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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교회(5) :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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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회(5) :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

 
참회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예배드리는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예배드릴 때에 우리의 영혼이 말씀 가운데 거듭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행했던 죄악과 불의, 그리고 마음 속 미움과 분노, 한 맺힘이 있습니다. 
이 시간 예배드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 모든 것들을 풀어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 놀랍고도 사랑스러운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사람의 지혜로운 설득에 의한 것인 줄 착각하며 
사람을 예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은 어리석음의 죄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경험했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어느샌가 내팽개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신앙은 습관화되었고, 
교만함의 못된 모습이 우리 안에 더욱 커져 갔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바르게 살 수 있는 하늘의 지혜와 총명을 말씀을 통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기적인 꾀와 술수로 인생을 위한 계획을 세웠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동행하시는 역동적인 삶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성령님이시어, 
이 시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기억하고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뛰놀게 하옵소서. 
아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오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삶의 일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특별하고 소중한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것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은 매우 습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믿는다고 하기도, 그렇다고 안 믿는다고 하기도 어려운, 한마디로 맨숭맨숭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가슴으로부터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영접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해왔던 신앙의 질문들에 어느 정도 답도 얻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누구에게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내 목숨을 걸 수 있는 생명의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평생 전도자의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내 힘으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어려운가? 성령님이 도우셔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성령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또다시 질문이 반복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도 이 물음들은 제게 큰 고민거리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하는 것은 실존이 고뇌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만들기도 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본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전도자의 모습, 그가 가졌던 목회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 분쟁이 심했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는 피를 토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그의 태도가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전서 2:4) 

그는 말씀을 증거할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한 것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수사학적인 웅변술로 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는, “내가 멋진 설교를 해서 성령의 역사를 드러내겠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령님께서 나의 설교를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스스로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주어가 아니라 성령님이 주어인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에게는 설교자는 다만 도구로 쓰일 뿐이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의 길을 가면서, ‘어떻게 해야 멋진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사학적인 표현을 멋지게 구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유명한 문장을 잘 인용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이러한 생각들이 강박관념이 되어 제 안에 자리를 잡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저의 생각은 서서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담백하지만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만, 그 말씀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만드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성령님의 역사가 말씀 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요? 언제, 어디서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날 때’ 입니다. 

21세기를 ‘영성의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는 수많은 영들이 존재합니다. 귀신과 잡신에 붙잡힌 사람들도 있고, 미움과 분노의 영에 붙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우주의 기를 받기 위해 자연신의 영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우주의 영을 마신다고 합니다. 그러한 활동을 통해 자신이 우주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 많은 영들 가운데 누구의 영에 붙잡혔는가에 따라서 드러나는 영성은 매우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결국 한 가지 소원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의 능력을 받아서 신성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치 도를 닦는 사람들이 공중부양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의 능력을 받아 일종의 정신적인 공중부양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붙잡힘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의 세계, 하나님이 주신 세계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속에 있습니다. 

...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5:26)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영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떤 말씀을 하셨고, 이 땅에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증언하는 영, 그것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이란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 충만’이고, ‘말씀 충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충만’입니다. 

그가(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6:14) 

또한 성령은 예수님의 것을 갖고 예수님을 알리시는 영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성령의 역사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졌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새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보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기에 보물이라고도 했습니다. 보물이 있으면 보통 어떻게 합니까? 감추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무조건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보물이 있다”고 남들에게 알리되 나만 가질 수 있도록 은밀한 곳에 숨깁니다. 이렇듯 보여주고 자랑하고는 싶지만 주고 싶지는 않는 것이 보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보물, 예수 그리스도의 보화는 조금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알게 된 이 보물을, 남도 알고 남도 그것을 함께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 마음이 본문 말씀에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2) 

본래 바울은 말의 지혜를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대학도시였던 다소 출신으로,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Gamaliel)에게서 수학한 당대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수사학을 연구했고, 철학과 변증학, 그리고 유대 율법을 깊이 꿰뚫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친 실천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모든 지혜들을 내려놓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가 가졌던 지식과 지혜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지식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빌립보서 3:7~8) 

