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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다시 정의하기 (딤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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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시 정의하기 (딤후 3:1-5)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사람들이 자기만 알고, 돈을 사랑하고, 으스대고 거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를 무시하고, 버릇없이 굴고, 상스럽게 행동하고, 죽기 살기로 경쟁하고, 고집을 부리고, 남을 헐뜯고, 난폭하고, 잔혹하고, 남을 비꼬고, 배반하고, 무자비하고, 허풍을 떨고, 정욕에 빠지고, 하나님을 몹시 싫어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그들 속에는 짐승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대는 그러한 자들을 멀리하십시오.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짜 음성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말의 메아리가 아니라 진짜 음성을 말이다.
- A. W. Tozer

속아 넘어가지 않기!

이 세상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함이지요. 오늘 본문은 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아주 강력하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국제적으로 알려진 ‘올해의 황당한 소비자 경고문 콘테스트’라는 대회가 열리는데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우승자를 발표한다고 하죠.

예를 들면,
* 헤어드라이어 라벨에: 잠자는 동안 사용하지 마시오!
* 푸딩세트 상자에: 상품에 열을 가하면 뜨거워집니다.
* 불면증 환자들을 위한 수면 보조제: “주의” 졸음이 올 수 있습니다.
* 어린이용 슈퍼 영웅 의상에: 이 옷을 입음으로써 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고문 하나가 있습니다. 
몇 해 전 속초에서 교역자 수련회를 할 때 제가 회덮밥을 해줬는데, 누군가의 부주의로 김에 들어가는 방부제가 같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양의 밥과 비싼 회가 들어갔기에 고민하며 읽었던 주의 사항이 “몸에 해롭지는 않지만, 먹지는 마시오!”였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안 먹자니 너무 아깝고, 결국에는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산불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화재 후에 왜 미리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소송을 걸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당국에서 충분할 경고를 했음에도,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빨리 산불이 닥칠지 모르고 집안에서 여행 가방을 싸듯이 짐을 싸다 죽었다는 것이죠.

모든 재난 영화가 그러하듯이 재난을 감지한 사람만 애가 탑니다. 대부분 사람은 다가올 피해에 대하여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하든지, 자신에게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지나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재난영화가 “해운대”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참 놀라운 것은 아무리 전문가가 경고를 해도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경고를 해서 얼어나게 될 혼란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러한 귀찮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허무하게 죽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쓰인 것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사도 바울이 죽기 전 가장 긴박하고 중요하게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진리가 있지 않을까요? 성경의 진리를 벗어난 그 어떤 것도 지침이 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천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가 교회를 다시 한 번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졌고, 그 말씀대로 전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진리를 말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교회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사용하는 GPS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 트럭에 장착된 GPS를 사랑한다. 나는 어느 사이 그것에 의존해서 길을 찾게 되었다. 가고자 하는 곳의 주소만 입력하면 알아서 안내해 주는데다 빠른 길도 알아서 찾아 준다. 모든 경로가 눈앞에 제시되고, 더구나 "잠시 후 우회전합니다." 하면서 친절하게 방향까지 알려 준다. 때로 "길을 잃으셨습니다. 참 바보 같군요! 거기까지 가지 말라고 제가 네 번이나 말씀드렸는데요."라고 말을 할 것 같다. 그러나 GPS는 절대 화를 내는 법이 없이 내가 길을 잘못 들어도 친절하게 ‘재탐색’해서 명확하게 경로를 제시해 준다.

성경은 우리의 영적인 GPS다. ‘하나님의 위치 확인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살다 보면 어떤 성경 구절이 떠올라 당신을 가던 길에서 멈춰 세울 때가 있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얘야, 나는 네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있다. 이쪽으로 돌아라. 방향을 바꾸어라.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길 바란다.” 그런 적이 있는가? 나는 분명히 있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여러 번 ‘재탐색’하셨다!
그리고 내가 그분의 말씀을 따라갔을 때는 결코 길을 잃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길을 잃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언젠가 어떤 청년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묻더군요. 

