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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등이 있습니까? (2) (딤후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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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있습니까? (2) (딤후 4:9-11)


I. 교회에도 갈등이 있는가?

우리 곁에서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정당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멀리 이사간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신앙의 자리를 떠난 낙심자들이 이 나라안에 이백만명이 넘는다 하니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교회들을 더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로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도바울만큼 위대한 인물은 예수님외에 그 누구도 찾아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으로 기독교 역사를 뒤바꿔 놓은 인물이 사도바울입니다. 바로 그 곁에서 신앙생활하던 사람 가운데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합니다. 이때는 사도바울의 말년입니다. 사도바울이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참으로 어려운 시점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데마가 사도바울 곁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리고 데마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무서운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나온 인물이 마가라는 인물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가를 가운데 두고 사도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마가가 갈등으로 인하여 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마가를 향하여 손을 뻗습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절) 

화해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갈등이 있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II. 갈등의 기원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에덴동산에는 갈등이란게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면 아담은 하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은 언제나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부간에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호랑이 사자들과 함께 놀 수 있었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되는 그런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갈등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그늘 밑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절)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아담은 자신의 잘못은 아내 때문이라고 핑계합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3) 나뭇잎사귀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나와 나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모든 갈등이 사람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자연끼리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 사람이 개입하면 파괴와 분쟁이 생기고 갈등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나였고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갈등없이 행복할 줄 알지만 거기에도 여전히 콤플렉스와 갈등이 있습니다. 멋진 직장에 들어가면 모든 행복을 보장해 줄 것 같지만 거기에도 갈등이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면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는데 부부 간에도 매일같이 갈등이 일어납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찾는 곳이 교회입니다. 인생의 무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에 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딜레마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누구나 처음 교회에 나오면 갈등이란 것을 모르지요. 교회생활 처음부터 갈등이 일어난다면 뭔가 잘못된 사람일 겁니다. 처음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다 천사와 같습니다. 누구나 반겨주고 용납해 줍니다. 그러나 신나던 교회생활이 변하여 갈등이 일어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지고 사역의 자리가 많아지면서 갈등도 많아질 수 있습니다.

이는 가정도 결혼생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누군가는 신혼 첫날부터 싸움을 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 심지어 요즘 젊은이들은 야외촬영을 하고서도 사진을 찾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게 신혼 때는 갈등이 많지 않습니다. 연애하는 두 청춘남녀는 서로 양보하고 서로 좋은 점만 생각하고 평생 꿈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인양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행복의 된장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 납니다. 웃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첫아이 낳고 나면 그 아이가 귀여워서 “어이구 둥게둥게 내사랑아 내새끼야 날 닮았네” 그럽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들이 속을 썩이기 시작하면 “꼭 속썩이는게 지애비 닮아가지고” 표현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근심 걱정끓는 소리가 집안에 가득해 집니다. 와장창 살림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 거지 - 건너마을 불 - “네 애비 잘 둔 덕”

사람이 사는 곳에는 갈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갈등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나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III. 갈등의 원인

왜 인간이 가는 곳에는 갈등이 일어납니까?
첫째, 인간 우리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마치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자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성자는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가 계십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병원입니다. 상처난 사람들이 모여서 치유받는 곳입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스펄젼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교회마다 왜 이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왜 이렇게 갈등이 많습니까? 문제없는 교회, 갈등없는 교회를 제게 소개시켜주십시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대답을 합니다. “형제여 이 땅에서 그런 교회를 만나게 되면 그런 교회를 내게도 소개를 해 주시오. 나도 그런 교회가서 목회하고 그런 교회가서 신앙생활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형제가 그런 교회를 발견하게 되면 나와 형제는 그 교회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아니됩니다. 나와 형제가 그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교회는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와 형제가 그 교회에 등록하는 순간 그 교회는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의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는 것은 교회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인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나 복음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인간의 부족함 때문에 바로 이런 갈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게 그 갈등이라는게 큰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시시한 것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부부생활도 그렇습니다. 부부가 살아가는데 거창한 문제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든가요? 저도 30여년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아주 거창하거나 중요한 문제, 삼위일체론, 인생론, 국가관의 차이 때문에 다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인간이 가는 곳마다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까?  


