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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먹고 마셔라 (요 6: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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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먹고 마셔라 (요 6:48-59)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기적이 일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어떤 때는 기적이 필요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기적을 통해서 배워야 할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터득하지 않으면 기적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적을 많이 체험한 민족은 없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도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영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어떤 것도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나옵니다.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은 기적입니다. 아이와 여자를 포함한다면 2만 명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오해한 데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도 기적의 핵심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떡의 문제에 관해 말씀을 하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상당히 노출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사회적 이슈가 되었겠습니까. 수만 명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떼어주는 떡을 먹고 배가 불렀다는 사건은 오늘날에 비유하면 뉴스 시간에 주요 타이틀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최고 인기 대선주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하였으니, 사람들이 예수를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피해서 다니시고, 그들의 환호에 흥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왜 몰려오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그들은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몰랐고, 단순히 이 순간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준 사건으로만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떡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핵심을 놓쳤습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경제 문제의 해결사를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를 지나는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 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당시 최강국인 애굽의 바로왕을 무릎 꿇게 하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며, 매일 2백만 명의 사람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광야를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매일 기적을 밟고 다녔고, 기적 속에서 뒹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기적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정도의 기적을 내 생애에 한 번만 보여주셔도 뒤집어질 것 같은데 그들은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기적 속에 살았지만, 영적 세계에서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그들의 발전과 진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로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영적 개안이 일어나지 않으면 기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핵심은 사람들이 먹었던 떡이 아니라 ‘진짜 떡’입니다. 잠시 배부른 떡 말고 영원히 배가 부른 떡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 6:49)」 먹고 죽는 떡 말고 죽지 않는 떡이 있다는 것입니다. 

32절에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요 6:32)」 

35절에는 “나는 생명의 떡이니” 4

8절에서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51절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라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참 떡이다”를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주 리얼하고 엽기적인 표현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5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55절에는 콜라나 햄버거 광고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56절에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제삼자가 들으면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역사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핍박할 때 바로 이런 내용들 때문에 기독교를 괴집단으로 몰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최후의 만찬에서도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건네시며 “받아먹으라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먹는다’는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표현이 ‘예수를 먹는다’는 표현입니다. 무엇이든지 먹는다고 표현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이해가 더 빠릅니다.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칠 때도 주로 먹는 것으로 비유하면 빨리 계산해냅니다. “사과가 10개가 있는데 3개를 먹었다면 몇 개가 남을까?”, “세 개요”, “아니 10개 중 3개를 먹었는데 어떻게 세 개가 남아?”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래요”라는 농담도 있습니다.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하셨습니다. 이 원색적 표현 안에 신앙의 핵심적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표현은 소화를 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밥을 입안에 넣어 꼭꼭 씹고 침과 밥이 잘 섞여서 식도를 통해 위장으로 넘겨집니다. 그러면서 입안에 넣고 맛을 느끼고, 위장에서는 또 위액과 함께 소화의 과정을 거쳐 밥이 완전히 분해됩니다. 분해된 밥은 다양한 영양소를 만들고 혈액을 통해서 영양소가 온몸으로 전달됩니다. 

밥은 우리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활동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먹어야 힘이 나고 먹어야 생명이 유지됩니다. 먹고 소화시키는 과정은 나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먹어야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우리의 진짜 밥이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은 전부 먹는 이야기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산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산다,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식탁에서 먹는 밥은 살기 위해서 먹지만 엄밀히 말하면 먹고 죽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당장 죽는 것이 아니니까 밥 심으로 산다고 그러는 것이지, 사실은 그 밥은 서서히 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류 호텔에서 최고의 요리를 먹었다고 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배가 고픕니다. 아침을 실컷 먹었어도 점심때 또 챙겨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먹고 죽는 것입니다. 뭘 먹어도 죽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지금 나를 왜 찾느냐?”라고 하십니다. 먹고 죽을 것을 또 찾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도 광야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었지만 결국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답이 나옵니다. 

기적은 좋지만, 기적 자체가 핵심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암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다 해도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쇠퇴합니다. 육신의 밥을 먹는 것은 아주 일시적인 순간을 유지하는 일에 필요한 것일 뿐입니다. 요즘 웰빙 음식이 많습니다. 무엇인가 더 좋은 것을 찾아다닙니다. 

