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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림 (창 22:9-12) -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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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창 22:9-12)

미국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는 패스트푸드 Chick-Fil-A의 회장인 Dan Cathy는 얼마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동성애 결혼이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 시키는 무서운 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인해 동성애 옹호자들, 할리우드 배우들은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쏟아대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칙필레 식당 앞에서 동성애자들의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미국과 같이 다양성과 동성애의 갈등이 첨예한 나라에서 그것도 매상고가 생명인 패스트푸드의 기업인이 그런 소신 발언을 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창업주인 Cathy 회장은 창업 이후 해마다 두 자리 수 매출 신장을 이끌었습니다. 칙필레는 현재 1400개 매장을 보유한 동종업계 전국 2위의 레스토랑입니다. 기자가 그에게 칙필레의 CEO로서 가장 뿌듯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주일에 쉬기로 한 것’이라 대답하였습니다. 거의 아흔을 바라보는 Cathy는 지난 50여 년 동안 주일마다 주일학교 교사로서 13세 소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왔습니다. 

통상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일요일 매출은 전체 매출의 최소 2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캐시는 하나님을 위해 그 20%를 포기했습니다. 칙필레의 모든 직원들에게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며 가족과 함께 하는 가족 문화를 강조해 왔습니다. 

경제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외식업계에서는 일명 ‘칙필레 신화’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로 주일 매출이 제로인 칙필레는 경이적인 매출신장을 해마다 이어갔습니다. 하루를 하나님께 드렸더니 다른 사람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일 하는 것보다 많은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시간을 드리는 것뿐 아니라 물질을 드려도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드림의 법칙입니다.

두주 전부터 예배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나누어드린 내용을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고 목장에서 나누어 보셨습니까? 지난주의 주제가 ‘기대감’이었는데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오늘의 주제는‘드림’입니다. 드림의 의미를 깨달을 뿐 아니라 참된 드림을 실천하는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배는 드림이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 마음, 시간, 정성, 기도,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전통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반면 찬양과 경배를 중심으로 한 현대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배는 이 두 가지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임재에 치우칠 경우 드림이 약해집니다. 내가 무엇인가 받은 느낌이 들어야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예배는 채움 받기 이전에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소중한 것을 선물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경제법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고 싶고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도 기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를 드림을 통하여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예배자에게 있어 드림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 중의 하나가 헌금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자세는 내 소유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점검하는 좋은 척도입니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가져보고 누려본 솔로몬 왕의 고백입니다. 소유욕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소유하여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소유의 열정은 사람으로 하여금 욕망의 포로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드리는 것을 시작하면서 도리어 기쁨과 자유함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고후 9:7). 

그러나 헌금을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습니다. 쓰기는 쉽지만 벌기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땀 흘려 번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을 혼자만 움켜쥐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부어주실 때에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인데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려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헌금의 바람직한 자세는 온전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표현은 쓰고 남은 것의 일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성스럽게 따로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드리는 자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을 종자와 먹는 양식을 구분해서 주셨습니다. 종자와 양식은 모두 먹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현명한 농사꾼은 결코 종자를 먹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음해의 추수를 위해 뿌릴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농사꾼은 종자와 양식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먹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거둔 것을 소출이라고 한다면 그 중에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릴 것은 종자라 할 수 있습니다. 농사꾼은 소출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종자로 삼습니다. 그래야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소출 중에서 구별하여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것으로 양식을 삼고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을 위한 투자요,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는 길입니다. 종자에 해당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헌금은 단순히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드린다는 신앙 고백적 행위입니다.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하여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응답입니다. 바울은 헌금이 봉사의 직무, 다시 말하면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9장에서 돈 또는 헌금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참된 봉헌의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성도를 섬기는 일(1), 착한 일(8), 의의 열매(10), 너그러운 연보(11), 봉사의 직무(12), 네 자신을 증거하는 봉사(13), 후한 연보 (13), 지극한 은혜(14),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사(15). 또한 8장과 9장에서 봉헌의 자세를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자원하여 (8:3), 풍성하게, 넘치게, 후하게, 너그럽게 (8:7, 9:8, 9:11, 9:13), 있는 대로 (8:11), 준비하여 (9:5), 마음에 정한 대로 (9:7), 즐거운 마음으로 (9:7). 

물론 물질만이 아니라 시간도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자기 즐길 것은 다 즐기다가 남는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일주일에 몇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까? 하나님의 시간 법칙은 인간의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하루는 하나님께 1초가 될 수도 있고, 천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1시간을 30시간, 60시간, 100시간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쁠수록 기도할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구나 일주일의 하루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즐겁게 드려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깨달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자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구약의 제사규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만 적용되는 모형이고 예표적인 규례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제사제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규례들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더 이상 문자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제사 속에 담겨 있는 정신은 오늘날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 자세 속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들은 짐승을 죽여 번제를 드리면서 헌신하는 예배를 드렸으나 신약시대 신자들은 삶 속에서 헌신을 통해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삶)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비롯한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드림 그 이상이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인 드림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에 굶주리신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해도 하나님은 드린 액수 때문에 놀라시는 분이 아닙니다. 드림의 법칙에서 중요한 기초는 ‘진정성’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모든 물건을 팔아서 교인들이 서로 통용하고 나누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전부 드리면서 나눔의 본을 보였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바나바처럼 칭찬을 들으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소유를 팔기는 팔았는데 막상 다 드리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판돈의 일부를 감추고 다 팔아 드린 것처럼 위장하였습니다. 그의 아내도 알았지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책망했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베드로의 말이 떨어지자 두 부부가 죽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범한 죄가 무엇입니까? 가진 소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바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판 값의 일부를 드리면서 다 드린 것처럼 거짓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성령을 속인 죄(3), 하나님을 속인 죄(4), 성령을 시험한 죄(9)를 범했습니다. 그들의 드림에는 진정성이 결여되었습니다. 

