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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응 (사 6:1-8) -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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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사 6:1-8) 

예배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든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 -Evelyn Underhill

‘예배는 영적이고 극적인 축제이다' -Ralph Martin

‘예배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하여 합당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든 것이다’ -John MacArthur

예배는 예배자의 모든 것 즉, 마음, 감정, 의지 그리고 몸 모두를 하나님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반응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며 성도는 하나님을 더욱 알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지난 주간동안에도 나누어드린 내용을 가지고 예배자로서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목장에서 나누어 보셨습니까? 첫 번째 주제가 ‘기대감’이었습니다. 사모하는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드림’이었습니다. 진정성을 가지고 우리의 삶 전체를 드리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주제는‘반응’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의 선수들인 회중이 성령 안에서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찬양으로 반응하라

예배 시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반응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찬양은 단순한 음악적 표현을 넘어서는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노래, 선포, 몸 등을 사용하여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19상)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과거를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구원 사건은 출애굽 사건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귀향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린 험난한 여정이기는 하지만 그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결국은 안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찬송을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제 2의 출애굽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귀환한 사건이라면, 궁극적인 출애굽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길을 내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우리의 찬송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하늘 보좌 앞에 서서 24장로, 네 생물, 천군천사들과 더불어 영원토록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 찬양하라는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찬양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 단어만 해도 50개가 넘습니다. 헬라어도 약 20여개나 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몇 개의 단어만 이해해도 찬양의 의미를 알고 예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할랄

‘할랄’은 성경에서 찬양의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로서 ‘자랑하다’, ‘칭찬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구약에서 165회나 사용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할랄)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랄)할지어다”(시 150:1) 

찬양의 성패는 하나님을 얼마나 자랑하고 칭찬하였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걸핏하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무시했습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의 말을 들으면서 분노를 느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다윗만이 하나님의 군대가 모욕 받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목자로 양을 치면서 사자의 공격을 물리칠 때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체험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솟아오르는 거룩한 울분을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제대로 찬양을 하려면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야다

구약에서 144회나 언급되는 ‘야다’는 ‘고백하다’ ‘두 손을 들고 경배하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야다)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 라)”(시 32:5)라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토다

‘야다’에서 파송된 ‘토다’는 구약성경에 32회 나오는데 죄나 하나님의 특성 및 사역에 대한 고백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감사(토다)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이상의 단어들을 살펴볼 때 찬양이 단순히 음악적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찬양하는 대상에 대한 이해 없이 진정한 찬양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찬양의 성패는 음악적 탁월성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자랑, 고백, 인정, 감사 등이 우선합니다.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경험하는 삶을 살 때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민수기 21장에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10절부터 13절까지 진을 쳤다는 말이 네 번 나오고, 18절부터 20절까지는 이르렀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런데 전반부에 진을 친 이스라엘 백성과 후반부에 이르렀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같지 않습니다. 

신명기 2:14-15절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세렛 시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사해 바다 끝부분으로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를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 38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출애굽 1세대는 이 기간 동안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18절 이후 이르렀다고 한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입니다. 

17절을 보니 출애굽 2세대가 전진하면서 1세대에게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행동을 합니다. 찬양을 합니다. 물론 출애굽 1세대도 하나님을 크게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바로만 위대한 줄 알았는데,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정말로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눈으로 목도한 후 감격 속에 소고를 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호와 같은 신은 없다고 합니다. 그뿐입니다. 그 후로는 그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도리어 광야 여정 중에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았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보니 그들의 삶은 불순종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결과 세렛 시내를 건너기 전에 불평하던 출애굽 1세대는 다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시내를 건넌 후에 브엘까지 전진하였는데, 브엘에서는 백성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우물을 파게 하셔서 물을 주셨습니다. 삽과 곡괭이가 아닌 지팡이로 우물을 파니 얼마나 무모합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순종을 시험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얻었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17~18절은 일명 ‘우물의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찬양으로 시작되었지만 광야를 지나는 동안 찬양을 잃어버리고 불평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브엘로 인도하신 것은 단지 물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찬양을 받기 원함입니다. 그들에게 찬양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그들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물리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릴 수 있는 거룩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므로 악기를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곡조가 있든 곡조가 없든 상관없습니다.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불러야 합니다. 

야고보 5:19,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기독교인의 삶 속에 기도와 찬송은 빠져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히 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지금 광야를 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험할지라도 인도하시는 주님이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찬송을 부르던 여호사밧 왕이나,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을 부르던 바울과 실라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계기가 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때 하나님은 더욱 풍성한 열매를 주십니다. 