생명 공학의 발달로 120세까지 사는 시대가 곧 올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고령화 시대에 대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노후 문제가 이슈입니다. 그러나 쉽게 풀릴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식들 덕 보는 것도 갈수록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짜 노후 준비는 얼마나 더 오래 사느냐, 얼마나 건강하게 사느냐가 아닙니다. 100년을 살아도 영원에 비교하면 한 여름밤의 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떡의 문제가 아닙니다. 좀 더 건강하게 살기 위한 노력도 좋지만, 우리는 영원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시적인 문제를 푸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생활의 필요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몰두한다면 영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포장지가 너무 멋있고 화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포장지가 좋고 화려해도 중요한 것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누가 주었느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으로 떡에 열광하고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그 떡을 누가 주었느냐입니다. 그분에 대한 관심이 본질입니다. 그것을 붙들지 못하면 포장지만 붙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핵심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영원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 

순간적인 문제 해결에 너무 목을 매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신앙은 지금 당장 좋은 것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합니다. 너무 쉽게 문제를 풀려고 하면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좀 더 빨리,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알라딘의 램프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 주는 신을 원한다면 믿음의 곁길로 빠지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더 큰 영광을 바라보는 훈련, 순간이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는 신앙,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일시적으로 배를 채우는 떡이 아니라 참 떡을 먹는 것입니다. 기적에 목을 매지 말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할 때 파워가 있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살맛이 납니다. 예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떡인가요? 참 떡인가요? 나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나는 무엇에 배가 고픈가? 무엇으로 힘을 내려고 하는가? 무엇으로 만족을 얻고자 하는가?

사탄은 자꾸 이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사탄은 세상에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고 먹는 것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세상에 자꾸 눈을 돌리게 하고 세상의 것으로 배를 불리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고 만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세끼 밥을 먹을 때마다 진짜 밥이신 그리스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먹어야 내가 삽니다. 영적인 것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눈이 열리면 말씀의 맛을 알아가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66절을 보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현실적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군중으로 돌아섰습니다. 현실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교회에 오신 분들은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군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가 정확히 보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시험을 걸자 예수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간단하지만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단단히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핵심적 진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실감하는 것은 말씀의 위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보다 강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이 떡은 곧 예수님이고 동시에 생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먹는다는 것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입니다. 말씀을 열심히 잘 먹으면 힘이 납니다. 영적인 힘은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63절에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셨습니다. 

주님은 영과 육을 정확히 구분하십니다. 영이 살아있지 않은 육은 무익합니다. 말씀을 먹지 않아 영이 살아있지 않으면 육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육체가 존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이 죽어있으면 몸은 사실 죽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영이 살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육신이 기름진 것만 열심히 먹으면 육이 펄펄 살아서 주체를 못합니다. 

영은 죽어있고 육만 기세등등한 삶은 끔찍합니다. 육이 나를 지배하게 되고, 죄 밖에 지을 게 없습니다. 죄 앞에서 무력합니다. 죄에 저항할 힘이 하나도 없어 육체의 본성대로 짐승처럼 삽니다. 왜냐하면, 영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만 만족시키는 일에 몰두하니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육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영의 힘에 의해서 육이 의미를 가지며 인생이 존귀해집니다. 영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살리는 영이신 성령이 역사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적 식욕이 있습니까? 내가 영의 사람인가 육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영적 식욕은 내 영이 하나님의 영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욕구입니다. 며칠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내 영이 갈급하고 심하면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영이 채워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갈증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심하면 갈증 정도가 아니라 고통을 느낀다면 영의 사람입니다. 내 영에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여행 중에 한국 사람은 여러 날 동안 김치를 먹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아무리 좋은 요리를 먹어도 김치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영의 것이 사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혼이 곤고해지고 힘을 잃게 됩니다. 시편에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주인이 밥을 줄 때의 강아지와 같습니다.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렸습니다. 생존의 기로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 통해 생명의 기운을 얻으면 이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참 떡을 먹어야 삽니다. 그것은 참 떡이신 예수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먹을 때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내 안에서 영적 기운을 일으키고 살 의욕이 넘치게 합니다. 그 말씀을 먹을 때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나를 감싸서 이 땅의 환란과 문제를 뚫고 나가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의 큰아들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 ‘당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먹어주면 자기 몸이 기쁨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합니다.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서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늘 예수의 살과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56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신비로운 말씀이지만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말씀으로 충만하면 내가 죽을 육신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영생의 힘이 내 안에서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맞대응하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참 떡을 먹지 않으면 하루살이와 같은 인생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유리그릇과 같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 영이 떠나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영이 빠져나가면 썩을 이 몸을 붙잡고 모든 것을 다 걸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참 떡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참 떡을 먹은 사람은 영생의 삶 안에 있습니다. 영이 없는 육은 무익합니다. 살았어도 영을 만족시키지 않고 육만 있다면 하루하루 위태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하고 심각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날마다 흔들어대고,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들이 몰려옵니다. 순간적인 해결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떠날 이유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입니다. “나는 언제나 영생의 말씀을 선택하겠습니다.”, “주님만이 내 삶의 만족이고 기쁨입니다.”라는 진실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잘 먹고 잘 사는 길입니다. 

영혼이 배부른 것, 진짜 기적은 지금 배가 부르고, 내가 병이 낫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육체는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 또 먹으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살게 됩니다. 죽음의 힘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떡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진짜 기적은 영생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영원히 사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추구하는 자로서 믿음 안에서 순간적인 배부름이나 만족이 아니라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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