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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날에 있을 큰 애통 (슥 12:10-14,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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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있을 큰 애통 (슥 12:10-14, 마 5:4)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듣고도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에서 뛰쳐나와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베드로의 애통이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극복하고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후에 베드로는 닭이 울 때 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온전히 회개한 사람의 애통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죄 속에 머물면 안 됩니다. 죄를 짓지만 회개할 줄 알아야 하고, 돌이키되 철저하게 돌아서야 하고, 애통하되 가슴을 찢는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애통이 있어야 참 회개입니다. 
  
훗날에 우리 모두는 애통 없는 곳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 받고 의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애통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전도서 7:2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7:4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전도자가 권하는 것은 애통은 피하지 말고 사서라도 배우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6:6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전합니다. 구전에 의하면 루터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그 죄가 너무 무거워 기도하는 중에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얼마나 애통했으면 이렇게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겠습니까? 가슴을 찢는 이런 애통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애통은 정신적 우울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애통은 마음의 기쁨입니다. 7세기의 영성가 존 클리마쿠스는 동방교회의 고전이라 일컫는 ‘영적 상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AD 640년경 저술)라는 책에서 애통을 ‘영혼 안에 있는 황금 채찍’이라 불렀습니다. 애통은 영혼의 유익입니다. 애통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애통은 영혼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애통하는 모습을 여러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옷을 찢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애통할 때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라는 표현도 있고, “굵은 베를 띠고”라는 표현도 있고, “재 가운데 앉았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세는 성경에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이런 형식과 더불어 마음을 찢는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찢는 것이 심한 애통입니다. 
  
애통을 통해 인간의 심오한 경험을 이해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십니다. 애통을 통해 참다운 영적 세계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 어린 시절 옆집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까지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애통한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범한 죄를 참으로 애통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길선주목사님의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길선주목사님은 예수를 믿기 전에 남의 집에 재정을 맡은 집사로 있었는데 그 때 주인의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것을 공중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이런 한 사람의 애통이 나라 전체를 부흥의 물결로 뒤덮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애통의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애통하는 심령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큰 애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셔야 애통합니다. 

스가랴 12:10에는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리니”라고 합니다. 

애통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애통하는 마음을 주셔야 애통이 나오고 회개가 됩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부어준다는 말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야 은총이 됩니다. 
  
마태복음 5:4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애통은 벌인 것 같지만 벌이 아닙니다. 애통은 화인 것 같지만 화가 아닙니다. 애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애통은 은혜이고, 애통은 복이고, 애통은 회복이고, 애통은 기쁨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애통하는 자는 회복합니다. 
  
삭개오는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직업인 세리라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세리는 유대인 공공의 적입니다. 열심당원들은 세리만 보면 칼로 찔렀고, 테러를 했습니다.  그의 삶에서 깨끗한 것이라고는 그가 세탁했을 돈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났을 대에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의 억지로 빼앗은 것을 4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회개를 촉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주시면 회개는 절로 됩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애통하는 마음을 절로 생깁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지만 두 사람의 결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심히 애통하였습니다. 반면에 가룟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회개는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는 힘입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가장 존경받는 일본인 10인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시 ‘괴롭지 않았더라면’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괴롭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그의 심령의 괴로움과 육체의 가시는 오히려 은혜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질을 앓다가 듣고, 보는 것과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마비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일하러 나갈 때 성경을 펴두고 갔는데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그 페이지만 읽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통이 말씀을 깊이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목사가 되어 방송과 책을 통하여 일본인을 회개 시키는 능력 있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설교는 애통하고 회개하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애통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는 영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림했을 때 그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는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애통의 은총은 성령의 강림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라고 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예배를 방해하는 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케 하는 영을 방해한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는 사함이 없음을 말합니다. 회개하는 죄는 무엇이든 사함을 받습니다. 

