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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자들의 외침 (계 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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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외침 (계 6:9-11)
  

순교라는 말을 아는가? 영어로 martyr 인데, 그 어원은 헬라어 말투스에서 왔다. 행22:1~8에 ‘증인이 되리라.’는 말이 martyr란 말이다. 순교란 자신의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인데 성령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순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라도 염창교회, 야월리교회를 다녀오면서 돌멩이를 목에 걸고 뒷짐지어 묶인 채 물에 밀어넣어 순교를 당한 100여 명 이상의 순교 이야기를 목격했다. 제암리교회는 일제 시대에 저질러진 사건이라면 이 순교 사건은 6.25 당시 이루어진 사건이다. 한국 땅에 순교자가 이렇게 되는 줄 몰랐을 것이다. 

감신대 출판부에서 발행한 「6.25와 감리교회 순교자」를 보면 136명의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우리는 이 땅에 재앙이 왜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도 갖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신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이렇게 피 흘리게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계6:9 이하를 보면 순교자가 더 많아질 수 있다. 아직도 순교자의 수가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6:9은 다섯 째 인을 떼실 대에 본 이야기이다. 요한이 본 것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음을 보았다. 또 “큰 소리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본 장면은 네 가지 기마자들의 연속되는 이야기와 전혀 다른 장면이다. 

계6:12에 나오는 여섯 째 인을 떼실 대에 일어나는 재앙의 이야기하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순교자의 이야기를 빼면 첫째 인부터 여섯 째 인까지는 연속성 있는 재앙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전혀 다른 이야기가 여기 다섯 째 인을 뗄 때 나타나는가?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같으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재앙의 날이 될 때 순교자가 더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검과 흉년, 사망과 땅의 짐승, 즉 전쟁과 기근, 사망과 적 그리스도의 권세가 죽임으로써 나타날 때,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몇 가지 질문이 생긴다.

1. 순교자들은 왜 죽게 되었는가? (계6:9)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생명을 주는 말씀이고 소망을 주는 말씀이다. 그리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핍박과 억울함을 당하고 순교하는 것이다. 

마24:9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미움이 증오가 되어 목숨을 빼앗는데 까지 이른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도 계1:9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순교자의 영혼을 보고 있는 요한 자신도 똑같은 이유로 밧모 섬에 귀향 가서 갇힌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박해가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산다고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도 이상히 여겨서는 안된다. 지금 이 세상은 주님께 속하지 않았다. 사탄에 속한 세상은 하나님을 모독한다.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를 그냥 두고자 하겠는가? 선한 일을 해놓고도 미움을 받는다. 사람 살리는 일을 해놓고도 미움을 받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목숨을 버린 순교자가 되지 못했어도 신앙이란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고 빼앗기고 홀대 받고 손해를 본다. 우리는 아무나 순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생활의 순교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전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외친 바울처럼 말씀 때문에, 예수님 증거 때문에 양보하고 왕따가 되는 순교를 반복해야 한다. 예수쟁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우리가 생활의 순교를 웃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상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의 천국을 믿으라.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천국을 안내하는 것이다. 하늘을 믿고 하늘의 상을 믿어야 웃을 수 있다. 빼앗기면서도 웃을 수 있고 순교를 영광 중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순교자의 믿음이 생긴다.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구호가 아니고 우리의 영성이어야 한다.

2. 순교 당한 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계6:9下)

계6:9下을 보니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순교자들의 영혼이 하늘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 보좌 아래 있다는 위치적 장소를 특별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사라졌다. 로마의 티도 장군에 의해 주후 70년에 불타버렸다. 주후 90~100년경에 쓰여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제단은 지상 제단이 아니라 사실 땅에 있는 성전에 관계되는 것들은 모두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다. (히8:5) 제단에 드려지는 것은 제물인데 하늘의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받으신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엔 주 예수님이 제물로 드려졌다. 

그리고 주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서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다. (계5:6) 그런데 제단 아래 순교 당한 영혼이 있으니 그 영혼은 얼마나 빛나는 영혼인가? 그리스도 바로 곁, 최고의 상좌에 위치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순교자의 영혼은 거룩으로 빛난다. 순교자의 영혼은 귀하고 귀하다. 

