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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등이 있습니까? (1) (룻 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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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있습니까? (1) (룻 1:15-18)

I. 말씀을 향하여

갈등이 있습니까?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가족 안에 있는 갈등을, 다음주일엔 교회안에 있는 갈등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믿음이 좋은 김집사님은 아들 딸을 미국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 딸로부터 초청이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니 딸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딸의 집에 가서 며칠을 유하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사위가 일어나더니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습니다. 밥을 다 먹은후 설겆이를 합니다. 청소한다고, 어떤 때는 빨래도 한다고 주물럭 거립니다. 얼마나 사위가 기특하게 보이는지, 내 딸 시집 참 잘 보냈다. 사위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위 등을 툭툭 두드리고 이쁘다고 칭찬을 잔뜩했지요.  

며칠후 아들 집에 가서 머물게 됐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들녀석이 앞치마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밥 짓고 빨래한다고 빨래통을 뒤적거린단 말이죠.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내 아들 그렇게 안 키웠다. 어디서 배워 먹은 벼르장 머리냐? 그러고 한참을 나무라다 생각해 보니까 자기 꼴이 우습기 짝이 없더랍니다.  

여러분, “시어머니” 그러면 머릿속에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나갑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어떤 상황이 스쳐갑니까?  

이 시어머니에 관계된 옛 속담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뒷 발축이 달걀같다고 나무란다.”  

“며느리 자라 시어머니 되니 시어머니 티를 더 내더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나쁜 시어머니 베지 않은 아이 낳으라고 하더라.” 

서양 격언에 보면,  “어머니는 요람을 흔드나 시어머니는 가정을 흔들 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결같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리브가의 집안에 에서가 장가를 들었는데 이방여인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고부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 시어머니 되는 리브가가 말하기를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창26:35)-죽을 맛이다.  너무 피곤하고 싫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얘기입니다. 잘못된 고부관계로 가정의 행복이 파괴된 단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고부관계의 아름다운 한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상에 수많은 아름다운 고부관계가 있고 어머니를 향한 아름다운 고백들이 있지만, 이토록 어머니의 마음을 푸근하게 하고 따뜻하게 하고 듣는 이들의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을 남기는 이런 고백은 아마 흔치 아니할 것입니다.

룻이 가로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17)

이 말을 좀 쉬운 현대말로 번역해 보면 “어머니 전 어머니를 떠나 살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어디를 가시든지 그곳에 저도 따라 가게 될 거예요. 어머니가 주무시는 곳에서 나도 잠들게 되고,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도 사랑하고, 어머니가 귀히 여기는 사람을 나도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겁니다. 함께 손 붙들고 살아가는한 세상 가운데서 어머니 세상을 떠나신다고 하면 어머니 세상 떠나시는 그 곁에 제가 어머니를 지켜 드릴 거예요. 어머니가 누운 그 자리 나도 무덤 삼아 언젠가는 어머니 곁에서 눕게 될 겁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부관계의 고백입니까?  결혼은 결코 당사자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일전에 몇몇 목사님들과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말을 하셨습니다.  딸에게 네가 이제 곧 시집을 갈 터인데 배우자를 데리고 와도 좋다. 그러나 단 아버지, 어머니가 동의할 때만 그 결혼은 가능하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너의 배우자를 고를 수도 있다. 그러나 네가 동의할 때만 그 결혼을 시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둘이서 함께 계약서에 싸인을 했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둘이 서로 사랑하면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나 형제나 친지들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람만 생각하고 결혼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될 수 없습니다. 결혼은 결코 두사람 만의 결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두 가족, 가족과 가족의 만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양가 부모의 축복없이 하는 결혼, 그 결과가 그렇게 좋은 경우가 흔치 못합니다.  

긴 인생을 살지 못했지만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결혼하고 깨지는 가정을 여럿 보았습니다. 감춰 두었던 문제가 드러납니다. 상처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래서 엉뚱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때는 내 감정이었나봐. 하나님 뜻이 아니었어. 깨끗이 끝내자. 이혼하자. 그래서 가정이 끝나버리는 경우를 왕왕 보게 됩니다.  

