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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2) (합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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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2) (합 1:12-17)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두 형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이 두 형제의 삶의 결과는 하늘과 땅같이 달랐습니다. 형은 평생을 노숙인 신세를 면치 못하는 삶을 살고 있고, 형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동생은 박사학위를 받고 유명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노숙자로 사는 형에게 어떻게 해서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형이 대답합니다. “집에 20년 넘게 벽에 걸린 액자가 있는데, 그 액자의 글이 ‘Dream is nowhere’ 라는 글입니다. 나는 그 액자를 보며 액자의 글 그대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꿈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동생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그런 성취를 이루었습니까? 집에 있는 그 액자를 보았습니까?” 동생이 대답합니다. “저도 그 액자를 보았습니다. 환경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 액자의 글이 나를 좌절하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액자의 글을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글을 볼 때 띄어쓰기를 달리해서 보았습니다. ‘nowhere’의 가운데를 띄어 쓰면 ‘now here’ 가 됩니다. 그러면 말의 뜻이 달라져 ‘꿈은 지금 여기에’ 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그 말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접근 방식이 달랐습니다. 같은 환경, 같은 일, 같은 사건을 두고도 접근 방식이 어떤가에 따라 인생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때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왜 이런 일이 세상에 있고,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있는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면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접근 방식의 문제입니다. 접근 방식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아주 소중한 뜻, 좋은 계획을 뻔히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적인 시각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시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신자도 물론 세상적인 시각, 세상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최소한 세상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며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가? 나라 경제 현 상황은 어떤가? 등 알 것은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적인 시각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우주적인 일이든 국제적인 일이든 나라일이든 가정적인 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그 사건들이 보여주는 영적인 의미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일, 궂은 일, 행복한 일, 불행한 일, 비극적인 일, 분통터지는 일, 하늘이 무너지는 일, 어떤 일이든 다 당신의 뜻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질문을 가졌을 때 자기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답을 듣기 원합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아이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은 공부는 하기 싫고 답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전체를 읽거나 문제를 연구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해답을 먼저 구합니다. 

요즘에는 어머니들도 이처럼 해답만 구하려고 하니 자녀들에게 자꾸 어려운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책 전체를 읽어야지 답 이외의, 답을 뛰어넘어 더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자꾸 답만 얻으려고 하다 보니 인생이 재미없고 세상이 재미없고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간혹 법정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법정은 아직 좀 덜한 것 같지만 미국 법정을 보면 검사 혹은 변호사가 증인을 심문함에 있어서 검사는 검사대로, 변호사는 변호사대로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증인을 매몰차게 심문합니다. 증인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워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싶은데 검사나 변호사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자꾸 몰아붙이고 다그칩니다. 

예를 들어서 “말 길게 하지 마시고 내가 묻는 말에 ‘예’, ‘아니오.’ 라고 둘 중 하나로 대답하시오.” 라고 말합니다. 이때 증인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거나 또 어떤 일은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하는데 검사나 변호사는 자꾸 말을 자르고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몰려서 증인이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일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때 마치 ‘예’, ‘아니오.’ 등, 직설적인 대답을 원합니다. 내가 묻는 대로 답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졸라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는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증인들은 힘이 없고 잘 알지 못하고 지식이 없기 때문에 몰려서 이렇게 저렇게 대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몰리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간절하게 요청해도, 강하게 떼를 써도 혹은 우리 인간들이 마치 하나님을 윽박지르는 것 같은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꼼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요구한다고, 밀어붙인다고 당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과 다릅니다. 우리 생각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방식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대답 방식은 어떤 것인지 알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박국서는 여기에 대해서 아주 좋은 답을 보여주십니다. 하박국 시대에 하박국이 직면했던 문제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많았습니다. 답답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먼저 국내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나라 전체가 하나님 백성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렇게 이끌고 가시는지 궁금했습니다. 1장 2절에서 나라에 강포가 가득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라에 악한 일들이 가득 했습니다. 

3절에는 나라에 죄악이 가득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온통 죄입니다. 경찰력, 검찰력, 공권력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또 ‘겁탈과 강포가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저기서 싸우는 소리가 많습니다. 얼마나 싸우든지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4절에서는 ‘율법이 해이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계도 그랬습니다. 교회도 그렇고 하나님의 종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서 의인은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국내사정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믿는 사람들, 기독교라고, 기독교 교회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를 왜 그 모양 그대로 내버려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서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할 나라에 당하면 좋을 텐데 이스라엘보다도 훨씬 더 악한 바벨론에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하박국이 하나님께 제대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받아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살아가면서 혹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답을 받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이 정말로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치는 나라, 하나님의 징계 도구가 바벨론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악했습니다. 망해도 훨씬 더 먼저 망할 나라였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접근하는데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출발기점으로 삼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첫 번째,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12절에서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입니다. ‘거룩’을 생각할 때 가장 쉽게 생각하실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실패하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을 같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방식, 대답하는 방식,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운영하는 방식을 우리 인간들이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실패가 많고 실망이 많고 때로는 좌절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른 하나님입니다. 

