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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루에 서리라 (합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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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루에 서리라 (합 2:1-3)

중세 시대에 이탈리아 밀라노 한 예배당에 중년여인이 기도하러 들어왔습니다. 그 중년부인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통곡을 합니다. 잠시가 아니라 30분이 지나도 통곡 소리는 멎지 않았습니다. 한 사제가 이를 보고 있다가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부인, 아주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봅니다.” 부인은 
“감독님, 내 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다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제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말을 그 부인에게 전하게 됩니다.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기도하는 자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 밀라노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부인은 바로 나중에 성자가 된 어거스틴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망하지 않도록 하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기독교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자식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가정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면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잘못된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지키는 믿음의 기둥, 나라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박국 시대에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타락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부패했습니다. 사회에는 죄악이 만연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으면서도,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인지, 악을 행하는 것인지 분별조차 하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 특별히 법을 집행하는 재판관들까지도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가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문제는 항상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썩으면 교회가 썩습니다. 교회가 썩게 되면 가정들이 다 썩게 되고 사회가 썩고 나라가 썩습니다. 그 다음 나라가 무너집니다. 모든 것이 다 교회에 달려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지도자들에게 많이 좌우됩니다. 

이에 하박국은 “하나님, 이 백성은 하나님 백성들이 아닙니까? 이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까? 거룩해야할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거룩해야할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한탄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알았다. 내가 바벨론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치겠다.’ 라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악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겠다고 말씀하시는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어떻게 바벨론을 부흥시키시고 강하게 하시고, 어떻게 그런 바벨론을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한참을 기도하자 하박국 속에 무언가 확신이 들어옵니다. 깨달음이 생깁니다. 이스라엘을 치기는 하지만 망하게는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악한 바벨론은 잠시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동안 그때까지만 강하게 하고 그때 까지만 부흥하게 하겠다! 즉 바벨론은 잠시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면 이런 깨달음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면 무언가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박국에게 여전히 강한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겠지만 이스라엘 고통이 너무 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못 하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잘못 한 것도 많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힘들게 하실 수 있는가, 나 때문에 내 가족들이, 내 식솔들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항상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작게 보고 내가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항상 불평불만을 가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이 너무 심하고 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옆을 보니 잘 되어서는 안 될 악한 바벨론이 잘되어도 너무 잘되고 강해도 너무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하다면 잠시만 하시면 될 텐데 왜 저 민족을 저렇게 잘되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하박국을 통해서 오고 오는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이 따라야하고 배워야할 중요한 모본을 가르치십니다. 기도 후에는 반드시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했으니 이제 답을 주셔야한다고 하나님을 재촉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왜 답을 주시지 않는가? 이제는 답을 주셔야 하는데 답을 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내가 기도했다고 금방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을 주시고, 내가 이렇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내가 바라는 대로 응답하시는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방식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에게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너무 답답하고 원통한 일이 있을 때 어떤 과정을 가져야하는지 확인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너무 답답하고 힘들고 억울할 때가 많습니다. 도저히 하나님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이 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내 나름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지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구약의 시대 친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생각해야지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있지 성경에 대해서 공부도 하지 아니하고 연구도 아니 하고 성경도 읽지 아니하고 그저 내 생각대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미신이라고 하고 샤머니즘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이름, 예수님 이름을 앞에 갖다 붙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첫 번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묵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고뇌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야합니다. 일이 일어났다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이들처럼 매달릴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실까? 깊이 생각해볼 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마6:28) 참새들도 다 먹이는데 왜 그것을 염려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슴이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6: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아파트 주변을 다녀보면 꽃들이 아주 예쁩니다. 여름 꽃, 겨울 꽃과 가을꽃은 좀 다릅니다. 보라색으로 변하고 노란색으로 변하고 특별히 산 높은 곳에 올라가면 노란 색 꽃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꽃잎 뒤가 보일 것처럼 투명합니다. 아파트 화단 사이사이에 장미가 어떻게 그렇게 예쁜지 모릅니다. 

이것을 보면서 한 번 생각해보시고, 들의 잡초 속에 피어있는 꽃을 보면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TV에 나오는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조화되어서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돌아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연 미생물에 대해서까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생각하고 묵상하고 필요할 때는 고뇌도 해야 합니다. 이 나라가 왜 이런가, 우리 가정은 왜 이런가, 내 인생은 왜 이런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저 하나님께 혼자 이야기하고 그대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좀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기도입니다. 어떤 형태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너무 속이 상하면 항의를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해보십시오. 문제는 이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하다보니 하나님께 이야기할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무슨 말을 해도 좋습니다. 뭐든지 좋습니다.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그 다음에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이 그러했습니다. 본문 1절에서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질문했을 때 금방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도 엄마도 생각해보아야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로봇 다루듯이 하시지 않습니다. 물건 다루듯이 하시지 않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십니다. 하나님께도 시간을 드려야합니다. 

본문 1절에는 ‘성루’라는 말이 나오는데 ‘성루’라는 말은 높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있던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서는 이것입니다. 하박국이 성루에 서겠다고 했는데, 이제부터 나는 지금까지 내가 뚫어지도록 쳐다보던 그 문제를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말입니다. 

나는 나의 현재의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겠다, 나는 떨어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들고 있던 그 문제를 내 손에서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끊임없이 쳐다보던 그 문제, 그 사람, 그 일을 그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들고 있던 그 문제를 어떻게 하며 내 눈은 무엇을 쳐다보아야합니까? 내가 들고 있던 문제, 일, 사람, 그 사람이 자식이든지 누구든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저는 자주 그렇게 합니다. 저한테는 바구니가 몇 개 있습니다. 