누구나 완벽한 결혼을 꿈꾸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부모와 온 집안 식구들의 축복속에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이 그렇게 쉽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결혼이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게 된다면 옛날 어르신들이 가족의 이모저모를 골고루 잘 살펴서 구석구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중매를 해서 결혼하게 되는 것, 한편 지혜로운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동양 사람들이 중매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들은 무조건 사랑이면 끝납니다. 만사 O.K. 그래서 어느날 딸아이가 결혼반지를 손에 들고와서 엄마 나 사랑하는 사람 만났어요. 며칠후면 결혼 할 거예요. 그러면 부모들이 딸 아이를 꼭 껴안고 키스해주고 축하한다. 그러고 결혼식장에 가서 딴딴따 하면 끝납니다. 수백번, 수천번, 수만번, 사랑한다고 고백했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했으면 잘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두 쌍 중에 한 쌍은 이혼을 하거든요.  

통계적으로 감정적인 사랑만 가지고 행복한 결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가 명명백백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 필요하지요. 그러나 배우자의 가정이 어떤 가정인가 하는 것은 결혼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습니다. 


II. 성경적 고부관계

결혼과 가족관계의 상징적인 단어가 “시어머니”입니다. 즉 고부관계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어지는가? 고부관계의 갈등을 일으키는 시부모들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성경적인 결혼관의 이해가 부족한데서 옵니다.  

성경에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창2:24)

떠나야 결혼이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떠나는 신비를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좀 깨신 어버이들은 내가 너희들을 분가시켜준다. 그러나 너희들이 첫 가정을 이루었으니 집에 들어와서 전통도 익히고, 아버지하고 몇 년동안 사랑도 나누고, 친척관계도 원만히 안 다음에 너희들이 나가서 사는 게 좋겠다.  

그러나 성경적인 교훈을 살펴보면 오히려 반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한 다음에는 몇 년동안 나가서 둘이서 사랑을 나누고 서로 결혼을 설계하고 어떻게 하면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인가? 의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제트기가 나는데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요. 그리고 부득이한 경우나 또 가정 형편이나 전통에 따라서 잠깐 몇 년 동안 들어와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 눈치 보느라고 좋은 며느리는 됐는데,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는 경우, 부모에게는 순종하지만 남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를 보게 되더란 말이지요.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결혼하면 부모보다 배우자가 우선입니다. 이것은 동양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당연하다고 그러는데 동양사람들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섭섭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저놈의 자식은 뼈 골 빠지게 키워서 결혼시켜 놨더니 제 마누라 밖에 모른다고...” 제 마누라 밖에 모르는 것은 문제지만, 제 마누라가 제일 우선순위라고 하는 것은 인정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국적인 전통과 큰 마찰을 일으키는 성경의 교훈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면 환영받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함께 살면서도 떠남의 원리를 아는 사람이 있고, 떨어져 살면서도 서로 의존하고 떠남의 원리를 까맣게 잊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정신의 문제입니다.  


① 시부모편에서

시부모님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에 가장 병적인 태도중에 하나가 “완벽주의”입니다.  나는 완전하다. 그러나 자식들은 언제나 모자란다. 그래서 내가 간섭해야 한다. 자식은 언제나 결단이 틀렸다. 그래서 그 결단에 언제나 간섭해야하고 개입해야 만이 내 자식이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어른이 됐는데도 간섭하고 개입합니다. 이것이 완벽주의 입니다.

심지어 내가 이루지 못한 보상심리까지 발동되어져서 내 자녀들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과잉보호형 부모들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결혼 후에도 자녀들의 삶속에서 계속 간섭할 뿐만 아니라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그 도움이 순수하지 못합니다. 자녀들을 통제하는 통제수단으로 물질을 이용합니다. 심지어 너희들 내말 안들으면 유산 한푼도 안준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어른답지 못한 태도입니까? 유산을 받겠다는 자식의 태도도 잘못되었지만, 몇푼의 돈이나 유산을 미끼로 해서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 효도나 순종이나 사랑이 그 얼마나 천박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해 자식을 주신 것 사실이지만, 그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한 인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통제하다가, 그 다음에 통제의 대상이 바뀌어 집니다.  

며느리를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저희 집사님 가운데 한 분은 심방하다가 집에다 자꾸 전화를 해요. 남편에게 하나보구나 했더니 아니예요. 시아버님께 보고를 하는 겁니다. “아버님, 오늘 다섯 가정 심방한다고 그랬죠. 세가정 끝났어요. 두가정 하고 돌아갈께요.” 그렇게 보고하지 않으면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어른들이 만들어 낸 잘못된 속담 하나는 “여자와 접시는 나돌아 다니면 깨진다” 그래서 꼼짝하지 말라는 겁니다.  