"목사님! 저도 목사님처럼 삶의 원칙을 세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원칙대로 살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죠?"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칙은 방향이 정해졌을 때 세워질 수 있지. 방향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원칙을 적용할 수 있겠나? 나에게 목회라는 방향이 정해지고 나서는 교수가 되는 것을 쉽게 거절할 수 있었고, 만나 교회 담임목사로 있는 한 집을 소유하지 않기로 정하고 나니, 동부 코오롱아파트에 전세로 살 때 1억만 더하면 집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쉽게 거절이 되더군. 물론 집을 샀더라면 지금 몇 억을 벌었겠지.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이 내 삶의 방향은 아니거든. 자네가 교수가 될지 사업을 할지 고민하는 것은 아직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증거지."

자, 교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가야 하는 방향은 아주 명확하게 성경이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결단해야 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7절을 보세요.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사람”이라는 단어를 “교회”로 바꾸어봅시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 교회를 명확히 정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요?
그동안 제 설교에서도 참 많이 강조한 것이 “삶”이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제가 삶을 강조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믿지 않는 삶이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믿지만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공허”합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말씀대로 믿으며 담대하게 행하는 교회가 아닐까요?

다시 디모데 후서를 쓸 때의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평생 심혈을 기울여 세운 교회를 보며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것이죠. 그가 직접 교회를 돌볼 수 없는 지하 감옥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가장 강력하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서 디모데 후서 3장 14-15절을 보겠습니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때가 온다!
오늘 본문에서 심각하게 경계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마지막 때가 온다!”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 오는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죠.

지난해 함께 나눴던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생각나시나요? 아마 사도 바울의 사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교회 중의 하나가 에베소 교회였을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에서 강론한 일, 그리고 두 해 동안 그곳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말씀을 전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강한 성령의 역사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1-12절을 보면,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렇게 놀라운 부흥과 역사가 일어났던 에베소 교회가 30년이 지나고 나서 요한계시록 2장 4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교회가 채 30년이 지나지 않아 그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앞에서 잠깐 GPS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방향에 집중하지 않은 교회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지난주에는 “침식”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불행하게도 침식되는 것을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에베소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번성했던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가 영향력을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베소의 장점은 바로 해안을 끼고 항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도착한 에베소의 옛 도시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변으로부터 8km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유는 수백 년 동안 자이스테르 강에서 흘러온 토사가 항구에 쌓여서 해안선이 도시에서 점점 멀어진 것입니다. 
점점 쌓이는 흙은, 점점 침식되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거나 터진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핸들에 손을 대고 있으면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을 잡는 핸들에 손을 떼고 있으면 완전히 바람이 빠질 때까지 감지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날이 옵니다.

중요한 사실,
교회가 침식한다는 것은 건물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침식은 건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콧구멍은 항상 내면의 시궁창 냄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시궁창 냄새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로 불림을 받은 우리 육체가 너무나도 쉽게 세상 유혹에 넘어가 세상을 갈망하기 때문이죠.

경제적인 어려움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깨어진 관계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앞에서 신실함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는 불이익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 앞에서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쉽게 넘어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연약함에 민감해야 합니다. 

갑자기 비열해지는 사람, 갑자기 이혼하는 사람, 갑자기 무너지는 건물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계속해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신앙적인 우리의 삶이 서서히 우리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항상 교회생활을 바쁘게 한다고 우리의 신앙이 바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 세상 속에서 견고하게 신앙을 지키는 것을 배워야 하고, 이 세상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굉장히 신앙적인 것 같은 사람인데 어느 날 보니, 복음은 없고 바리새적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장 치열하게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절규입니다. 너무나 편안하게, 평안하게, 교회 안에서 영적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영적 활동은 공허한 삶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값싼 마취제에 불과하다.”
제가 너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회만 오면 너무 행복해!”라는 말 속에 정말 우리가 겪어야 하는 신앙의 싸움을 포기한 마취제를 맞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영적으로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리모델링하면서 “광야의 생활”이라고 생각을 하지요. 사실 이것을 광야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럽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신앙에 야성을 잃어버리고 누리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아시나요?
교회의 타락과 침식은 예외 없이 가장 화려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누를 수 있었던 때,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들이 특권을 누리려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냄새를 맡지도 못하고, 방향도 잃어버린 교회가 되어 버린 것이죠.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장로일 때, 수없이 많은 교회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나요? 이제 교회가 누려야 할 것 아니었나요? 미안하지만, 이 설교를 듣고 여러분이 이 교회를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누리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아니, 다시 말하면, 세상의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누리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죠.