행7:54~60에 나오는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라. 스데반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스데반의 순교를 일어서서 보고 계신다. 그 영광의 순교를 하는 스데반은 이 열린 하늘의 장면을 보면서 잠들었다. 돌로 맞고 옷을 빼앗겼으나 스데반은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잠이 든다. 순교의 고통이 평온한 잠이 되었다. 순교자의 위치는 특별하다. 제단 아래 머물러 있다. 얼마나 큰 영광인가? 순교 신앙 없음이 부끄럽다. 죽는 것을 두려워함이 부끄럽다.

3. 순교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계6:10)

계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순교자들은 제단 아래서 외치고 있다. “신원하여 주소서”

신원이란 무엇인가? 가씀에 맺힌 한이다. 자신들을 죽이고 박해한 이들을 심판하는 것이 어느 때인가? 왜 신원하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내가 고통 받고 흘린 피의 희생을 갚아 달라는 절규인 것 같다. 마치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의 되갚음의 웅변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보복 감정이라기보다 정의가 세워지지 않은 것, 이대로 죽인 자는 활보하고 죽임 당한 자의 신원은 묻히고 만다면 하나님의 의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순교자들은 핏소리를 내고 있으나 공의가 세워지기를 절규하고 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신다. 왜 공의를 세우지 않는가? 공의를 세워달라는 부르짖음이다. 

4. 순교자들이 받은 응답은 무엇인가? (계6:11)

① 하나님이 위로를 주셨다. 

계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유대인에게 흰 옷의 의미는 축복과 순결이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나타낸다. 검은 옷은 하층민 남자와 여자에게 입혔다. 따라서 흰 옷, 흰 두루마리는 순교자의 위치가 높다는 것이다. 순교자는 축복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절규하는 순교자에게 하나님은 위로로 답하신다. 

② 잠시 쉬도록 하였다.

계6:11中 “잠시 동안 쉬되” 하였으니 이 쉬는 기간은 부활과 재림 때까지를 말한다. 재림할 때 왕노릇 한다. 그 왕노릇 하는 이야기가 계20:4에 나온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 당한 자들의 영혼들, 즉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니...” 왕노릇 할 때까지 쉬고 신원을 풀어주는 일은 멈춰있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의 수,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쉬어야 한다. 순교자의 수,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수다. 아직도 순교의 피를 흘릴 일이 있다는 것은 선교의 무장을 다시 하게 한다. 

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 순교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더 많아야 한다. 우리는 부끄럽다. 그리스도인다운 용사의 모습이 없었다. 뭐 한 가지라도 잃어버릴까봐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명예를 잃어버리고 반장 선거에 떨어지고 취직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나를 위해 죽음을 향해 걸어가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불리워지는 것이 영광이다. 마10:39에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였다. 하늘 나라의 법칙은 잃음으로써 얻는 것이다. 잃음으로써 얻는 것, 돈을 잃음으로 천국을 얻는다. 미모를 잃음으로써 믿음을 얻는다. 건강을 잃음으로써 생명의 소중함을 얻는다.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는다. 잃는다고 망하는 것이 아니다. 

순교 신앙을 갖자. 초대교회는 280년간 무서운 박해의 시대를 겪었다.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그 시련이 지나고 325년에 사도신경을 제정한 니케야 회의가 열렸다. 이 때 대표로 참석한 318명 가운데 306명은 손발이 잘려나갔거나 앞을 보지 못하는 불구자였다. 그들은 목숨을 바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아니지만 모진 시련과 고통을 견디며 믿음을 지켜낸 살아있는 순교자들이었다. 

이 시대 순교 신앙이 요구된다. 헌금도, 전도도, 기도도 순교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종말의 때, 재앙의 때에 더욱 유혹과 미혹을 이겨내는 믿음의 용사들이 요구된다. 나를 무장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다. 장래의 호기심 때문에 오늘 견고하게 자기를 세우지 않는 것은 무절제이다. 장차 될 일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순교자의 수를 채우기까지 라는 종말의 지연 이유도 알아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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