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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덴 대(對) 천지의 주재 (행 17: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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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 대(對) 천지의 주재 (행 17:16-34)


'큰 물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크게 되려면 자기 인생을 '우물 안의 개구리' 식으로 살 것이 아니라, 넓은 세상에서 큰 뜻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조그마한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던 기독교 복음 운동 역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점점 더 '큰물'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던 사도 바울은 이제 당시 최고 수준의 문화를 자랑하던 대도시 '아덴'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아시아로 보내지 않고 그처럼 서쪽으로 인도하신 것은 바로 복음이 그런 '큰물'을 만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 아덴에서의 전도를 통하여 기독교 복음은 더 이상 국지전이 아니라 명실 공히 전 세계를 상대하는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이 쉬워서 '큰물'이지,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 불과한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시골 동네에서 출발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처럼 큰 무대 '아덴'에서 문자 그대로 세계 최고를 상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도저히 '게임도 안 될 일'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대강당에 노벨상 수상 경력들이 찬란한 대 석학들만 가득 모여 있는 가운데 연단에 올라서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평신도는 물론이고 웬만한 목사나 신학교수라 할지라도 입이 얼어붙어 버리기 쉽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사도 바울은 지극히 당당했으며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그처럼 미미하게 보였던 '기독교의 복음'이 당대 최첨단의 '헬라 문화'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이나 되는 옛날에는 혹 그럴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고도로 발달된 지성과 과학과 문명과 기술을 자랑하는 이 21세기의 현대 사회에서도 그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것이 '통할' 정도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늘 복음 쪽이 일방적으로 이기게 되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왜 우리 기독교 복음은 인간사회의 그 어떤 최첨단 문화나 과학보다도 항상 압도적으로 더 우월한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참된 유일신 여호와'를 보여 줍니다. 

본문 16절부터 21절에 기록하기를 "16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19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20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했습니다. 

베뢰아를 떠난 바울은 이제 마게도냐의 최고 도시인 "아덴"에 오게 되었습니다. 
아덴 즉 아테네는 당시 사양길에 들어서고 있기는 했지만 유구한 전통에 빛나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답게 최고 수준의 철학과 수사학, 문학과 과학으로써 여전히 그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및 군사적으로는 당대에 아예 적수가 없었던 로마제국조차 문화적으로는 이 헬라의 전통에 굴복당하고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잘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제일 먼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의 예술품이라고 감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다 그 당시에는 우상 조각들이었습니다. 
아덴시의 곳곳에 넘치는 우상들을 보고 의분에 가득 차게 된 사도 바울은 즉시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했으며 또한 "저자" 즉 저 유명한 '아고라 광장'에서도 노방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바울은 그 당시 아덴에서 최신으로 유행하고 있던 두 대조적인 학파의 철학자들을 만나 "쟁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비구레오" 철학자란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들은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을 사람의 최고의 덕으로 여겼던 '쾌락주의자'였습니다. 
반면에 "스도이고" 철학자란 저 유명한 '스토아 학파'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감정보다 의지를 앞세움으로써 사람이 자기 욕망을 억누르고 선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금욕주의자'였습니다. 
이처럼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철학이 당시 헬라 철학의 양대 산맥인 동시에 또한 최신의 철학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바울을 "말장이"라고 깔보고 또한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 즉 '잡신을 전하는 자'라고 얕잡아 본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당대 최고 수준의 철학에 대한 교만심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헬라 철학자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라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것은 아덴시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집회 장소로서 아테네 시민의 공적인 회의와 토론이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또한 이 아레오바고는 아덴시의 재판소이기도 했는데,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가 501명의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판결과 사형언도를 받은 곳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모든 아덴 사람"들과 또한 아덴을 방문한 "외국인"이 바로 거기에 모여서 날마다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음이더라"고 한 대로, 당시 아테네의 자유 시민들은 생산 노력은 모두 노예에게 맡겨 놓고 자기네들은 그저 그런 철학적 토론을 일삼으면서 소일했던 것입니다. 
그처럼 "가장 새로 되는 것"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 바로 그것이 아덴시를 철학과 수사학을 비롯한 그 당시 모든 첨단 학문의 선두 주자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의 지성은 참된 하나님을 스스로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그 영향력을 미치는 고차원의 철학을 자랑했던 아덴, 사람의 중지(衆智)를 극단적으로 존중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아덴이었지만, 그 아덴의 지식이 '스스로 살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지각하거나 인식할 줄 몰랐습니다. 
아니 소위 그 '똑똑한 머리'들은 오히려 온갖 종류의 우상 신들만 '온 성에 가득히' 만들어 놓았을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지식이 발달하고 그 결과 과학과 기술이 우주를 정복하고 인간을 복제한다는 수준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 치명적인 핸디캡은 결코 극복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현자나 지식인이나 박사라 할지라도, 아무리 '사람들의 중지'를 모은다 해도 참 신을 스스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질적으로 '완전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으며 그 결과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서는 그 관계를 절대로 회복할 수가 없는 '전적 무능력'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참된 복음만이 바로 이 맹점을 정확하게 일깨워 줍니다. 
참된 기독교만이 이 인간사회에서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으되 단 하나도 없다.'라고 사람의 악하고 무능한 본성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에게 전해졌던 "이 새 교" 즉 '기독교의 복음'만이 오늘날까지도 사람으로 하여금 '자존하시는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교제하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진리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종교심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창조주의 절대주권'을 경외하게 만들어 줍니다. 