과잉 방임형 부모들도 있습니다. 낳아 줬으니 제멋대로 크겠지. 그것도 잘못된 태도입니다. 또한 유약한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연로하신 어버이들이 자식을 지나치게 의존하고 기댑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내 인생을 마지막까지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 이십니다. 지나치게 의지하다가 자식들에게 상처받아서 마지막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한을 품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문제입니다.  


② 며느리편에서

그러나 부모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 아니죠. 많은 경우, 며느리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된다고 하는 성경의 교훈을 불효의 핑계로 삼으라는 얘기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시집 장가 가기 전에 부모님께 순종하고, 시집 장가 간 다음에는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도에 있어서 만은 성경과 전통이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가 없는 것이죠.  

옛날에는 고려장을 했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 짊어지고 간 지게 그것참 보기도 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낡은 지게에 아버지 짊어지고 깊은 산속에다 내려놓고 지게까지 팽게치고 돌아서는데 따라갔던 아들녀석이 지게를 주섬주섬 챙기더랍니다. 너 그거 뭐하게. 아빠 늙으면 내가 이걸로 짊어지고 가야 될 거 아냐?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내가하는 행동 그대로 자식들이 배우고 내게 보응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부모에 대한 건강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시어머니는 나의 영원한 적이다. 나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나의 라이벌이다. 이러한 시어머니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시어머니 쪽에서도 며느리 쪽에서도 건강한 자아상이 필요합니다. 열등감은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결혼 후에도 부모에게 의존적이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의존적인 심리, 심리적인 의존, 경제적인 의존 모두 다 잘못됩니다. 결혼 후에도 부모에게서 떠나기를 거부하는 아들 딸 자연히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마마보이, 마마걸, 성숙되지 못한 젊은이들이 결혼한 것이라고 우리는 단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함께 의논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할 일이지. 언제까지 결단을 어버이들에게 미루겠습니까? 언제까지 고자질 심리, 마마보이, 마마걸로 살아가겠습니까? 이것들 버리지 못하면 행복한 가정생활, 건강한 부부관계는 상상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며느리된 여러분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자를 떼 버리십시오. 언어속에도 시아버지 시어머니 떼 버리고요, 우리 의식속에서도 가치관속에서도 ‘시’자를 떼어버려야 됩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마다 독특한 여러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부부간에 서로 결혼을 서약한 다음에는 반드시 한걸음 내려서서 아버지 어머니를 향하여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 고백합니다. “이토록 아름답게 건강한 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올 수 있도록 이 사람을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제 아내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내 아내가 두분을 아버지, 어머니를 섬겼던 것처럼 저도 이제 두분을 친아버지, 어머니로 공경하고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아버지, 어머니를 바라보게 한다음 신부가 고백합니다. “아무개씨를 이토록 건강하게, 육체도 정신도 믿음도 튼튼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며느리로 받아주시고 이 사람을 남편으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남편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해 주셨던 것처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남편이 두분을 어버이로 공경하고 섬겼던 것처럼 나의 친아버지, 어머니로 섬기고 공경하겠습니다.” 고백하게 합니다. 이 고백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 부모를 떠나” 그러니까 관계단절해도 좋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분가해서 산다 할지라도 정기적으로 찾아 뵙고 인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요, 자식의 책임입니다. 

저희교회 어떤 가정들을 보면, 자식들을 분가시켜 놓고 토요일 느즈막한 시간에는 자녀들이 다 모여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이 어버이들과 자식들이 함께 교회에 나오시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어버이를 찾아 뵙고 예배드리고,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문안을 드리고 함께 어머니와 손잡고 아버지와 손잡고 예배드리는 모습! 얼마나 하나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시부모님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자꾸 칭찬하고 자꾸 자랑하도록 만들어 드려야 합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칭찬하고 특별히 손자 칭찬하는 데는 입에 침이 마르지 않습니다. 하도 너도 나도 칭찬하고 싶어서, 노인정에서 손자 칭찬하고 아들 칭찬하는데 만원씩 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전부 만원씩 내고 다 칭찬하더랍니다. 칭찬하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대게 마찰이라고 하는게 두 가문의 전통의 마찰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나면 우리아버지는 저를 이렇게 했어요 우리집은 이랬어요. 서로들 문화의 교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입으로 하는 것뿐만 아니고 스킨 쉽(skin ship),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 몸을 가지고 함께 대화하는 버릇을 자꾸 키워나가면 마찰이 있을 수 없게됩니다.  

