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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르밧 과부 (왕상 17: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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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 과부 (왕상 17:8-24)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리라 하셨느니라 15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7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18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왕상17;8-24)

오늘 본문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하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러분, 시돈이 어떤 땅입니까? 시돈은 이스라엘왕인 아합을 타락하게 했던 이세벨의 친정아버지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왕상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아합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천지로 만들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단은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명령이 엘리야에게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 또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방 여자에게, 그것도 얹혀 살기위해 찾아가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체면도 말이 아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내시고, 엘리야는 순종합니다.   

더구나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은 100km가 넘는 먼 길입니다.  길이 제대로 없던 때였고,  길이 있어도 사람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는 큰 길은 이미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아합의 군사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00km의 여행이지만 보통 어려운 여행이 아닙니다. 사르밧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도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서 가야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곳에 가더라도 편안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이런 명령을 엘리야에게 하실까요? 
 
우리는 귀한 것을 귀하게, 천한 것은 천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이지를 보고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축복받은 사람들이 그 받은 은혜를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그것을 빼앗아서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로 시기(猜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엄마들이 아이들이 젖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다른 아이에게 젖을 주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면 아이가 시기가 나서 젖을 제대로 먹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붙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왕의 자리를 공사판의 감독이었던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병이 들어봐야 안다고 합니다. 매일 호흡하는 공기가 소중한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보았습니다.  이때 당시에 과부나 고아 라는 말은 거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요즘은 여권이 신장되어 많이 달라졌지만... 2,900년 전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갔던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즉 엘리야에게도 믿음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했으면 최소한 몸을 의탁하고 거처를 정할만한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데...이것 참 내가 뭔가 잘못 본 것 아닌가?"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아야하고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엘리야도 믿어야 합니다. 
 
만일 엘리야가 "하나님, 사르밧 말고도 숨을 데가 많습니다. 왜 하필이면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이세벨의 친정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저는 못갑니다." 생각하고 자기 길을 갔으면 그는 시돈 왕이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자신의 종을 몇 년씩 먹이시는 그런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듀헨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질문에 "그것은 교만한 이세벧의 아버지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보호하고 먹이 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이세벨에게 가르치고 싶어 시돈땅에 보내셨다" 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아멘.

이 본문의 여인을 보십시오.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얼굴이나 옷차림이나 딱 보니까 외국인, 이스라엘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합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만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10절).  참 부담스러운 요청입니다. 

여러분, 물이 그냥 돌아서서 그냥 뜰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물 한 그릇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중동 지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냉장고 열고 여기 있습니다.' 하는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이 지역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그릿 시냇가도 물이 말랐던 그런 시기입니다. 물 값이 금값입니다.  상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요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가 어떤 상황입니까? 만사가 귀찮고 절망적인 상황 아닙니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즐겁게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에게 물주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소' 라는 생각을 품을 만큼 이 여인의 상태는 비참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한 끼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조금 남겨 놓고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이전에는 배불리 먹었느냐? 며칠을 허리띠를 졸라 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마지막으로 먹고 나면 이제 죽는다 하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여기 예배드리는 분들도 이 여인의 입장을 이해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 사르밧의 과부처럼 인생의 짐이 다 한 짐씩 되는 사람들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친절(親切)했습니다.  '물을 가지러 갔다' (11절)고 합니다. 이 여인의 태도를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친절한 여인에게 엘리야는 또 뭐라고 합니까?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12)  이때 과부는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14)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사람에게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먼저 가져오라’ 는 것입니다.  지기 주머니를 털어 보태 주어야 하나님의 종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먼저 나에게로 가져오고 나서 나머지를 너희가 먹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참 고통스러운 요구입니다. 지금 먹고 죽으려고 조금 남겨 놓은 밀가루 한 웅큼 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걸 나눠 달라고 한단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 그걸 조금 나눠 먹자?  기가 찬 요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보아야합니다. 엘리야는 나에게 먼저 달라는 말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절)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조건이 뭐냐... 

13절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말씀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떡 한조각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조각을 선지자에게 먼저 줘버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이 이방인 과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방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는 이런 행동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복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생명줄을 붙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한 조각 떡을 더 먹고 그 다음에는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이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이나 외모, 이름이 무엇인지, 남편이 누구였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좀 배운 사람인지, 어떻게 불행하게 과부가 되었는지 이 여인의 과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갖고 소개하는 것은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보잘것없는 여인이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른 순종의 태도를 보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는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 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고 이야기할 때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닌 지를 관심가지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만 사람이 어찌 성경대로 사나!!" 하는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실 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여인이며, 전혀 모태신앙도 아니었던 이 여인은 말씀 앞에서 순종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의지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말씀에 기회를 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로 하여금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며, 무엇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순종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가 오기 전까지 사르밧 과부에게는 땔 나무도 없었고 먹을 양식이라고는 통에 가루 한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5,16절에 보니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끼의 양식도 채 되지 않았던 가루와 기름이 적어도 2년 반 동안이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13절).     (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순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말씀을 더 드립니다. 
실상 우리가 따져보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떡 한 조각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한 끼 식사도 안 되는 ‘작은 떡 한 개’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떡 한 개’ 가 왜 그렇게 많아 보이고, 왜 그렇게 아까울까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작은 떡 한 개’ 를 먼저 드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아껴봐야 굶어죽는 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인 이 여인처럼 적은 것을 먼저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동으로 많은 양식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드린 ‘작은 떡 한 개’ 로 세 사람 이상이 몇 년을 먹을 수가 있게 되는 일이 설교를 듣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개’ 를 먼저 드린 이 과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더 큰 복, 영원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뭘까요? 죄용서 받는 복,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복입니다. 떡만 먹는 복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복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면서도 아직 하나님을 좀 대단한 신(神), 놀라운 우상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이제 그녀의 아들이 병으로 죽습니다. 여러분, 과부에게 아들이 죽으면...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자기는 목숨을 이어가니...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그녀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 

이 여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과거의 죄를 기억하셔서 치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과거에 아름답지 못한 관계를 가졌고, 그 결과로 아이를 낳은 것 같습니다. 이 과부는 엘리야를 볼 때 마다 계속 과거의 죄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3년 6개월의 긴 가뭄속에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때문에 좋을 것 같은데... 이 여인은 과거의 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자기를 살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죄 많은 자기를 굶어 죽게 하지 왜 살려서 더 고통스럽게 심판하냐고 원망을 합니다. 
 
엘리야는 여인의 원망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끼리 원망하고 따진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비를 내리시지 말라는 모진 기도를 했던 엘리야가 이번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마치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아이위에 세 번 몸을 펴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아이가 다시 살게 되었을 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24) 고 고백합니다. 이 여인은 죄 용서와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떡을 먹고 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만 육체적 구원과 죄 용서와 부활의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이런 귀한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 순종의 주인공이요, 죄 사함의 주인공이요, 부활의 주인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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