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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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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1-3)

: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세는 가나안이 건너다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백성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행할 일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장구하고 번성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핵심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쉐마라고 부릅니다. 이 쉐마를 기억하기 위하며 마음에 새기라고 하였습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또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렇게 이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오직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위해서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a)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그들을 제사장 나라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제사 드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것은 다른 나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b)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복 받게 하기 위한 통로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우월주의에 빠졌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주의에 빠졌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웃 나라 니느웨로 보내시는데 불순종하였습니다. 도망치려다가 바다에 던져지고 큰물고기 뱃속을 거쳐서 어쩔 수 없이 니느웨에 갔지만 여전히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제사장 나라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세상에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적 사명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로써 교회답게 되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그리스도인답게 되기 위하여, 지향할 것은 무엇입니까?
  

I. 지향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하여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오늘 말씀은 ‘버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버리다[ajpotivqhmi/아포티데미]’는 말은 ‘벗어 던지다’, ‘집어치우다’, ‘내려놓다’는 뜻입니다. 마치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기 위하여 벗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산 속에서 혼자 수도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들입니다. 이런 것은 한 마디로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들입니다. 이것을 버려야 합니다.

1.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세상의 수많은 인간관계 아래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버려야 할 것들로 지목하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첫 번째로 악독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악독[kakiva/카키아]’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은 욕망’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그 마음속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려면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부진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헤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칼을 품으면 그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찌른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찌르려는 칼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두 번째는 ‘기만[dovlo"/돌로스]’입니다. 기만은 다른 사람을 꾀어내어 속이는 것입니다. 교활함과 음흉한 꾀입니다. 이것 역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정당한 전략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경쟁사회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넘어뜨림으로 자신이 서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어리석은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참된 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버려야 할 세 번째는 ‘외식[uJpovkrisi"/휘포크리시스]’입니다. 외식은 본래 연극배우의 연기를 가리킵니다. 왕이 아닌 사람이 왕의 행세를 하는 것이 연극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을 단지 보여주기 꾸미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꾸미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속에 있는 마음을 함부로 내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관계를 깨뜨립니다. 어느 정도 꾸미는 것을 불가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꾸미는 일을 하다보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마음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정직하여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여야 합니다.

버려야 할 네 번째는 ‘시기[fqovno"/프흐도노스]’입니다. 시기는 다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업적을 부러워하는 것에서 지나쳐, 질투 또는 시샘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했다면 잘했다고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기는 자신의 뼈를 썩게 합니다. 속으로 시기하면서 그 사람과 편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날 모든 분쟁과 싸움의 원인은 시기에 있습니다.

버려야 할 다섯 번째는 ‘비방하는 말[katalaliav/카탈랄리아]’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무너뜨리는 것임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요즘 사회의 문제가 되는 인터넷의 ‘악플’은 마땅히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말을 듣고도 기분 좋아 할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쁜 마음을 품고(=악독),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기만), 겉으로 꾸미는 행동을 하고(=외식), 이것이 지나쳐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시기), 드디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나쁜 말을 지어내게(=비방)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심각하게 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하려는 것은 단지 자신이 사회적으로 칭찬 듣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제사장으로써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하여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버리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버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a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오늘 말씀이 ‘버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모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사모하다[ejpipoqevw/에피포데오]’는 말은 ‘동경하다’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다’, 즉 ‘갖기를 소원하다’, ‘갈망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사모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입니다. 갓난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젖은 아이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매우 쉽고 초보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리키는 것은 쉬운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관관계를 세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인간관계를 세우는 것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인간관계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순전[a[dolo"/아돌로스]’은 앞에서 나온 ‘기만’이라는 말에 ‘아니다’는 말을 붙여서 만든 말입니다. 순전은 기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순전은 기만의 반대말입니다. 기만이 속이는 것이기에 순전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전은 ‘순수한’, ‘성실한’이라는 뜻입니다. 기만이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라면 순전은 인간관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순수하고 성실한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속임이나 꾸미는 것이 없는 순수함이 인관관계를 깊게 합니다.

‘신령한’이라는 말 역시 인간관계를 세우는데 꼭 필요한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신령한’은 신비스럽고 영험이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신령[logikov"/로기코스]’은 ‘합리적인’ 또는 ‘논리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말이 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악독이나, 외식이나, 시기, 비방과 같은 말과 반대가 되는 말입니다. 깊은 인관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말을 하여야 합니다. 정말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은 ‘진리는 말씀’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쟁이들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살기 위하여 인관관계를 깨뜨리는 행동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좋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위하여 버릴 것을 버리고, 세우는 것을 사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버리고 관계를 세우는 것을 사모하여야 할 목적이 무엇입니까?
  

II. 목적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세워가는 것이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버리고 사모하여야 할 목적이 있습니다.

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2b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이유는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라다[aujxavnw/아욱사노]는 말은 ‘달이 차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눈썹같이 가느다란 초승달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점점 더 채워져서 마침내 둥그런 보름달이 됩니다. 그런데 초승달도 달이고 보름달도 달입니다. 초승달이라고 달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달이라면 정월 대보름달처럼, 팔월 추석 보름달처럼 꽉 채워져야 제 격입니다. 우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야 합니다. 

1.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기 위해서 입니다.

앞에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다른 사람과의 바른 관계라고 정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가 구원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가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음으로 자란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마술적인 신비가 있는 샘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버려야 할 것들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하나님과의 관계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다른 사람들과 형제자매입니다. 함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서로 형제자매로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제사장적 역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계속 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회복을 꿈꾸며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곧 바로 하늘나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남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 또는 ‘구원을 이루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좋다는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가 더 이상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잘못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로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버리고, 세우는 것을 사모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습니까?
  

III. 원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은 이미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맛보다[geuvomai/규오마이]’는 말은 ‘경험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자하심[crhstov"/크레스토스]’은 ‘친절한’, ‘유용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하심 즉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란다’는 것이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순종보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먼저였습니다. 우리의 노력보다 주님의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잉태가 있었기에 그 생명이 비로소 우리의 순종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또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기쁨을 맛보았기에 우리가 또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순례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여인의 고백이 있습니다.

“결혼 초부터 이유 없이 남편을 미워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관대하게 받아주던 남편도 지쳐서 요즈음에는 심한 다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나의 한도 끝도 없는 남편에 대한 불신이 아버지로부터 기인되었음을, 내가 남편과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맘속의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와 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없이 무능했고 난폭했던 아버지를 바라보며 세상 모든 남자에 대한 불만이 어려서부터 자리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 속에서 증오하던 아버지를 떠나보냅니다. 나에게 한없는 상처를 받았던 남편이 떠올랐습니다. 그저 미안합니다. 어서 남편에게 달려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 정태기박사는 용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오랜 시간 또는 세월에 걸쳐 가슴에 맺힌 부정적인 응어리가 풀리는 것을 의미하고, 그 자리에 용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정서와 인격이 자리 잡는 것을 의미한다.”고.

모든 관계의 회복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살았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어둠에서 건져내는 구원의 빛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갈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허덕거리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줄 때 풍성하여집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모든 악한 것들을 나에게서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세우는 순진함과 신실함으로 살기를 결심합니다.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여 사람 사이에서 완성되어 갑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고 그 인자함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삽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문을 열어야 합니다. 버리고 사모함으로 세상에서 더욱 풍성한 구원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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