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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탈출(9) : 부담 회피로부터 (왕상 1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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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9) : 부담 회피로부터 (왕상 19:1-18)

현대인들이 회피하고 싶은 것 대표적인 세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불이익, 불편, 불쾌일 것입니다. 이익이 있는 곳은 좋아하지만 이익이 없는 곳은 피하고 싶습니다. 직장도, 결혼도, 심지어 교회도 이익이 있는 곳, 편한 곳, 기쁨이 있는 곳을 찾습니다. 당연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익이 없고, 아무리 불편하고, 아무리 고통이 주어진다 해도 사명이면 회피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십자가의 길이 죽어야 하는 길이고, 고통스런 길이고, 수욕을 당하는 길이었지만 그것이 사명이기에 그 길을 부담으로 생각하며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했고 오늘날도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명을 부담으로 생각하며 회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회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요?

1. 우리는 내게 불이익이 있다하여도 하나님께 유익되면 주신 사명 회피 말고 끝까지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참으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타락한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아합 왕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아합은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가진 사람입니다. 페니키아를 통치하는 시돈 사람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통해 다메섹을 막았습니다. 자기 딸 아달랴를 남쪽 유다 왕 여호람과 정략결혼을 시켜 화해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이 이 정략결혼을 통해 바알 신을 끌어들이고 남북을 완전히 바알 신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려고 한 가장 악랄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만이 진정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면 하나님을 전하는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바알종교가 아합과 이세벨의 후원을 입어 이스라엘의 한 종교로 퍼져나갈 때(왕상16:29-33)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다는 대중적 인식과 맞서 싸워야 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소수가 되고 핍박을 받을 때였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것이 국교화될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불러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850명과 대결시켜 그들을 다 죽이고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것은 바알이 그들에게 풍요를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3년 동안 우로를 금하신 후,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비를 내리게 함으로 비와 생명은 바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합과 이세벨은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치마폭에 살고 있는 아합이 부인 이세벨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어떻게 850명의 선지자를 죽였는지 부인에게 자세히 알려줍니다. 이 말을 들은 이세벨이 노발대발하며 사신을 보냅니다.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3년이나 비가 오지 않았는데 엘리야로 말미암아 비가 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감사하기는커녕 죽이려고 합니다. 기상청장 쯤 세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다 죽었으니 왕궁에 신학교를 만들어 신학 대학원장 쯤 시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여론이 있기 때문에 바로 죽일 수 없어 경고합니다. 그 때 그 능력의 사람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형편을 보고, 즉시 일어나, 도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생명을 위해”입니다. 권력자의 말 한 마디에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도피한 것입니다. 개선장군이 되어야할 사람이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회개운동이 일어나 바알과 아세라 신을 타파하고 여호와 신앙의 부흥운동이 일어나야할 텐데 오히려 갈멜산 사건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어디까지 도망합니까? 브엘세바까지입니다. 유다 극남단 경계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세벨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미치지 못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딸이 남쪽 유다의 황후이기 때문에 여기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4절 보십시오. 광야로 들어가 하루길 쯤 갑니다. 사명을 받고 사역하는 사역지를 이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결혼하였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가정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직장에 들어갔는데 직장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직장을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학교에 들어갔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학교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것입니다. 사명을 회피하고 무엇을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충분하므로 더 이상의 은혜를 바라지 않으며 따라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하여야 할 사명은 충분히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살만큼 살았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해 도망친 사람이 목숨을 죽여 달라고 합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한계와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과 허탈감에 빠진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의욕을 상실합니다. 우울증에 사로잡힙니다. 매우 감성적 판단으로 자신을 과소평가합니다. 열등감과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낙담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오늘 이 말씀이 힘써 일했지만 나에게는 불이익만 있다고 지쳐 주어진 모든 사명을 부담으로 받아들이며 회피하고 싶어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5절 같이 읽겠습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고 있습니다. 로뎀 나무가 큰 그늘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쉼터가 아니고 로뎀 나무 아래서 햇빛을 피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신세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뎀 나무는 빗자루같이 뻗어 있어서 그늘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뎀 나무 그늘에서나마 쉬려고 머리를 들이 밀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요나가 박넝쿨로 햇빛을 가리려 했던 것처럼(욘4:6) 그저 쪼그리고 앉거나 누워 머리정도만 그늘 밑으로 둘 수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비참한 처지에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취하기보다 오히려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우울증이 극에 달해 깊은 잠에 빠져있는 그를 때우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실패와 좌절로 죽기를 원하는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그 광야에서 누워 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루만져 주십니다. 죽지 말고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기력을 얻고 사명지로 가라는 것입니다. 네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부담을 회피하고 사명지를 떠날 것이 아니라 기력을 회복하고 사명지로 가라는 것입니다.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먹고 마셨지만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누워 버립니다. 얼마나 그가 영육 간에 지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보호하고 지도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먹을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면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엘리야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사명을 회피하지 말고 하나님께 유익이 된다면 어떤 경우에고 말씀 붙들고 사명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이루어 드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을 회피하지 말고 그곳에서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명지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여전히 사명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력을 차렸지만 어디고 갑니까? 8절을 보십시오.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시내산입니다. 며칠 갑니까? 40일을 갑니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의 대략 350Km정도의 거리로 넉넉잡고도 12-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거리가 열 하룻길이라고 말했습니다(신1:2). 