둘째,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강력한 동질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을 제외하고 나면 우리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얼굴모양이 얼마나 다릅니까? 이 교회안에 수 천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한사람도 얼굴모양이 같은 사람이 없어요. 지구상에 있는 70억 인구가운데 한 명도 같은 사람이 없어요. 얼마나 신묘막측합니까? 이 얼굴 평수가 크기는 합니까? 손바닥만한 얼굴에 재료가 몇가지나 됩니까? 송충이 같은 눈썹 두개, 검쩡 눈 두개, 콧구멍 두개, 귀 두개, 입 하나, 몇가지 안되는 재료가지고 하나님이 조화를 부립니다. 물론 사람마다 중앙 집중형이 있고 중앙 분산형이 있습니다만 그게 그거예요. 성격이 다릅니다. 배경이 다릅니다. 신앙생활했던 년조가 다릅니다. 학력이 다릅니다. 고향이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이 교회입니다.

다양성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양한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교회는 독창을 하는 곳이 아니고 합창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독주를 하는 곳이 아니고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곳입니다.

우리교인들이 영적인 많은 힘을 얻는 영성훈련장인 은혜의 동산에 가보면 “색깔이 다양해서 아름답다”고 하는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지금까지 나는 빨간색인데 내가 빨간색이기 때문에 너도 빨간색이어야 한다고 얼마나 가족들을 들볶았습니까? 내가 파란색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사람들이 모두다 파란색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하얀색이나 검정색은 잘못되었다고 틀렸다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서로 다르게 하나님이 만들어 준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생활에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으며 살아온 것입니까?  


셋째로, 이 땅의 교회가 끊임없이 사탄의 공격을 받기 때문에 교회안에는 언제든지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 사람들은 갈등을 겪다가도 술 한잔하고 담배 한대 피우면 끝장납니다. 그런데 교회안에서 예수믿는 사람들은 갈등이 시작되면 끝이나지 않습니다. 왜요? 그리스도인들의 갈등 뒤에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후에 나를 조종하고 내 형제, 내 자매를 조종하고 있는 사탄의 정체를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탄을 공격하는 대신 우리의 형제들을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서운 용이 나타납니다. 한 여인이 사내아이를 낳는데 이 여인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모릅니다. 이 용은 사탄입니다. 여기 사내아이는 메시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인은 교회를 말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탄이 교회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부정적이고 잘못된 이미지를 세상에 다 노출시켜서 구원얻는 사람들을 낙심시킬 것입니다. 택한 백성들을 지옥으로 끌고 내려가려고 몸부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십년하고 이십년하고 믿음 좋은 교회의 중진이 되다보면 갈등이 없을 것 같습니까? 저는 목사로서 솔직하게 여러분에게 고백합니다. 목사만큼 많은 갈등과 아픔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도 많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의 아픔이 목사의 아픔일 수 있습니다. 어떤 구역에서 갈등을 느끼고 어떤 성도가 문제 때문에 신음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의 신음과 모든 갈등이 목사의 아픔이요 신음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도 장로도 인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십니다. 

어떤 교회의 성도들과 장로들과 목사가 함께 천국에 올라갔더랍니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에수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날따라 천국에 오는 사람이 많아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동양에서 왔다고 그러니까 중국식당에 가서 기다리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평신도자리 장로자리 목사자리가 다르더래요. 평신도들이 앉아있는데 천국에서 중국음식이 기가막히게 나오더랍니다. 맛있는 요리는 다 나오더랍니다. 장로님들 기분이 좋았습니다. 평신도가 저 정도면 장로인 우리에게는 끝내주겠구나. 침을 흘리고 있는데 천사들이 와서 짜장면 보통을 한 그릇씩 갖다줍니다. 장로님들이 화가났습니다. 아니 우리가 교회에 봉사해도 저양반 만큼 못한게 뭐가 있느냐. 증인이 여기 계시는데 목사님 빨리 모시고 오라구. 목사님한테 한번 물어보자구 그랬더니 짜장면 들고 왔던 천사가 두리번 두리번 거리더니 “어! 니네 류목사 짜장면 배달갔다” 그러더랍니다.

교회중진이 되다보면 자칫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감사와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고 타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실망할 때마다 이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IV.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그러면 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어떻게 교회생활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갈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참으로 무서운 적은 갈등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교회생활에서 갈등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교회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고 
교회의 중요한 한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교회생활에 깊이 관여하지 아니하고 교회생활에 열심이 없는 사람들은 갈등도 있을 수 없습니다. 때로 점잖아 보이기도 하고 다른사람에게 나쁜 인상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생활이 깊어질수록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갈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내 신앙이 성숙해 가고 이 교회에 중요한 자리에 들어서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받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은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 생활임을 우리가 인정하고 살아야 됩니다. 갈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갈등은 우리의 신앙을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아픈만큼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감정화하지 마십시오. 