사도 바울은 헬라적 철학과 히브리적 율법을 통합하는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물건을 사고, 새로운 장소에 가보고, 새로운 친구를 만납니다. ‘새롭다’는 것처럼 삶에 활력을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잠깐은 새로움을 경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새로움도 곧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전도서 기자는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사도바울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새로움을 위해서는 ‘내’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워지면 모든 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오고, 모든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전적인 새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사물들이 새로워지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내가 만지는 것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내가 새로워지기 때문에 만지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보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새로운 미래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새로움의 종교입니다. 옛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 진리의 역사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곧 복음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사귐을 통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또 다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지성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종종 예수를 안 믿는 친구들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네 지성은 다 어디 갔냐? 네 이성은 다 어디 갔냐?” 그들이 묻는 것처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모두 버리는 것일까요? 생각도 하지 않고, 호기심도 갖지 않고, 탐구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오히려 생각을 더 하는 것입니다. 호기심을 더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성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지성을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모든 세계는 우리의 이성을 필요로 합니다. 바른 판단력과 분석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모든 지성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데 한계에 부딪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품고 있다 낳은 자식이어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사물은 지성과 이성을 요구하지만, 인격적인 관계는 사귐을 통한 믿음과 신뢰를 요구합니다. 인격적인 존재를 알아가는 것은 사귐을 통해서입니다. 사귐을 통해 믿음을 쌓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계신 인격인 하나님을 이성으로 판단하려 할 때 다 알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즉 하나님과 사귀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경험하고, 하나님께 나의 신뢰를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사귐이 깊어지고, 내 믿음이 커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사귐의 눈으로 고린도 교회를 볼 때, 그들의 다툼과 분쟁은 지엽적인 문제로 인한 것임을 바울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더 지식이 많은지, 누가 더 지혜로운지, 어떤 선생한테 배운 것이 더 옳은지, 어떤 것이 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있는지 논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말씀합니다. 누가 가르쳤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르쳤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로 나뉘어 다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아질 때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기의 삶의 태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3)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굉장히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판단력이 뛰어나고 목표를 향한 의지력도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세상을 재는 자신의 잣대에서 벗어나면 무차별 공격을 가하던 인물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여 나만한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호언장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약합니다. 부족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두렵고 떨립니다.”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낮아지고 겸손해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율법을 다 실천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그저 버러지같이 작고 작은 인생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열정을 포기하는 겸손일까요?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인내심을 버리는 겸손일까요? 꿈과 자부심을 내버리는 겸손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겸손이 아닙니다. 

바울의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더 끓어올랐습니다. 인내심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자존감도 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바울 자신의 열정으로 달려갔다면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 낮아진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달려가는 신앙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나 혼자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힘듭니다. 나의 의지로 강해지려는 것, 물론 좋은 것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하면 의지력이 더 생깁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목표가 더 뚜렷해지고,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넘어갈 수 있는 자존감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기에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했을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5) 

또한 그는 “너희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사람 때문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전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바울도 중요하고 게바도 중요하고 아볼로도 중요하지만, 그들은 그저 선생으로서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혜인 것을 깨닫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후에 병 고침, 예언, 방언과 같은 하나님의 은사들이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도 맺히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또한 성도들이 전도자와 목회자를 존경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여야 합니다. 오직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뿐입니다. 이것을 증언할 때 바로 그 자리가 복음의 역사,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자리가 됩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성령 충만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말씀 충만하셔야 합니다. 예수 충만하셔야 됩니다. 예수님과 사귀셔야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도 하고 물어도 봐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앞서 말했듯, 인격적인 관계는 지성과 이성의 판단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귐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제껏 몰랐던 하나님의 세계가 열려질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예수님이 나타날 때 경험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찾는 지혜이고, 자유이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오늘도 새롭게 경험하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사귀기를 원합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듣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과 신뢰를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게 주신 삶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깨닫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믿음의 귀한 자녀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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