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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우를 지키는 자 (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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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를 지키는 자 (겔 3:16-21)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는 짐이 만만치 않으시지요? 너무 무거워 허덕일 때도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짐을 하나 더 지워드리려고 합니다. 그 짐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한 남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 질문을 받은 사람은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데 대한 반발로 아벨을 미워하다가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저지른 죄를 다 알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그 순간, 그의 죄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저를 벌해 주십시오. 제가 마땅히 아끼고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이다니, 저는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라고 했다면, 살인은 저질렀지만, 아직 마음에서나마 동생에 대한 한 구석의 애정이 남아 있으니, 그래도 좀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는 순간, 이미 그의 마음에는 아우에 대한 사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스스로 선언한 셈이었습니다. 아우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밝힌 셈입니다. 그는 도저히 용서받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대부분의 슬픔은 <아우 지키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우를 죽이려는 수많은 가인들 때문에> 발생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서로 아우를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남을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비극적 사건들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를 보호할 것입니다. 아우를 지키는 책임은 가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우를 지키는 책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부르셨습니다. 당시 에스겔은 바벨론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야긴 왕과 함께 주전 597년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의 그발강가에서 다른 포로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다른 사람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여기 파수꾼은 <먼 곳을 응시하는 사람, 망을 보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성벽의 망대나 탑 같은 높은 곳에 서서 적이 침입해 오는지를 살피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파수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높은 곳에 서서 잘 보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외쳐서 사람들을 깨워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파수꾼이 없으면 성안의 백성들이 위험이 처하여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적들이 불화살을 날려 성안에 불이 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팔을 불고,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잠든 사람을 깨워 대피시켜야 합니다. 만약 파수꾼이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죽는다면, 그게 바로 아우를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하실 당시 백성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그 때 남 왕국 유다를 다스리는 사람은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였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망하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치 성안 곳곳이 불바다가 되어 있는 상황과 흡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고주망태로 취하여 자신들의 처지를 모르고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고,  우상 숭배와 음란한 삶에 빠져 있었습니다. 성이 함락되면 모두가 불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들을 깨워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사명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사람이란 본래부터 다른 사람을 지키면서 살 때 행복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이후 사람들은 서로를 지키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지켜줄 때 행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보호하고 지켜주고 싶은 여인을 만났을 때 행복합니다. 그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해도 힘들지도 않고, 아깝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요즘 <내 딸 서영이>란 드라마를 보십니까? 거기 서영이란 처녀가 등장합니다. 불우한 환경에서도 정말 지독하게 열심히 살면서 공부합니다. 부모들은 <내 아이들도 서영이처럼 시간을 아껴, 독하게 공부 좀 했으면....>하는 마음으로 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 드라마 중에서 멋진 청년은 우재인 것 같습니다. 우재는 서영이가 입주과외를 하는 집의 맏아들인데, 서영이를 돕지 못해 안달이 나 있습니다. 밥 먹이고 싶고, 재우고 싶고, 웃게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서영이가 찬바람이 쌩쌩 불게 차갑게 대해도 마냥 행복합니다. 또 서영이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비록 어리석은 처신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로서 딸자식을 지켜주려고 애를 씁니다. 식당에서 불판도 닦고, 심지어 술집에서 일하다가 봉변까지 당합니다. 곳곳에서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들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드라마 이야기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드시는 것 같군요. 그렇지만 혹시 이 중에 드라마를 안 보시는 분이 <목사님 제 딸은 서영이가 아니고, 영희인데요...> 이런 분이 계실까봐 드라마 이야기는 그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룩한 감동을 느낍니다. 언젠가 한 신문에 이화여자대학교의 김 모 교수가 6.25 당시에 피난 가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자 김 교수도 다른 사람처럼 한강변에 나와 강을 건널 길을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극적으로 한 작은 배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만, 피난민이 너무 많이 타서 배가 뜰 수 없었습니다. 사공은 누군가가 내려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내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민군은 다가오고 배는 뜰 수 없는 위험한 순간, 바로 그 때 몸집이 큰 한 신사가 조용히 내리더니 강가를 따라 걸어 사라졌습니다. 그 사나이의 뒷모습을 바로 보면서 김 교수는 예수님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 

그 후 배에서 내린 그 사람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그는 방송작가였던 <주태익 선생>이었습니다. 주태익 선생은 1918년에 태어나 1976년까지 살았던 분으로서 방송작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크리스챤문학가협회 회장, 방송윤리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이 분은 본래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분이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그 마음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뒤에서 인민군의 총소리가 들리는 극한 상황에서 배에서 내리는 게 쉽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을 지킬 때 사람답고, 행복하고, 감동을 받는다, 이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아우들을 지켜야 할 이유는 오늘날 이 세상에는 불구덩이에서 잠든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방이 타 죽을 것도 모른 채 불가로 날아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불을 향해 날아듭니다. 

