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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당할 때 주님의 눈을 바라보라 (히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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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할 때 주님의 눈을 바라보라 (히 5:1-10)

이슬람 나라에서 사역하시는 한 선교사님의 편지의 일부입니다.
“동역자 여러분, 이번이 마지막 편지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를 위해서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이번에 붙잡히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지만 두렵습니다. 
...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이번 일로 이 땅이 한국 교회에서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땅은 더 많은 선교사를 필요로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야 할 땅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선교사가 계속 와야 합니다. 선교사를 계속 보내주셔야 합니다. 와서 죽을 거 알면서도 보내야 합니다. 그 길 외에는 이 영광스러운 복음이 전달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선교사로 핍박당하는 나라로 가지 않더라도 믿음만큼은 핍박당하는 나라의 선교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편안한 환경 때문이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이 무서운 박해를 받으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공급받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십니다.

9절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은 미래에 영원한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때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결단한 후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계속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핍박받는 자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들의 죄가 용서함받고 영생을 얻도록 중보하고 계십니다. 한번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10절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대제사장을 세워주셨습니다.
1절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하나님과 관계되는 일에 임명받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되는 이 일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할 대제사장이라면 당대에 가장 완벽한 사람들 중에 가리고 뽑아서 선출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론 집안을 정하여 그 후손들이 대대로 대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자녀들 중에 홉니와 비느하스 같이 문제투성이인 사람들이 나오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있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의 역할을 하려면, 사람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신이 연약한 인간성을 지녔기에 “무식하고 미혹한” 죄인들도 아무 두려움 없이 제사장에게 나아가 마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같은 사람임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수준 높은 사람이라 죄짓은 자가 올 때, 자기가 판단하고 정죄하면 어떻게 제사장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셨기에 우리들의 속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인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은 7절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는 말씀입니다. 
7절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여러 번 우셨습니다.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단순히 우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고난과 눈물이야말로 핍박당하는 성도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 힘들어도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위로받고 힘을 얻지 않을 자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면 두려움과 분노가 사그러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을 분노하게 한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그는 여러분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고작 얼마 동안 인내하며 애썼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50년 동안 60년 동안 인내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렇지만 목사님은 그가 나에게 얼마나 악하게 대했는지 모를 겁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가 또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악하게 대했는지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겠습니까? 수천년 동안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뒤집어 놓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울과 성남의 천만이 넘는 인구가 일으키는 진노의 분량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일으키는 진노는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매일 이 모든 것을 참으시며, 진노를 죄인들에게 쏟으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눈물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눈과 그 가득한 눈물을 바라보게 되면 분노가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를 행하는 자들은 사실상 제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아 탕진한 탕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제정신이었겟습니까? 새번역 성경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라고 하였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을 기꺼이 참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머님이 치매에 걸려 온갖 상소리를 한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그런 어머님을 보며 화를 내시겠습니까? 제정신이 아니신데요? 붙들고 울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이 온갖 소리로 여러분을 괴롭힌다 하더라도 그들을 병자로 보아야 합니다. 
병든 사람은 쉽게 짜증을 내며 투정을 하지 않습니까? 아픈 사람에게 화를 냅니까? 더 온유하게 대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아, 지난 밤 당신에게 그토록 심하게 소리지르고 마구 두드린 것은 순간 극심한 통증이 발작했기 때문이었어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를 붙잡고 울고 기도해 드리지 않겠습니까? 
악한 말을 퍼부어댈 때, “많이 아픈가 봐, 열이 많이 나는가 봐, 통증이 심한가 봐"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마음으로 통곡하고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이처럼 통곡을 하며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보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고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목사님께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한 후배 목사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찾아가 보니, 얼굴을 새까맣고 눈은 노랗고 복수는 차고, 측은한 마음이 들더랍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사님! 왜 목사가 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대답하셨답니다.“예, 내가 어느 날 설교를 듣는데 예수님이 진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마음에 믿어졌어. 그래서 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주님 앞에 헌신하게 되었지.”그의 얼굴에는 후회도 원망도 없이 그렇게 감사가 넘치더랍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면 헌신, 일도 아닙니다. 