헌금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일대일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드림의 방식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며 드려서는 안 됩니다. 드림의 진정성은 과부의 두 렙돈 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의 연보궤 근처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주머니에서 많은 돈을 꺼내서 넣었습니다. 

당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큰 사람으로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가난한 과부가 다가와서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당시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서 그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에 해당합니다. 렙돈은 가장 작은 화폐 단위로서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하십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4) 얼마나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느냐보다는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이 담긴 헌금을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상대평가를 하십니다.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찾으십니다. 드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정성’입니다. 


드림의 본질은 깨뜨림이다

마리아가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은 드림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마리아는 값진 향유가 담긴 옥합을 예수님께 식사 하시는 자리에 가져옵니다. 옥합에 담긴 향유의 가격은 300데나리온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일 년 내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을 때의 액수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향유를 아끼는 마음보다 더 컸기에 아낌없이 옥합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향유를 붓는 것은 마리아의 예배이며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일을 할지라도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있게 마련입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가룟 유다를 비롯한 사람들이 마리아의 행위를 보고 '허비'로 규정하며 분개합니다. 여인이 쏟아 부은 향유의 물질적 가치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평소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가 도적이고 돈궤를 맡고 거기 있는 것을 훔쳐 간다고(12:6) 적고 있습니다. 유다는 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여인의 행동이 못마땅했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하여 행한 것인데 쓸데없는 짓이라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함부로 비판한 적은 없습니까? 대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는 하는 사람은 별로 말이 없습니다. 일하는데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은 하지 않고 뒷자리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사람들이 콩 놓아라 팥 놓아라 수군댑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깨닫지 못하고, 주님께 드리는 헌신을 허비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경건한 노력을 우습게 여깁니다. 예수님은 무안해하는 여인의 편을 듭니다. 마리아가 당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돈이 많다고 주님께 풍성하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하여 후하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인색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힘을 다한 그의 헌신은 향기 나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세상일들은 시간 속에 파묻힙니다. 선행도 악행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옥합이 기억되는 까닭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께 부어드린 향유는 시몬의 집을 온통 향기로 채웠지만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선행은 아름다운 향기를 품고 오늘도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집니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다 붓고도 영생을 얻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삼십 냥을 얻고도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누가 인생을 허비하였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왔기에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것을 잠시 간직하고 있는 청지기들입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들을 계속해서 붙잡으려다가 세월을 허비한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면목 없게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옥합을 깨뜨리는 작은 헌신들을 기뻐하십니다. 

주님께 우리의 옥합을 들고 나아가는 시간이 우리의 생애에서 주님 보시기에 가장 귀하고 향기가 날 때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경배할 때 우리가 있는 곳은 향기로 가득해집니다. 옥합의 향기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지라도 그 속에 담겼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됩니다. 이것이 예배 안에서 누리는 드림의 복입니다.
 

극단적인 드림

성경에 등장하는 드림의 하이라이트를 꼽는다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모리아 산의 제사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한지 4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삭을 낳기까지 처음 25년은 긴장과 불안이 연속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커다란 위로를 베푸십니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낳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그 일대에서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삭도 잘 자라서 청년의 모습을 갖추어가고 그에 대한 사랑이 점차로 깊어갈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죽여서 그 몸을 쪼개어 놓고 제물로 태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삭을 바쳐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입니다. 미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부딪히고 ‘네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며,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모순되게 보입니다. 

그런데 무리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주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번민의 밤을 보내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기 위한 이유나 변명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온갖 이유를 대며 하나님을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순종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특징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순종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9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까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말씀을 붙드는 신앙입니다.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내 아들이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살려서라도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걷고, 모리아 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이삭을 묶어 올려놓고, 칼을 들어 내려치기 직전까지의 그 모든 과정에서 일말의 지체함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자, 오히려 다급해진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반복하여 부르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하며 아브라함의 행동을 제지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황하시며 서두르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태를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것이 아니라 결단 있는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친밀한 앎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실 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마침 뿔이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을 보고 그것을 잡아 번제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우연이 숫양을 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이삭을 대신하여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양을 번제로 드린 후 하나님의 천사가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고 그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민을 떠날 때 주신 말씀인데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이삭을 버릴 때 아브라함은 비로소 이삭을 얻었습니다. 비울 때 채워집니다. 버릴 때 얻어집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할수록, 포기하면 할수록 주님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비밀입니다. 

아브라함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그동안 경험했을 뿐 아니라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예배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 수준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극단적인 드림의 배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결정적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드림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순종을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만들려고 하십니다. 지금부터 헌신적인 드림의 삶을 살면서 그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헌신의 모양은 달라도 거룩한 사역의 현장마다 눈물과 땀의 증거들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매주일 한곡을 부르더라고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의 찬양을 드리고, 주일학교에서 한 아이를 대할 때도 힘을 다한 사랑과 헌신으로 봉사하고, 한 끼를 만들어도 최선을 다해 주님께 드리는 자세로 임할 때 그 상급이 하늘에 차곡차곡 쌓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헌신을 기뻐하시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에 그 헌신을 자랑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지, 얼마나 훌륭한 교재를 사용하는지, 얼마나 고급 재료를 사용하는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헌신의 문제입니다. 드림의 문제입니다. 

교회가 침체되었다는 말은 예배가 침체되었다는 말과 통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예배자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며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 교회 부흥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준비된 만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깨달으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급함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려는 번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과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행복한 성도,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는 성도, 예배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 예배를 드리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성도,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드리는 성도, 그래서 여호와 이레의 응답을 삶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체험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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