어떤 것은 큰 바구니에 담아 예배당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받으세요. 이제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떤 것은 조그마한 바구니에 담아 하나님께 가져다드립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쳐다보고 일을 쳐다보고 문제를 쳐다보는 그 눈 대신에 하나님을 쳐다보는 눈 이것이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쳐다보아야합니다. 이렇게 살면 너무 좋습니다. 인생 살면서 이런 원리를 배워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큰 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신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간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좀 해결해주십시오. 이제부터는 이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아주 잘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을 쳐다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 문제를 다시 내 손으로 움켜잡습니다. 하나님을 쳐다보던 그 눈은 하나님께 맡겼다고 말한 그 문제, 그 일, 그 사람을 다시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기도할 때, 예배당에 있을 때와 우리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모습을 가진 그야말로 무늬만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챙기려고 하시는데 어느 틈에 그 일, 문제를 내가 다시 빼앗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좀 보시려고 하시지만 하나님께 맡겼던 그 사람이 빼앗아갔으니 하나님이 손볼 사람도 없고 손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실패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아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신앙이 아닌 신앙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맡기려면 정말로 맡겨야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후 ‘하나님, 이제는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붙들고 있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보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라는 선언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선언해보십시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내가 만약 진실한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면 그걸 해결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만 손해입니다. 이런 자신감, 당당함도 있어야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너무 너무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십니다. 처음에는 그 정도는 네가 해야지 하시다가, 우리가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공이 하나님께 왔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축구할 때 미드필드는 특별한 경우에는 조금 더 나갈 수 있겠지만 정말로 역할을 잘 하는 미드필더는 미드필더 역할까지만 하고 공은 공을 넣을 수 있도록 골 게터에게 주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살아갈 때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복잡합니까? 옛날에 능숙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이젠 이전처럼 살아가다간 그렇게 쉽게 해쳐나갈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하고 험한 세상을 아주 멋진 모습으로 승리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신비로운 하나님의 방법을 얻어야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옛날 세상도, 지금 세상도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 인생의 주인, 역사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그 순간부터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부터는 누구와 상담하지 마십시오. 만약 상담하려면 일치감치 상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기고 난 후에는 일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문제가 이것입니다. 맡겼다고 하면서도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사람과 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려고 하시는데 일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목사를 찾아와서 상담해도 안 됩니다. 미리 미리 상담을 하고 전적으로 다 맡기고 난 후에는 고요하고 잠잠하게 하나님을 쳐다보아야합니다. 하박국이 올라간 성루에 올라가야합니다. 

한 번 올라가보십시오. 나름대로 여러분의 성루를 만들어놓으십시오. 식탁에 앉든지 차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든지 성루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그때부터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다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이 결과는 대단합니다. 먼저 이렇게 하면 참 평안합니다.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평안을 얻는 방법은 마술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간혹 최면술을 통해서 평안을 얻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돌아가면 원래 그대로입니다. 현실 속에서 이런 신앙 자세를 통해서 평안을 얻으세요. 하나님께 다 맡겼으니 내가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쳐다보세요. 

기독교인의 평안에 대해서 아주 잘 말씀하신 것이 빌립보서에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우리 마음속에, 우리 생각 속에 하나님 평강이 가득해서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된다고 합니까? 

여기에 대한 답이 그 앞 6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함이란 말 속에 전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전부 다 믿고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믿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그렇게 하자 평안에 더하여 더 좋은 답을 얻습니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대답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기도했을 때에도 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답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하박국 마음속의 확신과 깨달음으로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는 도구로만 사용하실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렇게 기다리자 하나님께서 친히 대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장 첫머리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합2:2) 라고 직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직접적인 대답을 받았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도 아무리 힘든 일,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 답답한 일, 이해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 하박국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시고 친히 직접적으로 하신 대답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답도 얻을 수 있어야합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얻는 믿음, 이런 복을 받아야합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평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고, 성경을 읽으면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끔씩 하나님께서 번쩍 하는 영감을 주십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대답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때로는 묵상을 합니다. 걸어가면서, 앉아서도, 운전하면서도, 사무실에서도 묵상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이런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기다릴 때 맥 놓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눈은, 마음은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쳐다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 예민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대답하실지 모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합2:1절) 라는 말씀입니다. 파수하는 곳이 무엇입니까? 적들이 쳐들어오는지 보는 곳인데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에서 누구를 기다리며 누구를 쳐다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민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는 기도할 테니 사환을 보내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무슨 싸인을 보내주시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까지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께 예민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하나님께 집중해야합니다. 집중하려면 세상에 대해서는 둔감해야합니다. 세상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세상에도 집중하고 하나님에게도 집중하고, 그것은 되지 않습니다. 바보처럼 세상에서는 눈을 돌리고 하나님만 쳐다보십시오. 사람을 볼 필요 없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해칠까 두려울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는 한 여러분을 넘어뜨리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을 천사와 천군을 통해서 지켜주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교통하고 평안함을 받았을 때 하셔야할 일이 있습니다. 다 받아 누렸는데 나만 혼자 누리고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나만 복을 누리고 나만 좋은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나누어야합니다. 

2절에서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 나에게 이런 복을 주셨다, 이런 응답을 하셨다고 알려야 합니다. 살짝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증거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라고 탄식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구원을 얻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응답을 받았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길을 찾았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알려야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말해야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 기도는 이것까지 이르렀을 때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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