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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간증 (요 9: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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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간증 (요 9:13-34)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헤밍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끝내 그는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자살을 해서 온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경견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세계적 부흥사인 무디와 아주 가까웠고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신앙으로 키우려고 애쓴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 되면서, 신앙에서 이탈했고 급기야는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가 위대한 소설가로서는 세상에 남았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의 역사에는 아무것도 날길수 없는 타락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의 마지막 즈음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전지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고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속에 살고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하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의 신앙이 어느 상태인지 스스로 확인하십시오.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미국에 가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결혼한 내 남편은 어디 갔는가?”라는. 
처음 결혼했을 때 남편은 자기를 참으로 사랑해 주고 위해 주는 좋은 남편이었는데 몇 해 지나니까 그 남편이 무언지 좀 변해 버렸습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등한히 하고, 사랑치 아니하는 그런 남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결혼했던 내 남편은 어디에 갔는가?” 하는 말입니다. 같은 말을 부인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결혼한 내 아내는 어디 갔느냐.” 처음엔 좋은 아내였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몇 해 가니까 마음이 변심되어 남편을 무시하고 등한히 하고 돌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결혼했던 내 아내가 어디 있는가?” 하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와 같은 문제는 모든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처음 주님을 믿을 때 그 순수했던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롬 12:2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언제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때 흔들림이 없는 믿음 가운데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개인이 자기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경험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신앙고백은 한 개인이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나는 것임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을 만났습니다. 함께 가던 제자들이 이 맹인을 보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 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논쟁을 즐겨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딱한 처지의 맹인을 앞에 놓고 사람들은 그 고통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그 고통의 근원에 대해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논쟁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그의 병을 고쳐주실 뿐이었습니다. 자! 그의 눈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가 앞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논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보면 사람을 보는데 있어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보는 맹인을 보고 그를 고쳐주는 일을 하기보다는 그 맹인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신학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고침 받은 사실보다도 예수님이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들어 율법을 어긴 것만을 문제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불행이 누구의 죄인지를 밝히는 신학적 관심보다도 나면서부터 맹인된 아픔을 보셨고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종교 계율보다도 그 맹인을 고쳐 주어야겠다는데 마음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과정은 항상 그가 당한 고난이나 상황에 참여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시지 결코 처음부터 영적인 죄를 들먹이거나 율법을 마음에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의 고난이 그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인지를 규명하는 신학적 문제가 아니고 그를 고쳐 준 날이 안식일이니 안식일을 범한 죄를 따지는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관심과 찬양의 주제는 나면서부터 불행했던 소경이 눈을 떴다는 사실이 되어야 합니다.

8~9절을 보면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은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을 뜬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하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이 고쳐진 것을 보면서도, 앞을 보게 된 사람이 전에 구걸하던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그 사람이냐 아니냐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분명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자신들의 편견과 선입관에 비추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변하는 완고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하는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장본인의 분명하고도 정확한 답변을 듣고도 그들은 이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당신이 그 사람의 덕택으로 눈을 떴다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눈을 떠 보게 된 그 사람이 “그는 예언자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다시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리새인 가운데 더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하였으나,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하여 보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도 그 일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사실만을 지적하여 예수를 죄인으로 정죄하려고 합니다. 먼저 그들은 그의 부모를 찾아가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이 전에 눈이 멀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들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태도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객관적인 차원에서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결론을 가지고 이에 상황을 맞추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신의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부모는 바리새인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회당에서 내쫓기로, 바리새인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답은 이미 자기들의 생각을 따라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놀라운 일을 일으키신 예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분위기를 파악한 날때부터 눈멀었다가 보게 된 사람의 부모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섭니다. 도저히 그들의 험악한 위세를 당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시 눈을 떠 보게 된 사람을 데려다가 묻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시오. 