두 번째 12절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 하시니이까’ 입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맨 처음부터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것이다. 즉 역사와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믿는 사람들의 세상뿐만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세상, 동양, 서양, 아프리카까지 모든 세상의 주인이시다, 우주까지도 주인이시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못하실 일이 없으시고 모르는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세 번째는 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악이 있는 것,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는 것, 흉학한 일, 잔인한 일, 이 땅에 비참한 일이 일어나는 것, 부정한 일들을 그냥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출발합니다. 우리들에게 항상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부디 내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내 경험을 통해서, 내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알아야합니다. 하박국은 여기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고뇌입니다. 고뇌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이전보다 고뇌가 훨씬 더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쉬운 것만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편한 것만 찾습니다. 수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애쓰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노력도,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저 이 부탁이나 들어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미신에다 하나님이란 이름만 갖다 붙였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고뇌가 없습니다.

하박국이 본문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까닭은 깊은 고뇌를 했기 때문입니다. 많이 생각했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고뇌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너무도 분명하게 바벨론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악한 나라이고, 더 빨리 망해도 되는 나라이고, 당해도 이스라엘보다 더 비참하게 되어야하는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아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가?’ 하나님께 말하기 전에 고민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야단을 맞으면 불평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애를 많이 먹습니다. 형제간에 싸웠을 때 어머니가 둘 다 야단치는데, 이때 ‘꼭 왜 나를 더 야단치는가?’ 혹은 ‘나는 잘못이 없는데 왜 나도 야단치는가?’ 라고 말합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복 받을 삶을 안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인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악하고 나보다 더 복 받지 못할 사람 같은데 회사도 잘되고 일도 잘되고 건강한 것을 보면서 그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복 받지 못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왜 복을 받습니까? 저 사람이 복을 받는다면 내가 더 받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저 사람이 받는 복만큼 받아야하지 않습니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깊으심을 알지 못하고 인생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실수할 수 있고, 회사 회장님, 사장님도 실수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평이 많고 원망이 많고 말이 많고 얼굴이 늘 무겁습니다. 

하박국이 그랬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정의의 하나님이신 우리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지 고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말하기 전에 고뇌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의 고뇌는, 더 나아가 그렇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는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가? 라는 깊은 고뇌를 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여러분, 고뇌하십시오. 정말로 고뇌해야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고뇌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고뇌하지 아니하면 이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뇌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교회가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인 목사가, 장로가 고뇌하지 아니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소망이 없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고뇌하지 않고 인기만 얻으려고 하면 그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십시오.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중요한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내 이름만 알리고 내 명예만 알리고 좋은 직분을 차지하려고 하다 보니 고뇌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하박국은 그 깊은 고뇌 후에 드디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박국이 얼마나 거세게 질문합니까? 그것이 질문입니까? 항의입니다. 하나님께 대들고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라는 말을 하면 우리는 늘 하박국을 생각합니다. 아주 거세게 하나님께 질문하고 항의합니다. 이런 것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꼭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 항의, 이 질문, 이렇게 대드는 것을 누구에게 할 것인가?’ 입니다. 절대로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하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절대로 사람에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말하면 속이 시원합니다. 상대방이 맞장구까지 치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말하면 말하는 그때는 시원하지만 나중에는 허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답답해지고 더 무거워지고 심지어는 없던 상처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말, 이런 질문, 이런 항의는 반드시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는 하박국의 자세는 좀 지나칠 감이 있을 정도로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좋습니다. 단 하나만 분명하게 하면 됩니다.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고 말해야 하는 것, 이것은 꼭 주의해야합니다. 

하나님께 말하면 처음에는 많이 답답합니다. 속이 더 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응을 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반응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만 그렇습니다. 겉만 그렇습니다.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도하기 전에 이미 반응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만 좀 답답하지 시간이 좀 지나게 되면, 기도를 더 하게 되면, 하나님과 더 소통하게 되면 점점 더 시원해집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깊어지고 하나님께 말을 더 오래 많이 하다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환해지고 그 다음 드디어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하박국은 처음에는 그렇게 답답했지만 기도하자 일단의 답을 먼저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12절) 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런 확신은 우리가 확신을 갖는다고 다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오래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소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틀림없이 내 자식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내 남편이 경영하는 회사는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식은, 저 회사는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소망만 갖고 욕심만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오래 깊이 기도할 때 그럴 때 답을 받습니다.

헛된 것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 붙들고, 잠 안 자고 밥 안 먹고 기도하면 응답하실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그릇이 되고 가치가 되는 사람에게 응답을 주시는 것이지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충분히 소통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이런 답을 주시고 저런 선물을 주십니다. 깊은 고뇌 뒤에 하나님과 깊은 대화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선물을 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아내 되시는 여러분, 남편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런 확신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보셨습니까? 어머니 되신 여러분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런 확신을 주실 때까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보셨습니까? 살짝 기도하는 척하고 하나님께서 답을 주시지 않는다고 혹은 이미 나에게 답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실망하고 속상하게 되는 일들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깊이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 하박국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응답은 바벨론에 대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아무리 저렇게 해보아야 잠시라는 대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잘못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잠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저 나라를 잘 되게 하고, 잘 풀리게 할 뿐이지, 저 바벨론은 절대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받게 됩니다.

12절 하반부를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도구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답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답답하던 가슴이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기도에서 나옵니다. 잠시 그냥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만 하나님께 쏘아붙이고 일어서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릴 말씀 다 드리고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는 사람, 하나님과 깊은 소통,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시고 내가 하나님 속에 들어가는 기도가 있을 때 이런 은혜가 옵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당부 드립니다. 기도하십시오. 혹 답답한 일이 있을 때 더 기도하시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더 기도하시고 가슴 아픈 일이 있을 때 더 기도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기억하십시다. ‘기도 외는 방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다시 보면 기도에는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 길은 기도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에는 길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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