며칠 전 보도에 보니 우리나라의 어떤 여인은 마약성분이 있는 소위 우유주사라고 하는 <프로포폴> 주사에 중독되어 지난 수년 동안 무려 6억 원을 탕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의사가 나오기도 전에 병원에 가서 간호사가 퇴근할 때 같이 퇴근했다고 합니다. 5분, 10분 간격으로 하루 종일 주사를 맞는 것이지요. 그 주사를 맞아야 십 분 정도라도 잠을 잔다고 합니다. 완전히 중독이 되었습니다. 어찌 이것뿐일까요? 알콜중독, 게임중독, 음란물중독, 도박중독, 컴퓨터중독 등, 온갖 불구덩이로 달려듭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멸망의 길을 걸어갑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건지려 할 때입니다. 자신도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숭고함을 느낍니다. 그 순간,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보여주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손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못난 숱한 아우들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던지신 분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도 살아가기 힘이 들지만, 아우를 지키는 짐까지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도 책임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지상 명령도 같은 것입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 모두 다 아우를 지키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수꾼이 되라는 말씀은 어느 정도의 부담으로 다가왔을까요? 
상당히 부담되는 부탁 정도였을까요? 아닙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심각한 명령이었습니다. 만약 에스겔이 다른 사람을 깨우치지 않아서 그들이 죽는다면 그 책임을 에스겔에게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깨우쳐 주었는데도 그들이 따르지 않아서 죽는다면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18-19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그러므로 파수꾼이 되어 다른 이들을 깨워야 할 책임은 선택이 아닌, 우리의 생명이 달린 심각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 깨우치되 불구덩이에 누워있는 악인만 깨우치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불구덩이에서 멀리 떨어져 안전한 곳에 있는 사람들도 깨우쳐야 합니다. 

20-21절을 읽어봅시다.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불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의인에게는 불구덩이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해야 합니다. 만약 경고하지 않아서 나중에라도 불구덩이에 다가와 죽게 된다면 그것도 파수꾼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은 악인이나 의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깨우고, 모두에게 경고를 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지켜야 할 아우인 셈입니다. 

여러분, 혼자만 생명의 길로 걸어가시면 안 됩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를 불구덩이에 방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반드시 깨우셔야 합니다. 

오래 전에 황해도 신천의 장개교회에 오명신집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성정이 포악했는데, 바람도 비우고, 아내 눈에 눈물을 빼는 날이 많았습니다. 오 집사님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매를 수 없이 맞았고, 여러 번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성경찬송이 불속에 던져진 적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남편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불쌍한 남편을 두고 갈 수는 없고, 반드시 그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 집사님은 늘 예배당에 엎드려 남편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남편이 예배당으로 찾아 와서는 어둠 컴컴한 예배당 안에서 엎드려 기도하던 아내를 밖으로 끌고 나가 두들겨 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여인을 보니 자기 아내가 아니고 면장부인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그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면장부인인 집사는 두 가지 일을 하면 감옥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앞으로 오 집사를 때리지 말 것, 또 하나는 교회 나올 것, 이렇게 해서 그 남편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 집사님도, 면장부인 집사님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족들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우를 마귀의 손에서 지키십시오. 그냥 불구덩이 곁에서 잠들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연말이 되기 전에 사랑하는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십시오. 119전도가 그것입니다. 119는 소방서 전화번호입니다. 119운동은 불난 집에서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워 살려내는 거룩한 운동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게시판의 빈칸을 모두 채우실 수 있길 원합니다. 

물론 파수꾼의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스겔에게 이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올라가서 7절을 보실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사람들의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굳어 있어 씨가 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듣지 않아도 전해야 합니다. 11절을 읽어봅시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두 가지 의미입니다. 안 들어도 계속 말해 주어야 언젠가는 들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낙숫물도 계속 떨어지면 굳은 바위를 뚫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말해 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안 들어도 말해 주어야 우리 책임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말해 주면 상대방이 듣지 않아도 최소한 자신의 책임은 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끝까지 깨우십시오. 끝까지 전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매 주일 우리 교회에 오시는 많은 분들은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요? 누군가 우리를 깨우친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게 권하기도 하고, 때론 꾸중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아우처럼 지켜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아우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파수꾼은 잠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잠들면 남을 깨울 수 없습니다. 기도로 깨어 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려면, 먼저 우리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도 먼저 말씀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3장 1절 이하를 보십시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아멘.  

가을이 깊어갑니다. 11월 첫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 전 한 주간 동안 <가을 감사>란 주제로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이 가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이들을 깨워 주님께로 인도하십시오. 남편과 아내, 자녀, 사랑하는 이웃과 친지를 주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도 살고, 그들도 살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열매를 이 가을에 많이 맺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무거운 짐을 지워드린다고 했지요? 아우를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만, 후에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서로를 지킬 때 그 돌봄을 우리 각자가 받게 될 것이고, 모두가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잠시 후에 부를 찬양처럼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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