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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중산층을 꿈꾸다 (살전 1:1-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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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중산층을 꿈꾸다 (살전 1:1-4, 8)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절)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8절)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오늘은 충정교회 창립 67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945년 10월 첫째 주일, 서대문 충정로 언덕배기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몇몇 성도들을 중심으로 첫 예배가 드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성도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그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충성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섬김으로 오늘의 충정교회가 이 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시고, 마지막 날 분명히 알아주실 것이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왜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충정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입니까? 이 교회에 속한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께서 이 교회와 우리를 바라보시며, 어떤 소원을 갖고 계실까요? 

지상에 존재했던 교회 중 가장 모델적인 공동체로 예루살렘교회가 떠오릅니다. 또 소아시아의 빌라델비아, 서머나교회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교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3). 때문에 바울은 이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칭찬합니다.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절).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6절).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7절).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8절). 

1장부터 시작된 이런 칭찬의 흐름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점점 후반부로 가면서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분위기가 반전되기 때문입니다. ‘환란 중에서 흔들린다’(살전 3:3). ‘믿음이 부족하다’(살전 3:10). ‘사랑이 더욱 많이 넘치게 하라’(살전 3:12). 보충할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분명 믿음의 역사가 있음을 칭찬했는데 믿음의 역사를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합니다(살전 4:1).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사랑의 수고에 대해 더 많이 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살전 4:9). 또한 소망의 인내에 대해 권면합니다(살전 5:1,4). 깨어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합니다(살전 5:6,8). 앞부분의 칭찬은 무엇이며, 뒷부분의 권면과 충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으로 본문을 보면, ‘너희가 안다’(1:5, 2:1,5,9,11, 3:3,4)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등장함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너희’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입니다. ‘안다’는 것은 ‘평가한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영적상태, 즉 믿음, 소망, 사랑이 어떠한지를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준, 스스로의 눈으로 볼 때, 저들은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앞부분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뒷부분의 권면과 충고는 누구의 기준과 평가일까요? ‘주 예수 안에서’(살전 4:1), ‘주 예수로 말미암아’(살전 4:2), ‘하나님의 뜻’(살전 4:3)이란 단어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 기준입니다. 이 기준으로 저들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더 필요한 교회였습니다. 

내가 평가하는 나,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나, 차이가 없을까요? 사데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향하여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실상은 죽었다’고 진단하십니다(계 3:1).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를 향하여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평가했지만 하나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평가하십니다(계 3:1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했지만, 주님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고 평가를 내리십니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습과 평가는 본래 모습과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특히 연륜이 더해 갈수록 이런 현상이 심화되며 고착화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는 나와 실제 나와의 괴리감이 더욱 심해질 수 있습니다. 노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외일까요? 신앙생활은 예외일까요? 연륜이 더해질수록 점점 매너리즘, 아집, 전통, 편견, 불통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67년 된 우리 안에는 이런 괴리가 없을까요? 스스로를 잘못 평가하는 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상태에 머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이르기 위하여 더 이상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듯 해보여도 기준이 다르면 지향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요즈음 ‘중산층’이란 용어가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체소득의 중간부분’에 해당하는 시민층을 뜻하지만 ‘보통 이상’이라는 의미인 중상(中上)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용어 속에는 평범한 우리의 꿈이 녹아있습니다. 우리는 중산층을 꿈꿉니다. 그런데 중산층의 기준은 나라별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선진국들의 기준에는 아파트 평수, 급여, 자가용 등, 금전적인 기준이 언급되지 않는데 비해 우리나라의 기준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1963년 8월 28일, 링컨 기념관 앞에서 행했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이 있습니다. 20수년 동안 젊음, 시간, 노력, 땀, 물질을 아낌없이 쏟아 이 교회를 섬겨오고 있는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처럼, 바울처럼 최고의 성도가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영적 중산층이 되는 꿈’입니다. 나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놓고 부단히 나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 주님의 촛대, 주님의 눈과 마음이 영원히 머무는 교회가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양들이 들어오며 나가며 풍성한 꼴을 먹고, 영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등과 기름을 준비한 흰 옷 입은 신부들이 주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의의 신부가 모두 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이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의 이름이 하나도 빠짐없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무엇보다도 삶의 현장에서 이런저런 강도를 만나 상처 입은 심령들이 이 교회에 들어와서 위로와 소망을 얻고,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새로운 힘을 얻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가득한 것이 저의 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영적 중산층’을 꿈꾸며 나아갑시다. 오늘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내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이 사랑하실 것이요, 축복하실 것이요, 그 꿈대로 영적 중산층이 되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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