22절로부터 26절 말씀에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가 되기 이전에는 유대 사회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수재 중의 수재였으므로 헬라 철학에 대해서도 완전히 통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통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전도할 때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성경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지만, 이 헬라인들 앞에서는 바로 그들이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던 '온 세계'를 소재로 전도를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우선 바울은 헬라인들을 가리켜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헬라인들이 얼마나 '종교적'인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모든 신을 다 인정하는 범신론자였던 헬라인들은 혹 그들이 섬기는 신들 중에 실수로 빼 놓은 신이 있을까 염려하여 특별히 그런 제단까지 세웠습니다. 
즉 자기네들이 잘 모르는 다른 어떤 민족이나 지역의 신에게서 받을 복을 놓치거나 혹은 그 노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소위 '무명의 신'까지 섬겼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종교심이 많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 헬라인들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 즉 '참된 신'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 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짜 신이라면 당연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 즉 창조주이셔야 마땅하며 또한 "천지의 주재" 즉 우주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자가 되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논증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헬라어의 '전 세계, 우주'(kosmos)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던 까닭에 대신 '하늘과 땅'이란 표현을 썼으며, 바울은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 표현을 여기서 사용하면서 '천지만물의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야말로 헬라인들이 알고 있던 '우주와 만유'를 창조하신 참 신이시라고 선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어떤 '필요' 즉 무슨 "부족한 것"이 결코 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사도 바울은 이어서 설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절대주권자이신 까닭에 항상 스스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키시며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하게 만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거주해야 하는 분도 아니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신 것" 즉 무슨 '제물'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는 분도 결코 아니십니다. 
헬라의 갖가지 신들은 사람들이 신전을 지어주고 제물을 바쳐야 존재할 수 있는, 즉 순전히 '사람에게 의존하는 무력한 신'이었지만, 참 하나님은 그 반대로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무한한 공급자이실 따름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애당초 "인류의 모든 족속"을 "만드사" 이 지구상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존 연대를 "정하시며" 그들의 거주 공간을 "한하신"(제한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이 부분을 'He made...'라고 사역동사를 사용해 번역해 둔 것처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써 모든 역사의 진행과 각 인생의 흥망성쇠를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것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처럼 '종교성이 많은' 헬라인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전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전 인류의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그들에게 선포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종교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과 유전인자만으로 볼 때에는 98퍼센트가 일치한다는 침팬지조차 이것만큼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물론 앞으로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만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른' 영적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고 바로 그 때문에 오직 사람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종교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그 특별한 영적 본성조차 오염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자신의 종교심을 가지고 참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종교'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아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인본주의 우상'들을 하나님 대신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신을 의지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종교심이 저절로 참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차원 높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가, 남달리 도덕심이 깊은 군자가 사람으로 하여금 참 신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기독교의 복음만이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존재의 창조주가 되시며 역사와 인생의 절대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음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교 복음은 인간의 양심으로는 결코 스스로 믿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해 줍니다. 

