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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의 성품에 참여하라 (벧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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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성품에 참여하라 (벧후 1:3-7)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미국의 해리스라는 여론 조사 기관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56%가 ‘관계’, 21%가 종교적 믿음, 5%가 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이 열 배가 넘습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나온 통계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관계를 무시하고는 중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관계는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된 핵심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립된 사람들보다 병이 치유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좋은 음식이 아니라도 함께 먹는 사람이 혼자 좋은 것을 먹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에 있어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적인 것은 물론이고 건강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인간관계로부터 옵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영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가 막히고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와의 관계에 맺힌 것이 있으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수평적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수직적 관계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번 명절에도 가족과 형제 간에 좋은 우애를 다지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관계를 풀어가는 중요한 키는 결국 성품의 문제입니다. 관계의 성패는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달려가는 것에 몰두합니다. 속도를 강조하면 능력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품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말합니다. 왜 베드로가 성품을 강조할까요? 베드로서는 종말론적 관점의 책입니다. 

성도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신앙의 목표를 제시해줍니다. 우리가 지어가야 할 영적 빌딩은 7층짜리입니다. 

「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7가지 단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자가 걸어가야 할 로드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품이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닙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쌓아가야 합니다. 오랜 시간과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성품의 변화입니다. 

성품은 변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품이 자라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성품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성품이 영향력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처음에는 성품이 미미해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성품으로 쌓지 않은 집은 나중에 무너집니다. 많은 일을 했어도 성품의 문제를 무시한 사람은 집이 다 무너집니다. 

오늘 언급되는 7가지는 성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맨 위층인 7층, 펜트하우스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바울이 사랑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있는 것은 결국에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품을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며 성품의 한가운데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 희랑,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소개합니다. 

여기 9가지는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9가지 빛입니다. 모든 성품을 대변하는 핵심은 사랑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일에 초점을 맞춘다면 성령의 열매는 일을 하는 사람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도 받아야 하지만 최종적인 완성은 성령의 열매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야 은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은사의 문제로 고린도 교회가 많은 어려움이 있을 때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서도 한 서기관이 주님께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 둘째는 이웃사랑을 말씀하시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사랑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빨리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을 이루었느냐 하는 성품의 문제에 성경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5절에 “너희가 더욱 힘써” 라고 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힘을 써야 할 주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혼자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는 성품의 문제가 신경 쓰일 것이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관계 속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피하면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과만 지내겠다고 하면 미숙한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스텝들을 제시합니다. 믿음에 덕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덕이 아니라 지식을 덧붙여야 합니다. 지식이 없는 덕은 부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 안에 절제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절제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거기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만 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가 있지 않으면 그 경건은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덕, 절제, 인내, 사랑같은 단어들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고, 베드로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뼈아프게 체득한 교훈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를 열어주는 핵심은 성품입니다. 성품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어떻게 성품을 훈련할 것인가에 대해서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사랑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고 했습니다. 여기에 ‘서로’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서도 아주 많이 나오는 것으로, ‘공동체와 관계’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의 모든 개념은 홀로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다음은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충이 아니라 열심히, 미온적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은 덮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서 덮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깊이 새기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편안한 이유는 허물이 바깥으로 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가능하면 약점을 들추어내려고 합니다. 죄의 본성은 들추고 싶어 합니다.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감추지 않고 떠들었습니다. 그 일로 함은 저주를 받게 되는데, 가정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성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에 쾌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혈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약점, 문제와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이 멀기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는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많은 죄가 있는데, 그 허물들이 다 드러나면 성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관계에서도 서로 연약함과 허물을 덮어줄 때 공동체가 살고 관계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덮어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수치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의 관계를 더욱 강력하게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상대의 약점을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온전히 이해하고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삶의 태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녀라도, 죽고 못 살 것처럼 사랑했던 사람이라도 품어주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품을 수 있는가를 보십니다. 품는 용량, 성품의 그릇입니다. 사춘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내가 낳은 아이지만 내가 이해하기 힘들 때입니다. 부모의 성품의 용량이 측정되는 순간이 자주 발생합니다. 자녀들의 행동이 영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도 부모가 보기에 난감한 행색을 하고 나올 때 전쟁을 치룹니다. 

또 주일 예배 시간에 맞춰 남편은 이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는 아직 화장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남편은 시계를 보면서 화를 참지만, 은혜의 때가 지나고 율법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마침내 폭발하고 그날 예배는 엉망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늘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과 사람들을 허락하실까요? 그것은 대개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하실 목적일 때가 많습니다. “이래도 품어줄 수 있겠니? 용납할 수 있겠니?”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나를 가장 실망시키는 사람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입니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나’입니다. 그런 나를 받아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감사를 해야 합니다. 사실은 상대가 나를 더 용서하고 용납해준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오늘 여기 있는 것은 누군가 나의 허물과 약점을 받아주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이해와 용서를 받으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품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은 어떤 수준을 두고 이 정도 수준만 되면 내가 너를 위해 죽어준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완전히 망가지고 깨어진 상태에 있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유산을 갚을만하면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을 품는 용량을 넓혀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연약과 허물을 받아주시고 덮어주시는 복음의 역사 안에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품어야 합니다. 어디까지 품을 것인가요? 품는 만큼 우리의 인생이 풍성해집니다.