그런데 이 거리를 행한 기간이 40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40일은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시켜 줍니다(신9:9,마4: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40일 동안 바로 호렙 산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신9:18).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마4:2). 40은 인내의 한계를 채우는 수로서 그 이후엔 상황의 변화를 초래케 하는 수입니다. 바알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 백성들을 돌이켜야 할 선지자 직을 받은 엘리야가 새로운 소명을 받기 위해 스스로 결정한 자기희생적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호렙산에 올라가 굴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여호와의 영광이 지날 때 모세가 피했던 그 반석 틈이었을 것입니다(출33:21) 

그 때 실망과 체념 가운데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명을 깨닫게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9절 말씀 같이 있겠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말씀이 마땅히 사명을 회피하지 말고 한 평생 감당해야 할 여러분과 저에게 들여 주시는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과 정체성을 스스로 돌아보도록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에, 자식은 자식의 자리에, 목사는 목사의 자리에, 성가대원의 성가 대원의 자리에, 교사는 교사의 자리에, 학생은 학생의 자리에, 남편은 남편의 자리에,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사명의 자리입니다. 

이 때 엘리야는 변명합니다. 하나님은 네 단어로 질문을 하는데 엘리야는 24 단어로 대답하며 하나님의 사역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자신이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났다는 것입니다. 할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사명의 자리를 도피한 이유를 변명합니다.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었고, 
둘째는 주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만 남았는데 자기 생명까지 빼앗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 있어 보았자 그 인간들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녀들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내 남편, 내 아내, 내 교회, 내 회사, 내 가정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별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만 불편을 당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자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너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사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자가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사명을 왜곡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잔치집에 초대할 때 사람들이 핑계를 댑니다. 반응이나 결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고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다고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다고 거절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눅14:21)” 말씀합니다. 

사명 앞에 헌신과 충성과 복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몰락과 배교의 시기에 필요한 것은 그들의 반응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미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서서 여호와를 섬기는 종임을 천명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다시 그를 하나님 앞에 세워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과 헌신의 자세를 재정립하게 합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다시 일어나 헌신과 충성을 보이게끔 하기 위해 엘리야를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가지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첫째는 강한 바람입니다. 둘째는 지진입니다. 셋째는 불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십시오.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 음성을 듣고 엘리야가 동굴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아직 사명지로 가지 않고 겉옷을 가리고 동굴 어귀에 서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 세미한 음성으로 다시 물어 보십시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붙들고 사명의 자리고 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네 열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 붙들고 사명을 회피하지 말고 아무리 불편한 자리이지만 사명의 자리에 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은 강력한 표적이나 능력에 의해 궁극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명 붙들고 말씀 전하면 복음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외형적인 것보다는 내면적인 것입니다. 