바울을 보세요.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 믿는 많은 사람을 박해했지만 그가 회개하므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회개의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86년 어느 여름날, 아우구스티누스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 있을 때 “펼쳐 읽으라”는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펼쳐 로마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13:13-14의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을 때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가슴을 찢는 애통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성자가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애통과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애통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면 위대한 인생이 탄생 됩니다. 우리에게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주셨던 애통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모든 족속이 회개와 애통이 필요합니다. 

스가랴 12:11에는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열왕기하 23:29에 기록된 사건을 말씀합니다. 선한 왕 요시야가 기원전 608년에 애굽의 바로 느고와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이 때 온 이스라엘이 애통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떠올리며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12절에는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라고 합니다. 다윗족속과 그 아내들, 다윗의 아들 나단족속과 그 아내들, 제사장인 레위족속과 그 아내들, 레위 자손인 시므이족속과 그 아내들이 따로 애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따로”라는 말이 11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애통하되 각자가 회개하고 애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민족과 백성이 빠짐없이 회개하고 애통하였습니다. 애통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애통하는 심령은 누구에게나 주십니다. 그 때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주시는 은총입니다. 
  
왜 모든 사람에게 회개와 애통이 필요합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데는 예외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애통하지 않고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애통은 구원의 은사입니다. 애통은 하나님께 사랑받을 조건입니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회개와 애통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거부합니다. 자신에게는 회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첫 번째 선포가 “회개하라”입니다. 이 선포는 단도직입적인 촉구이며, 명령이며, 절실한 소리입니다. 
  
독일의 한 작은 도시에 피아니스트가 열심히 독주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방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자신이 유명한 작곡가 리스트의 제자라고 소개까지 했습니다. 물론 리스트의 제자라고 한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리스트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연주회가 열리기 며칠 전 공교롭게도 리스트가 이 도시에 온다는 것입니다. 

피아니스트는 큰일이 났습니다. 자신의 거짓말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 인생도 끝장일지 모릅니다. 그는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갔습니다.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하였습니다. 저는 많이 부족하여 감히 선생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리스트는 웃으며 “당신은 잘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행동에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디 피아노를 한번 연주해보세요.” 그는 떨면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주하는 중간에 리스트는 그의 연주를 멈추고 고쳐 주었습니다. 그가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는 “내가 한번이라도 가르쳤으니, 이제 분명히 내 제자예요. 당신의 연주가 끝나면 내가 한 곡을 연주할 테니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연주회는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회개와 용서의 은총을 입으면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우리 심령의 애통은 그 이상의 은총이 따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애통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심은 애통과 회개를 이룹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늘의 축복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새 것은 생명, 사랑, 치유, 회개 그리고 창조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인물들은 한 결 같이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회개를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서 세리는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우리 모두가 애통해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죄인의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특정인의 구주가 아니라 모두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 없이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하고,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의 가장 걸출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베드로가 흘린 눈물의 연못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실망시킨 것을 깨달을 때마다 계속 불어나 바다가 되었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죄인인 모든 인간이 애통합니다. 모든 인간의 애통의 바다는 지금도 물이 계속 불어나고 있습니다. 
  
찬송가 487장 2절에는 “연약함 후에 강건하며 애통한 후에 위로 받고 눈물 난 후에 웃음 있고 씨 뿌린 후에 추수하네”라고 합니다. 애통은 위로를 받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애통은 결코 우울증이나, 약함이나, 비겁함이나, 좌절감이 아닙니다. 애통은 오히려 기쁨이며, 웃음이며, 강함이며, 희망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없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풍성한 나라라고 하지만 그런데 없는 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없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는 애통이 없고, 곡하는 것이 없고, 아픔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서 애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애통이나, 눈물이나, 아픔이 없습니다. 애통은 이 땅에서, 이 나라에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 저 나라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통을 은총으로 주시는 이유를 이제 알겠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려고 이 땅에서 애통하게 하십니다. 애통이 없는 곳에서 살게 하시려고 이 땅에서 애통하게 하십니다. 지옥은 말할 것도 없이 애통의 장소입니다. 이 땅에서 애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에서 끝없는 애통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큰 애통의 은총을 주실 그날이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큰 애통의 은총을 주시는 날이 우리의 매일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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