀처럼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편 무리들의 아름다운 헌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들은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우리도 쓰임 받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쓰임 받기를 애쓰면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장 최선의 것으로 헌신할 때 하나님을 그를 높여주십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주님이 주신 인생이 값지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