'토크 쇼 여왕'으로 불리는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하였고 9살 때 삼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했습니다. 아이는 몇 개월 만에 죽었고 그녀는 마약을 하기도 했고 비만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자리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히려 공개합니다. 그녀는 이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중 1위로 선정되기도 했고 '하포 엔터테이먼트 그룹'의 대표, 6억 달러(한화 8,775억)의 갑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그녀의 힘의 원동력은 가난과 아픔을 자신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성경을 읽으며 모세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쓴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글에서 네 가지 사명을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익이나 의무 책임을 뛰어 넘는 사명은 힘이 있습니다.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사명입니다 


3. 우리는 아무리 하기 싫은 불쾌한 일일지라도 회피하지 말고 동역자들과 함께 마지막 남은 사명을 완수하여야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현현하여 다시 회피하지 말고 사명지로 가라고 권고하였지만 엘리야는 다시 똑같은 변명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분명하게 그에게 사명지를 알려주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1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으로 가서”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입니까? 지금 사명지를 이탈하여 회피하여 가고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삶의 지향점을 전환해야 합니다. 통과하기 싫은 광야가 무엇입니까? 그 길 통과해야 합니다.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광야라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지는 곳입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나는 곳이고, 쓴 물이 단물이 되는 곳입니다. 그 길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사명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내가 회피한 사명의 자리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해야할 세 가지 사명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합을 징계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아합 가문을 다 진멸시켜 버립니다. 

본 절의 예언이 주어진 후 14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 악한 왕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왕하10:1-17) 바알 숭배에 빠진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습니다(왕하10:18-28).

셋째는 엘리사를 기름 부어 너 대신 선지자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이 사명 이루라는 것입니다. 세 명은 모두가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결국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것도 결국 하나님이 하시니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아무리 열심히 특심하다고 하고 너 혼자만 남아 무거운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7천명을 남겨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누가 남겨 놓은 것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이 남겨 놓습니다. 그들은 다 바알에게 무릎 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습니다. 엘리야 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우리 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가을에 뿌리는 씨앗도 있습니다. 꽃씨를 꼭 봄에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가을에 뿌리는 씨앗도 있습니다. 

한때 성공한 레스토랑 사업가였습니다. 그의 나이 40세 무렵에 시작한 레스토랑은 입소문을 타고 초고속 번창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는 독창적인 맛을 개발하여 지역의 명성을 드높였다는 공로로 주지사의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불운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레스토랑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레스토랑은 뼈대만 남고 다 타버렸습니다. 한번 밀려온 불운은 또 다른 불운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연초부터 술렁대던 불황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재기하기 위해 연 식당은 곧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화재 직전에는 아끼던 아들을 잃었고, 작은 레스토랑을 다시 열었지만 재기하지 못했고, 결국 아내마저 그를 떠났습니다. 마음의 절망이 몸의 병을 낳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햇볕 따뜻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산책하는 다정한 연인들과 단란한 가족들이 지나갔습니다. "아… 모두들 행복해 보이는데, 나는 왜 이럴까?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걸까?" 세상은 그의 캄캄한 앞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부시기만 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온전한 정신은 아니었으나 한 여자의 찬송가가 묘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그는 뭉클해진 가슴으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올라왔습니다. '그래, 다시 해보자!' 그의 나이는 분명 65라는 숫자에 서 있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과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는 40대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사업을 벌여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독특한 음식 맛에 매료되었고, 레스토랑은 하나둘 찾아오는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의 나이가 74라는 숫자에 다다랐을 때 삶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북미 지역에 6백여 개의 지점을 거느린 세계적인 레스토랑 체인점의 사장이 되었고, 심지어 그 자신도 세계 여러 나라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업 마스코트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랜드 샌더스(Harland Sanders). 

우리에게 'KFC할아버지'로 알려진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핑계(신인철)”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80세에 부름 받았을 때 말 못한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 4:12)”라고 말씀했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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