에베소서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엡4: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정은 사탄의 이용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문제가 아니고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입니다.  

며칠전에 부인은 저희교회 집사님인데 교회에 나오지 않는 남편이 아마 부부싸움을 하고 고자질을 해야되겠다 생각했던지 저를 만나자고 찾아왔습니다. 그분과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이분이 한마디 얘기하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 아닙니까?” 또 한마디하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 아닙니까?” 그리고 “남편을 좀 존중히 여겨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 아닙니까?” “나를 무시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 아닙니까?”  시종 내 머릿속에 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동물을 어떻게 하면 좋지?” 물론 여집사님께서 좀더 잘했으면 좋을뻔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모든 문제가 그분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 감정의 동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시종 그분을 쳐다보는 내 생각이었습니다.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감정대로 살아가면 실패합니다. 우리에게 느낌이 있지요. 부부간에 사랑도 느낌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그건 어린아이 사랑입니다. 결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인격이 있습니다. 감정을 초월하는 인격이 있고 신앙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감정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셋째, 모든 성도들은 나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집의 자녀들이 형제자매간에 토닥거리고 싸우지 않습니까? 엥~ 하고 울지요.그러나 저들은 감정화 하지 않습니다. 금방 형~ 하고 웃고 뛰어 다닙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집안과 조카 롯의 집안에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에 아브라함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우리는 한 친족이라”(창13:8) 너와 나는 한 집안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옆에 앉아있는 형제자매를 소홀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믿는 가족들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몇년 얼굴보고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주님의 품에서 살아가게 될 천국의 가족임을 기억하십시오.


넷째로, 타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사람들은 타협을 비굴하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협은 곧 배반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교회안에는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예수를 믿지 말라고 한다든지 신앙을 포기하라고 한다든지 바른진리 바른복음으로부터 벗어나라고 얘기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그들과 단절해야 될 것입니다. 투쟁하고 싸워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생활 속에서 인간관계의 갈등, 제도적인 갈등, 관습적인 갈등은 모두다 타협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입니다. 문제는 누가 양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 두 사람 중 누가 양보했습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아브라함의 말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크게 양보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모두다 함께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탄과의 싸움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 형제들과 갈등이나 지속하라고 하나님이 이 자리에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16절에 보면 교회생활의 갈등으로 인해 갈라졌던 바울과 마가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마가를 데리고 오너라. 하나님께서 저를 소중히 여기고 있노라.

때로는 내 감정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을 존귀하다 말씀하시니 나도 저들을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저가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하니 나도 저들을 유익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기분 내 감정대로 저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형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전도사시절 서울의 한 교회로부터 부름을 받고 한 4-5년동안 담임목회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일년동안 담임목사님이 두번이나 교회를 떠나는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제게 부여된 첫번째 임무는 바로 이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제 전공이 기독교 교육학이기 때문에 한사람씩 불러서 상담을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 상처가 치유되겠지 생각해서 한사람씩 불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까? 왜 이런 아픔이 있었습니까? 그랬더니 아물어졌던 상처가 다시 들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사탄과의 전쟁이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교회의 상처와 문제를 가져오는 것은 사탄이 가져다 주는 것이다. 나는 사탄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우리 전도하십시다.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총력전도하십시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단한 저의 기도는 적중했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아픔과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했고 교회는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모든 갈등을 긍정적으로 대처하십시오. 공격이 최선의 수비일 수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욱 열심히 전도하는 것입니다. 더 힘써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시험이 떠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갈등이 치료 될 줄로 믿습니다. 아픔이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꺼졌던 성령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할 줄 믿습니다. 


V. 말씀을 맺으며

이제 한국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그 이미지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일에 온갖 힘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의 몸된 교회를 부흥시키고 이 부흥의 불길을 통하여 이 도시를 구원하고 이 민족을 구원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뒤로 물러간 사람은 망하게끔 되어있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양한 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파가 다릅니다. 신앙생활했던 삶의 여정이 다릅니다. 우리모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있습니다. 만약에 서로 자기자신을 노출하기 시작하고 각자 이기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우리교회는 분열을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양한 경험들이 예수의 사랑안에 녹아지게 될 때에 이 땅의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모아지게 될 때에 이 도시의 상처를 우리가 치유하는 역사를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한국교회의 책임을 우리교회가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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