요즘은 모르겠습니다만 전엔 저희 집사람과 어머니는 동네 목욕탕에 가는데 세수대야 하나씩 가슴에 끌어 안고 둘이서 같이 목욕탕에 가요.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머니하고 자부하고 벌거벗고 목욕을 한다? 스물스물해요. 거 뭐 그렇게 하냐고 하니까? 껄껄 웃으면서 재밌다고 그래요. 등도 밀어주고 서로들 안마도 해주고 재밌다 그래요. 생각해 보니 그게 지혜예요.

남편에게 시부모 이야기 할 때에 비판하기보단 남편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것이고, 씨를 들먹이지 마세요. 사실 고부관계에서 갈등을 느끼기로 말하면 가장 괴로운 쪽은 남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나 아들 아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그럽니다. 어찌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존귀한 역할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 그 누구도 대신해 줄수 없는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둘 중의 하나가 선택의 방법이 있어야 된단 말입니까? 어찌 그런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다 보니 남자들이 줄타기를 합니다. 남자들 보면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어떻게 태도를 취할까? 회피형 남자들이 있습니다. 병역기피자처럼 시간만 지나가면 모든 문제 해결되더라. 그래서 아내가 뭐라 그래도 귀를 막습니다. 어머니가 뭐라 그래도 못들은 척합니다. 그리고 룰루룰루 담배한대 물고 밖으로 윙 나갔다 옵니다. 시간만 가라는 거지요.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압박형 남자들이 있습니다. 당신말이야 어머니 비유하나 못맞춰드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그거 하나 못다스리세요. 양쪽에 억압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보다 가장 못된 것은 줄타기 외교가입니다. 아내에 와선 아내의 비유를 맞추고, 어머니앞에 가서는 어머니가 다 옳다 그러고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벌어지게 만드는 사람들, 잘못된 것입니다.  


IV. 부부 - 우선순위 No.1

여러분 선언합시다! 결혼하고 나면, 우선순위 No.1 부부관계다.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었던 것처럼, 내 자식들도 한 몸이 되고 한 마음이 되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건강한 부부관계, 행복한 가정생활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20-30년 동안 우리는 한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 다른 문화에서 시집와 가지고 1-2년에 모든 것이 척척 맞아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뭐라고요. 제트기도 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두 부부가 하나가 되어서 어떻게 아버지, 어머니께 효도할까 그때부터 고민하는 겁니다. 비자금 챙기지 마세요. 언제나 문제가 되는게 비자금입니다. 남편은 비자금 챙겨서 자기 아버지 어머니 갖다주고, 부인은 부인대로 비자금 챙겨서 친정식구 챙기고, 비자금은 탄로나게 되어 있습니다. 꼭 문제를 일으킵니다. 용돈을 드리고 공경해야 한다고 하면, 공경해야지요. 장인 장모님께는 남자가, 시아버지 시어머니께는 며느리가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할때 서로가 서로에게 인정받는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결혼생활이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30년동안 살면서 크고 작은 부부관계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우리 어머님이 내 편을 들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그것이 어머님의 지혜였습니다. 어버이된 여러분들, 내 피붙이 편드는 것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못나 보입니까?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까?

시어머니된 여러분, 곧 시어머니가 되실 분들, 아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유교적인 관념보다는 성경적인 교훈을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오미가 보여준 시어머니상을 보십시다. 나오미는 중요한 가정문제 결정에 며느리의 자유의사를 존중했습니다. 나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갈 필요가 없다. 네가 원하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이곳에서 살아도 좋다. 당시 사회관습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결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또 나오미는 룻을 일컬어 단 한 번도 며느리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 딸아, 내 딸아”라고 부릅니다. 그 호칭 속에는 이는 어디서 데리고 온 여인이 아니고 내 딸이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며느리 룻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룻기 3장 1절에 보면,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행복을 나는 내 행복보다 먼저 생각하고 있다. 나와 함께 손잡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네 행복의 길이 이곳에 있는 것이 네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하면, 너는 이곳에 있어도 좋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사랑을 받았던 룻, 어머니를 배신했나요.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

이 얼마나 가슴 푸근하고 얼마나 감동적이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심금을 울리는 고백입니까? 이것이 시어머니의 멋이요, 자부된 사람들의 멋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른다움이요, 도량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도록 기대하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도와 주실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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