젊은 엄마가 첫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어설퍼 보이지만 감당해냅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과부가 된 여인이 혼자 몸으로 많은 자녀들을 먹이고 기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은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 해 줍니다. 열쇠는 사랑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그 속에 담긴 사랑을 알게 된다면, 마음이 돌처럼 딱딱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품고 녹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도 교인이 많아야 설교할 힘이 납니다. 찬양대도 절기 때 칸타타를 열심히 준비하여도 찬양을 들어줄 교인들이 많이 모여야 힘이 납니다.
그러나 진정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이것도 극복됩니다. 
어디에 앉아도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면 흡족함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통령을 만난다고 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눈물 가득한 예수님의 눈을 보고는 울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요즘 많은 성도들이 찾는다고 하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케이티 데이비스, 20대 초반의 백인 자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소녀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의 아주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고등학교 때 스포츠카를 타고 잘 생긴 남자친구가 있고, 공부도 1등을 하고, 학생회장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케이티 데이비스는 고3 되는 여름방학 때, 3주간 우간다 고아원에 자원봉사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가서 첫날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뜨니 온통 새까만 얼굴들이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었답니다. 자기가 눈을 뜬 것을 보고 일제히 웃는데, 미소짓는 입술 사이로 새하얗게 반짝이는 치아를 보는 순간 마음을 그 아이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전 1년만 머물 작정으로 다시 우간다로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살난 스코비아가 어렵사리 꺼낸 한 마디,“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말에 그녀의 삶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14명 아이의 친엄마가 되었습니다. 그저 이름만 입양한 것이 아니고 아이들의‘진짜 엄마’가 되고, 그들의‘진짜 가족’으로 평생 우간다에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고국에 있는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보고 싶어서... 가족이 그리워서... 너무나 외로워서... 울기도 했었고 생쥐가 무서워 벌벌 떨며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아이의 몸 속에서 벌레가 심어놓은 알집을 파내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다보면 지렁이만한 기생충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눈의 눈물을 본 그녀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우간다에서 도와야 할 아이들이 400명이나 되면서 모금을 하러 미국으로 잠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미국에서의 삶이 낯선 것입니다. 

집에 다시 돌아왔는데, 심한 문화 충격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자라고 18년간이나 고향이라 불렀던 곳이 왜 이리 낯선가? 불과 1년 조금 넘게 지냈던 우간다가 오히려 진짜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뭔가? …(중략)… 

이유는 미국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내 곁을 떠나가신 건 아니지만, 자꾸 예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몸이 아프면 약국이나 병원을 찾아간다. 배가 고파서 뭔가 먹고 싶으면 슈퍼마켓으로 달려간다. 급히 어딘가 가야 하면 차를 탄다.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거나 룸메이트에게 말을 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는 남동생 브레드를 찾아가면 브레드가 나를 실컷 웃겨 준다.
먼저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만 까먹는다. 할 수 없이 억지로‘기도 시간’을 정해 놓아야 한다. 

우간다에서는 매 순간 하나님과 소통하며 지냈는데 말이다.“ 
우간다에서 눈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항상 하나님이었습니다. 몸이 아파도, 어디를 가려고 해도, 무엇을 먹고 싶어도, 위로가 필요해도, 항상 하나님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았기에 영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우간다에서 엄마로 통합니다.
“우리 집의 천사들은 나를 엄마라 부른다. 기아와 질병 등으로 엄마를 잃은 400명의 마을 아이들도 나를 엄마라 부른다. 하도 많은 아이가 엄마라고 불러 대니까 이젠 집 근처에 사는 마을 어르신들까지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많은 아이의 엄마.”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가게 점원도, 주차 요원도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선생님도, 마을 병원 의사들도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 차를 타고 지독히 울퉁불퉁한 흙길을 달릴 때도 엄마란 외침이 들려 온다. 우리 딸들은 학교에 갔다가 우르르 들어오면서 엄마라고 노래를 부르고, 아침마다 내 귀에 대고 엄마라고 속삭인다. 좋은 일이 생겨도 엄마라고 외치고, 슬픈 일이 생겨도 훌쩍거리며 엄마를 찾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쁨으로 내 심장이 마구 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늘 아버지의 심정도 그러하시리라.“

“이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럽다.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령 충만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
“나는 너무 복을 받았다”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 분의 마음과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나는 그 분의 종임을 깨닫고 나자 모든 상황에서 내 전부를 내어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매일같이 나의 삶이 변하기를 원했다. 중요한 건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서 내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십자가 지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눈물어린 눈을 바라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어린 눈을 본 자는 이 말씀은 행복으로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사는 삶은 고난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힘들게만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고난,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두려움과 염려, 미움과 분노에 갇혀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십시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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