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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칭찬받는 교회 (고전 11:17-22, 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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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는 교회 (고전 11:17-22, 30-34)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 17절 상반절에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 “너희를 칭찬하지 읺는다�?쓰고있으며 22절 하반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합니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파당 때문입니다. 무슨 파당입니까? 이번에는 성만찬을 둘러싼 파당입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행하기에 앞서 교인들이 함께 친교의 식사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공동식사가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 신자들의 모임은 대부분 교인 중 부유한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큰 방이 있는 집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사이에는 가진 자들도 있었고 갖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집의 주인은 의례히 부자였을 것이고 자연히 친한 지인들도 대부분 가진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보다 가까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따로 따로 모여 각각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 저택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식사공간이 있었습니다. 삼 면의 벽이 모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긴 안락의자가 달린 식탁이 차려진 식당(triclinium)이 있는가 하면 그저 똑바로 앉아서 먹어야 하는 마당을 향해 열린 식당(atrium)도 있었습니다. 물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하는 방이 더 고급스럽고 편안한 식당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이들 사이에 나뉨이 생긴 것입니다. 가진 자들은 일찍이 와서 비스듬히 누워서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곤 했던 것입니다. 일하느라고 일찍 오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그저 앉아서 먹는 식당에서 먹여야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서의 공동식사는 각자가 싸온 것을 풀어놓고 먹는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가진 자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싸가지고 와서 좋은 방에서 여유 있게 먹곤 했습니다. 게다가 거나하게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자연히 일하다가 늦게 와서 다른 방에 모여서 먹어야 하고 남아있는 것도 별로 없어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과 사이에 차별이 나타나고 그것이 파당이 되며 분쟁의 씨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만찬은 각자가 가져온 음식물을 한 자리에 풀어놓고 다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나누어먹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33절에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 배가 고파서 다들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할 사람은 아예 자기 집에서 미리 먹고 올 것이지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먹음으로써 시험 드는 사람 생기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이 본문 34절 상반절의 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교회라고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받는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성찬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신의 살과 피를 다 내놓으셨음을 기념하며 그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그와 연합하는 은혜의 예식 아닙니까? 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같은 믿음으로 함께 나눔으로써 다 같은 한 지체임을 확인하는 예식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찬식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이에 대한 믿음이며, 그 목적과 결과는 주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다른 지체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며 모두 하나가 될 때 진정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 없이 남들이 먹기 전에 아니 다른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혼자 배고프다고 먼저 식사를 끝내버리는 등의 이기적인 행동을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한쪽으로 소외감, 박탈감, 열등감 등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전해주신 성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며,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칭찬을 받을 교회이기는커녕 아예 교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쓴 것이 본문 20-22절의 말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사도 바울은 오늘의 두 본문 사이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라는 말로 시작되는 우리에게 익숙한 주님의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끼워 넣었습니다(고전11:23-25).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는 말 속에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성찬식은 지금 너희가 행하는 그런 성찬식하고는 다른 것이라”는 뜻이 무겁게 실려 있습니다. 

26절에서는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합니다. 주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입니까? 우리에 대한 사랑을 실현하는 죽으심이며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체들에 대한 사랑의 배려 없이 먹고 마시는 일이나 그래서 파당이 생기게 하는 행실들 가지고 주의 죽으심의 참 뜻을 어떻게 세상에 전하겠다는 것이냐고 힐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한 말이 27-29절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떡과 잔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흘리신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믿음을 고백하며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찬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깨우치려고 한 것은 신학적 의미 이전에 윤리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과 그것을 통해 이루려고 하신 하나 됨을 실천하며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이 합당하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랑 가운데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마시며 모두가 한 지체가 되는 것이 주님의 만찬이지 그런 사랑의 배려 없이 자기 배부터 채우려는 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며 그저 자기들의 죄 즉 이기적인 탐욕의 죄와 분열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고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모든 지체를 사랑으로 대하며 그러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성도들의 모임이 칭찬받을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교회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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