셋째,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어려움 중의 하나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같은 배에서 난 형제들도 다릅니다. 성격, 기호, 생각, 경험, 배경, 관점이 너무도 다릅니다. 베드로는 형제 우애를 강조합니다. 형제라면 당연히 우애를 나눌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도 한 사람은 성격이 항상 느긋하고 한 사람은 성질이 급한데 이런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부부가 둘 중 한 사람은 사회사업가 같이 퍼주고 한 사람은 모으는 데 집중한다면 같이 살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생선을 너무 좋아하는데 아내는 생선 알레르기가 있다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남편은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 취미이고 아내는 날마다 내다 버리는 것이 특기라면, 아내는 쇼핑을 너무 좋아하고 남편은 한번 사면 30년 이상은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갈등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아내와 아침을 꼭 먹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함께 산다면 험난한 삶이 예상됩니다. 한 사람은 다혈질이고 한 사람은 점액질이면 힘들어집니다.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맞추며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하는 방식이 자기가 처한 배경과 지식과 경험에 따라 너무도 다릅니다. 그래서 일치점을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믿지만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관계의 문제는 성품으로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여 삼창하고 기도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함께 일치를 이루며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나와 다른 것 때문에 날마다 싸우며 은혜를 쏟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피하며 살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내 성품의 훈련의 장으로 가져와서 다름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내 성품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품을 위한 훈련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까지 주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의 성품으로 빚어나가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익혀가고, 내 주장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이해하고 품는 능력이 우리 신앙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서로를 바라보면서 놀라워해야 하는 것은 성품의 변화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입니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성품과 그 성품으로 이룬 것만 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전보다 조금 더 품는 용량, 용서의 폭, 이해의 수준이 깊어져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고 있는데 성질은 변하지 않고 늘 그 모양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다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다움은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 그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 성경 안에 깔려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오늘도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분의 성품을 본받는 사람을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과 신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무엇을 가지고 갈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고 변화된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더 가져라, 쟁취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진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갈 때 지금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지만, 관계는 뒤틀려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관계이고, 관계는 성품의 문제이고, 성품은 신앙 안에서 다듬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 생활을 지금부터 누리려면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연습해야 합니다.

소위 조폭 세계와 교회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피를 강조합니다. 그 사람들도 검은 양복을 좋아하고 목사님들도 검은 양복을 주로 입습니다. 조폭들은 집단적이고, 교회도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의리는 우리의 사랑과도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조직 안에 들어가면 가족 이상입니다. 감방에 들어가는 부하에게 두목은 “걱정 마! 네 가족은 나올 때까지 내가 책임져 주지!”하는데 교회에서는 바로 돌봄사역입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조직원들 간에 서로 깊이 의지하고 뭉쳐있습니다. 그들의 공동체는 개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가끔 오늘날의 교회가 조직의 의리, 깊은 신뢰와 돌봄, 결속만큼 서로 사랑하는가를 고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한잔하고 끝내지만, 교회 안에서는 너무나 꼬여있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관계 안에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성품을 뿜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훨씬 더 높은 수준을 살도록 요구합니다. 신성한 성품을 가지는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이 가지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참음’이 인내심과 다른 것은 분노가 쌓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다루어주실 때 새로운 성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조절되는 성품을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성품이 나에게서 흘러나올 때 우리의 신앙은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정상, 기도의 최정상은 성품의 변화입니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그분의 성품을 닮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은 성품이 변하는 것입니다. 성품의 변화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잘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빚으시는 최상의 훈련은 성품을 다듬는 것입니다.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그 아픔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찌꺼기를 걸러내고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온유함과 겸손함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많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빚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관계 속에서 천국을 이루고, 관계가 풀려 그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을 사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 7층 맨션을 지어 맨 위에 사랑을 이루어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삶의 풍성함을 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1층만 짓다가 볼일 다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아주 길고 긴 신앙의 여정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할 싸움입니다. 

주님을 닮고 싶은 이 열망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품보다 더 큰 파워는 없습니다. 성품의 위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큽니다. 성품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영향력이 됩니다. 말이 아니라 성품이 말합니다. 성품이 잘 닦여있을 때 말하지 않아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성품이 닦여지지 않는다면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갈수록 우리 삶에 영향력을 일으키는 핵심은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할 때 천국이 임하고 관계가 풀리고 삶의 지평이 열려 거룩한 영향력이 세상에 드러날 줄 믿습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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