노래로 반응하라

두 번째는 노래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에 매우 소극적입니다. 그 이유는 노래를 잘 부를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 때 따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시 66:1) 

여기에서 ‘즐거운 소리’의 영어 번역본을 보면 “make a joyful noise"입니다. 즉 즐거운 소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꼭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찬양하라고 합니다.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대하 20:19) 

기쁘게 소리치면 됩니다. 악기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찬양팀에 참여하십시오. 어떤 악기라도 상관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교회당에서만이 아니라 걸으면서, 운전하면서, 일터에서, 침실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노래로 표현해야 합니다. 찬양이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특히 서로 화답하며 찬양하라고 합니다. 예배 음악은 일방적인 연주가 아닌 상호 주고받는 노래요 음악이 되어야 합니다. 즉 성도가 한 마음으로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중찬양은 가능하면 성도가 잘 알고 익숙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화답하는 찬양이 아닌 일방적으로 연주하는 찬양으로 남습니다. 그럴 때 회중은 찬양으로부터 소외됩니다. 예배의 선수가 되어야 할 회중이 찬양팀에 의하여 소외된다는 것은 찬양팀이 회중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반응하라

예배시 필요한 세 번째 반응이 감사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은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과 또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고 원망,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원망, 불평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가 뒤따랐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처지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 늘 감사해야 합니다. 어렵고 슬픈 일을 만났을지라도 그리스도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모든 것을 능히 해결해 주실 줄 믿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또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드리기 위해 성전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드린 감사 찬송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하나님께 무조건 울부짖고 고함치고 간청하고 요구한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감사함으로 예배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토록 평범하면서도 쉬운 길이 우리 앞에 열려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성전 뜰만 밟고 예배의 지성소인 하나님의 보좌는 경험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결이 ‘감사’입니다.  


기쁨으로 반응하라

네 번째는 기쁨입니다. 예배 장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충만한 자리입니다. 그러나 내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는 현장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기쁨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기뻐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9-11) 

예수님은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우리 안에 충만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교회 봉사, 목회, 선교 등 주의 일을 할 때도 지치고 힘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지름길은 현장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스바냐 3:17은 이 하나님의 기쁨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이 더 풍성하고 더 온전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여러분 자신을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확신에 가득한 목소리로 옆 사람에게 외쳐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십니다.” 

예배는 내 기쁨이 아닌 바로 이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는 현장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시 16:3)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보다 세상의 기쁨, 내 기쁨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인데 예배의 기준이 ‘오늘 찬양 좋았어. 내 스타일이야’하는 식으로 예배가 내 기분이나 내 감정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는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너무나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나도 누리는 시간입니다. 


회개, 결단, 헌신으로 반응하라

마지막으로 예배에는 회개, 결단,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6장은 예배의 모형입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소를 뒤덮습니다. 권능과 임재가 아주 강력합니다. 천군천사들의 합창과 장엄한 사운드는 성전 문지방이 흔들릴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영광은 능력(power)과 위엄(majesty) 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이사야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5절) 

화로다(woe to me)는 표현은 ‘저주받았다(curse), 정죄받았다(condemn)’는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보니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들이 악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데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예배에 빠질 수 없는 일부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릴 때 아름다운 소리로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합니다. 그렇지만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비추어 자신의 참 모습을 보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개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이사야는 천사가 번제단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제단에서 이글거리며 타고 있는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집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6:7)라고 선포합니다. 그 번제단은 미래에 있을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배가 진정으로 느껴질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 우리 죄성을 회개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용서받은 사람으로 번제단을 떠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그에게 임합니다. 

이사야의 소명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명체험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역의 열매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주님의 지시를 받지 못한 사람은 방황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말씀에 이사야가 부담을 느낍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계속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서, 회개치 않아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리더들, 성도들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부르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두 번째는 특정한 사명과 사역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에 양다리 걸치고 허덕이며 사는 삶을 내려놓고 한번 사는 인생, 이사야처럼 소명을 받고 헌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예배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드린 예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진정으로 통회하고 자백하는 경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예배로 가득 찬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드리는 예배는 장차 천국에서 할 것을 연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예배 중에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까? 예배보다 더 귀한 일들을 당장 해야 할 것처럼 조급해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사명자이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성도들은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크고 비밀한 일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뿐 아니라 소망의 찬송, 승리의 찬송, 감사의 찬송을 때마다 시마다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자, 하나님께 통회자복하며 비워진 곳에 은혜로 채움을 받는 예배자, 죄사함의 확신을 가진 예배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예배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는 귀한 사명자들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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