교회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교제할 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기꺼이 받았던 핍박의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함께 함이 즐거웠던 마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는 사랑이 아닌, 내가 얻을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죠. 사랑이 사라진 증거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남녀 간의 관계로 비유한 것이 정말 정확합니다. 사랑하던 때는 기꺼이 희생이 되고, 그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이 기뻤는데, 그 사랑이 사라지면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하게 되죠.
오늘날 교회가 침식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기도와 간구 예배가 “바라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다!

저에게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2천 년 동안 교회는 옮겨지고 이름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교회를 통하여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지금은 더 고난을 받아야 하는 시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서 우리는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라 너무 무감각하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닥치는 시험과 유혹은 다른 사람들이 직면해야 했던 시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한계 이상으로 내몰리지 않게 하시며, 그 시험을 이기도록 언제나 곁에 계시며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멋진 말씀이죠?

교회가 직면한 위기는 우리 시대에 처음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도 시험과 환란 가운데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소망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망을 주는 말씀을 하기 바로 전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경고합니다. 
교회가 부흥한다고, 교회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넘어졌을 때 일어날 힘을 주시지만, 하나님 앞에서 민감하게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또한,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소망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은,
지금 우리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소망입니다.

제가 어떤 설교를 하는 것보다도 [교회의 각성]에 나오는 글을 그냥 읽어드리는 것이 훨씬 능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달라스 신학교의 총장을 지내고 60이 지난 나이에 교회를 개척했고, 정말 유례가 없는 부흥을 일궈낸 분입니다. 하지만 그 부흥 속에서 교회의 침식을 보았고 [교회의 각성]이라는 책을 가슴으로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당신은 처음 사랑을 버렸는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잃어버렸는가? 그것이 ‘일상의 일’이 되어 버렸는가?
어쩌면 당신은 바쁘게 주의 일을 하고 있지만, 지금 그 모든 일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을지 모른다. 사역의 기쁨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당신은 단지 스케줄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잠깐 시간을 내어 당신의 동기를 살펴보기 바란다. 당신은 왜 사람들의 요청에 자주 ‘예’라고 대답하는가?
나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중에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간의 선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예’라고 말할 때는 다른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임을 깨달으라. 종종 우리는 좋은 것들을 거절함으로써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을 할 여유가 생긴다.

만일 당신이 예전만큼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침식이 일어나기 시작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고통스럽더라도 솔직하게 그 부분을 밝히겠는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당신 자신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변화는 너무나 서서히 너무나 조용히 너무나 미묘하게 일어난다. 비커 안 끊는 물속에서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조용한 장소를 찾아 스스로 이 두 가지 질문을 해보기 바란다. 

*예수님이 정말로 내 인생의 첫사랑인가?
* 그가 참으로 내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 계신가?

하나님의 자비가 이곳에 있다. 
그 자비로 당신을 도우실 것이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솔직하게 고백하라.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하며 나아올 때 주님은 당신을 꾸짖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당신을 기쁘게 맞아 주실 것이다. 다윗 왕이 침식으로 한 차례 비참한 일을 경험하고 나서 드린 아름다운 기도를 보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이것이 회개다. 회개만이 오랜 표류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이다.

저는 그동안 많은 강의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얼마나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것이 부흥의 관건이라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교회에서 참 많은 변화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어떤 프로그램도 어떤 참신한 예배의 형식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진정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충실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프로그램과 예배의 다양함이 감동을 줄 수 있으나 삶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말씀 앞에서 깨어지지 않으면 교만으로 넘어집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교회 생활에 바빠도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거룩한 테두리에서 생활을 한다 해도 말씀이 없으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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