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중보기도의 모범 (창 18:22-33)

첨부 1


중보기도의 모범 (창 18:22-33)


영적 어둠의 시대인 중세시대에도 영적인 빛을 발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에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끌레르보’의 버나드라는 사람입니다.

이 분의 가르침 가운데 큰 영적 울림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소위 ‘사랑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1 단계/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아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랑의 2 단계/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제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3단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드디어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직 주의 일에 전념하려고 합니다. 이제야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4 단계/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더욱 영적으로 성숙해 지면서 이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자신이란 나와 너 사이에서 발견되는 자신입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발견되는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비로소 너를 사랑하고 나아가 우리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 버나드의 사랑의 단계를 다시 정리해 보면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자신만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나아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점점 성숙해 지고 그 폭이 넓어집니다. 우선 나 자신만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나만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모습은 기도 안에서도 그대로 발견됩니다. 우선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는 전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간구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가 첨가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주의 일을 위한 기도가 더해집니다.

그리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이제 비로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직접 나와 깊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시고 그를 위해 기도할 마음을 주셔서 그를 위해 자신의 문제 이상으로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중보기도의 단계입니다.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깊은 자리에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이 중보기도는 신앙인의 아주 소중한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중보기도가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보기도의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중보기도를 구체적으로 실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중보기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엄청난 영적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이야기입니다.

창 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거느리시고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 사건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는 내년 이맘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놀랍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듣고서 보인 반응이 22-23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서서 중보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처음 나타나는 중보기도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때 와서 비로소 중보기도 다운 중보기도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첫 중보기도는 중보기도의 핵심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중보기도의 모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드린 기도

롯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첫 조카였고, 그 집안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란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롯은 아직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에게는 조카가 아니라 자식이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갑니다. 이 때 롯도 아브라함을 따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함께 길을 따라 나서는 롯을 보고 아브라함은 한편 고맙기도 했을 것이고, 또 한편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롯도 성인이 돼서 나름대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각자가 재산이 많아지자 두 사람의 하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분가를 하게 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가고 싶은 지역을 먼저 택하라고 하며 양보합니다. 이제 분가해서 독립하는 롯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가한 지 얼마 안돼서 아브라함은 롯에 대한 다급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롯이 사는 땅에 전쟁이 일어났고, 롯이 포로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다급하게 훈련된 사람들 318명을 이끌고 추격합니다. 결국 롯과 그 가족을 다 구출했고, 빼앗겼던 재산까지 다 되찾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하나님께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중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롯을 사랑하기에 롯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요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가 33세 까지는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표면적인 계기는 고향 친구 ‘폰치아노’와의 만남입니다. 폰치아노는 어거스틴에게 성 안토니의 거룩한 수도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하는데, 낮은 목소리로 ‘책을 가져다 읽어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펴보니 롬 13:13-14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그가 깨어졌고 통회 자복하며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근원적인 계기는 바로 어머니 모니카의 중보기도 때문이었습니다. 33년간 눈물로 아들 어거스틴이 돌아오기를 기도한 어머니의 중보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모니카의 이런 33년간의 끈질긴 기도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어머니의 사랑 때문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뜨거운 모정이 위대한 중보기도를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중보기도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의무감으로 하는 중보기도는 형식적으로 몇 차례 하고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하는 중보기도는 응답 받을 때까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보기도는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전에 사랑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사랑부터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드린 기도

본문을 보면 롯은 이렇게 중보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이 기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심판하시고 구원하심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고자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할 수밖에 없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멸망 당할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 있는 의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음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이런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정면에 ‘구원의 손’이란 부조 작품을 달았습니다. 위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주님의 손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구원이 필요한 연약한 인간의 손이 땅에서부터 간절한 바람 속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이 모습을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 시 42:6 말씀의 일부를 옛 한글성경 글자체 그대로 적어놓았습니다. “네 손을 잡아주리라” 이 말씀을 적어 놓은 것은 우리의 구원은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우리의 강한 믿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잡을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중보기도는 이런 믿음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 27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겸손하게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 11:8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속마음에 담긴 긍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강렬한 진노 그 속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불붙는 긍휼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긍휼을 믿고 하박국 선지자는 합 3:2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 대상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또한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실함으로 드린 기도

본문을 보면 기도의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선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혹시 오십 명이 되지 않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가 됐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45명일 때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부족해서 40명일 때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수가 30명일 때, 20명일 때, 급기야 10명일 때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기도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기도에 나타난 성실함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던 두 신자가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글쎄, 한 번 목사님께 여쭤보세”
한 사람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목사님이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담배를 피우는 중에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목사님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칫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답이 달랐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질문은 다른 사건입니다. 기도를 하다가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다가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보기도의 두 가지 중요한 자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는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중보기도는 해야겠다고 마음만 먹고 끝나면 안 됩니다. 기도의 골방으로 가서 구체적으로 입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아무개를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를 시작했으면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큰 마음 먹고 중보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흐지부지 중보기도가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보기도를 시작했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중보기도에는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기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점점 성숙해 져서 이타적인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타적인 신앙생활의 핵심은 중보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게 떠올려주신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실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중보기도가 풍성한 응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