27절 이하 31절의 말씀에 "27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더듬어 찾아"라는 것은 찾기 어려운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는 뜻이 아니라 '노력해서 찾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전심으로 찾는' 자들로 하여금 결국 당신을 "발견케 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결코 찾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시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시는" 즉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할" 생명의 에너지를 늘 공급해 주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참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시며 각 사람의 마음속에까지 좌정하고 계시는 분이시니, 사람이 헛되이 고생할 필요 없이 '바른길'만 찾으면 즉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너희 시인 중에도"라고 당시 어떤 헬라 시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시는 '제우스에게 바치는 찬양'이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거기에 보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즉 '사람은 신의 자녀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이처럼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 '신과 교제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음이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영적 본성'은 안타깝게도 삐뚤어진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신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우상 즉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든 것"을 사람이 거꾸로 섬기는 '주객전도의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땅히 창조주이셔야 할 지극히 높으신 절대자를 이처럼 사람의 피조물로 격하시켜 놓고도 그것을 신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시행착오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위가 당대 최고라고 자부심에 가득 차 있던 헬라의 철학과 문화가 저지르고 있던 소위 '최고 수준의 종교생활'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라는 말은 달리 번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지나치셨지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사람에게 무슨 변명의 여지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 어떤 말로도 '핑계할 수 없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께서 "정하신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는 실로 완벽한 '자기 계시'를 나타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살아 계심을 사람에게 친히 보여 주신 것 -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화육강세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곧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만한 증거"는 바로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사도 바울은 이런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까지 받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당시 '기복주의적인 종교심'만 있었지 '종말적인 심판'의 개념은 전혀 없던 헬라인들에게 명백히 증거해 주었습니다. 
즉 참된 하나님 선포로 시작된 바울의 전도는 이제 그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의 완성으로서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초청으로 종결된 것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의 선포'가 없으면 다른 아무리 좋은 말들을 많이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참된 복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하게 사는 것'이 종교의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바꾸어 말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진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양심'이 참된 구원의 길을 절로 찾게 만드는 것도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우상은 사람의 생각이나 필요에 따라 만든 신이니까 당연히 사람 편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관계를 유지하게 되겠지만, '자존자이신 하나님'은 사람의 고안이나 기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의 의도와 방법을 통해서만 사람이 만나 뵐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만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뵐 수 있도록 계시해 주셨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죄인이 구원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은 결코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대 어떤 환경에서도 '인간의 선한 양심'이 '구원주'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기독교의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해 줄 수 있음을 더욱 힘 있게 선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끝으로 32절부터 34절에 기록하기를 "32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난 것처럼 '바른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은 항상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은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 아덴에서도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택자'를 정확하게 불러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가 진보하고 인간사회가 발전한다고 해서 복음의 색깔도 거기에 맞추어서 그때그때 바꾸어 가야 한다는 소리는 그냥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세계무대의 중심에 등장하여 당대의 '최고 철학'에 맞서면서도 조금도 주눅 드는 것 없이 당당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 기독교 복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항상 '세상의 지혜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세상의 강한 것'들을 물리치기에 넉넉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결정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 복음만이 본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에게 '참된 유일신 여호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오직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만이 '바벨탑의 교만'에 빠져 있는 인간에게 '창조주'이시며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선포해 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복음만이 '영벌 지옥'으로 직행하고 있는 죄인에게 '구원주'이신 하늘 아버지를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범신론'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철학이나 '유물론 우상'을 섬기고 있는 현대 과학이나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 낸 첨단기술이라는 것 앞에 기독교의 복음이 질 리가 없으며 전도자가 주눅이 들 이유가 전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덴'과 '천지의 주재'의 대결에서 어느 쪽이 압도적으로 우월한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현대사회의 지성인들 앞이라 해서 기가 죽는 것이 결코 아니라 전 인류역사에 걸쳐서 필적할 상대가 없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진리'이며, 최첨단 IT 기술과학 앞이라고 해서 절로 '구시대의 산물'로 전락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부동의 '최고'요 '최선'이요 '최상'의 '좋은 소식'(good news)인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유일신 여호와', '천지만물의 창조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의 구세주'를 알려 주고 만나게 하고 영접하게 해 주는 이 가장 우수하고 탁월하고 월등한 '기쁜 소식'의 복음을 그 언제 어디서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거리와 길모퉁이'에서 전파하고 '온 세상'을 향하여 더욱 크게 외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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