우리가 알기로는 그 예수란 자는 죄인이요" 그때 눈을 떠 보게 된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 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이 맹인의 대답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단 한가지는 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내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평생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겨우 이제야 눈을 떴을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뭘 알겠습니까? 나는 평생 구걸이나 하면서 지냈단 말입니다. 글을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당신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율법 같은 것은 알 턱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아직 내 눈을 뜨게 해 준 그분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단 한 가지는 전에는 앞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는 내가 보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 한 가지뿐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구원은 사건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는 사건! 구원은 구체적인 현실입니다. 체험입니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고, 교리가 아닙니다. 이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경이 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원인이 본인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본질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그의 병을 고친 것이 안식일법을 범한 것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침을 발랐건 진흙을 발랐건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과거에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적이 있건 없건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눈을 떠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손 마른 자의 손이 펴지고, 문둥병자의 몸이 깨끗해지는 것, 주린 자의 배가 채워지고, 옥에 갇힌 자가 놓임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질없는 논쟁을 벌였고, 괜한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육신의 눈을 뜨고 있었지만 실은 영적으로 눈이 감겨진 진짜 맹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을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으로 변질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에서는 사건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요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하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을 보지도 못하던 맹인은 이 체험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게 되었는데,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구걸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장님의 고통과 절망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진정 눈 먼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영적으로 멀어버린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안에 실로암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이 맹인의 고백처럼 “내가 아는 단 한 가지”는 구원이 내게 임했다는 그것이라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내가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말이지 오늘의 기독교, 우리들의 교회들은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변화되는 체험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기독교가 능력을 잃어버렸습니까? 왜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지는 게 너무 많아서는 아닙니까? 오늘의 기독교 신앙이 말씀의 본질에 굳건히 서지 못하고 세상의 지식을 따르고, 인간의 지식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삶입니다. 믿음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앙을 그저 머리로 아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알기 때문에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어떤 논쟁도 그치십시다. 오히려 새롭게 변화받아 기쁨으로 섬기고자 하는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며 격려하며 함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하는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참된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선교가 시작된 지 불과 10여년 뒤인 1898년 선교 보고서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배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한 할머니가 문답 차례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할머니가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집에 나와 같이 계십니다.” 
이번에는 선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꼭 할머니 집에만 계십니까? 다른 곳에는 안계십니까?” 
할머니 대답이, “글쎄 난 무식한 할머니라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가 기대하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와 같은 신학적인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지금 그 할머니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집에 자기와 함께 계시다고 느끼는 것 그 자체입니다. 이 할머니의 대답은 교리적으로 세례문답자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 물음은 분명 남의 신앙고백이 아닌 자기 자신이 피부로 느끼고 확신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나는 무식한 할머니라 잘 모르겠소만, 내가 아는 것은 그 분이 나와 함께 내 집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글쎄 그 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앞못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잘 보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신앙고백입니까?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예수께서 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요, 지금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평생 앞을 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천하의 무지렁뱅이 이 장님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는데, 율법과 전통에 관해선 전문가라는 바리새인들은 왜 그걸 모르는 걸까요? 그들은 평생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아왔다면서 왜 그렇게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세상에는 참 이상한 일도 많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할까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이러쿵저러쿵 평가는 그렇게 잘 하면서 왜 말씀 안에서 살지 못합니까? 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듣고 배웠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미혹케 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의 꾀임에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고 마는 걸까요? 

문제는 교만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많은 것을 본 겁니다. 알되 자기 중심에서 알았고, 보되 자기 중심에서 본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하는데, 디모데후서 1:12의 말씀처럼 내가 의뢰한 자를 알아야 하는데, 그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내가 의뢰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 지식만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을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지만 과연 이 고백이 우리 개개인이 만난 생생한 예수님을 나타내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고백입니다. 기독교 전체가 더 나아가 온 세계의 교회가 믿는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리하고 믿음의 요지가 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임에 틀림없으나 이것은 개인의 생생한 고백은 분명 아닙니다. 신앙고백은 마치 양파껍질과 같습니다. 한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오고 그 껍질을 벗기면 또 다른 껍질이 나오듯이 교회의 신앙고백도 그렇습니다. 사도신경이란 껍질을 벗기면 거기에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세 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그는 다시 사셨다.
그리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신다.
그런데 이 교회의 공동고백이나 초대교회의 세 줄 짜리 고백의 중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마태복은 16:16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 앞에 고백한 그 유명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로 그 고백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골자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같은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앞에서나 동네사람들 앞에서 증거한 “내가 아는 것은” 하고 고백하는 내가 받은 바 은혜와 내가 구원받는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닌 나의 경험입니다. 

내가 처음 빋을 때 내가 받은 바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주님이심을 우리는 고백했고 순간순간 우리 심령을 사로잡아 우리로 하여금 힘 있게 주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음으로만 담아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의 다른 부족한 면 때문에 오히려 받은 바 은혜를 고백하지 못하고 쥐구멍을 찾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자녀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내 모습 그대로를 우리는 고백할 뿐입니다. 

성경은 여러 사람이 각기 체험한 예수님의 구원을 간증한 이야기들을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고백을 비롯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에게 구원받은 생생한 경험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세리 마태는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포탈하는 자포자기한 인간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용서를 받은 후에 그의 제자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여인은 평생 남에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삶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는 바로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경험하고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중풍병자의 고백, 막달라 마리아의 고백, 삭개오의 고백, 백부장의 고백, 아리마대 요셉의 고백, 신약성서는 수 많은 개인이 바로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고백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저마다 자기의 살아가는 삶 속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 경험들을 통해 그들은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단 한가지 사실만 분명히 알고 가십시다. 더도 필요 없습니다.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신 것과,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 그분은 내 어두운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십시오. 바로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고, 놀라운 구원의 현실을 보시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리고 여기 이 사람처럼 당당하게 고백하십시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을 떠 보게 된 사람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사람의 눈을 뜨게 했는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또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는지?”를 모른다니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 소경이 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하여 오직 그 뜻대로 행하는 자의 기도만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창세 이후로 어는 누구도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님이 눈을 뜬다는 것은 우연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오직 경건하고 의로운 자의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분이 안식일을 어긴 죄인일 수 없는 것이며 문제가 있다면 안식일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말씀을 하셨고 그 분은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셨고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고 했어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을 떴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느 안식일을 범한 이단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고 주장하는 랍비들이 있습니다. 그는 불안합니다. 부모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이 마귀의 짓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눈을 무엇으로 찔러서라도 다시 평안을 되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 말씀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는 듣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눈을 뜬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내린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것은 이분이 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지금 유대사회 지도자들이 하는 말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사람은 죄가 많아서 지옥에 가고 죄가 적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죄가 아무리 많아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고,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런 당당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항상 고백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갓 크리스천이 된 사람과 불신자 친구의 대화입니다. 
“그래 자네 크리스천이 됐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관해 꽤 알겠군.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태어났나?” “모르겠는걸.” “죽을 때는 나이가 몇 살이었지?” “모르겠는데.”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팔복의 내용은 뭔 줄 아는가?” “몰라.” “아니, 크리스천이 됐다면서, 정작 그리스도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잖아!” “자네 말이 맞네. 아닌게 아니라 난 아는 게 너무 적어 부끄럽구만. 하지만 이 정도는 나도 알고 있지. 3년 전에 나는 주정뱅이였고, 빚에 쪼들렸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돌아오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나 이제 난 술을 끊었고, 빚도 다 갚았다네. 이제 우리 집은 화목한 가정이야. 저녁마다 아이들은 내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됐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걸세.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이 정도라네!” 
어찌보면 참으로 단순합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나의 달라진 모습을 전하는 것 이것이 참된 간증이 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지금도 날마다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까?
아무쪼록 받은 바 은혜를 잃지 않고 오직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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