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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영광 (6)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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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영광 (6) (막 11:1-11)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눅 9:31).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일주일이 남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공개적으로 예루살렘 입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보라는 듯이 마치 개선장군처럼 입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유월절을 얼마 앞두고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개적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들을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사람들에게 자신은 절대로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칭송과 환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Ⅰ. 예언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의 영광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 시온의 딸 』, 『 예루살렘의 딸 』은 전全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실 메시야의 인격적 성품이 나타나 있습니다.

① 공의롭다고 했습니다. ② 구원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③ 겸손하다고 했습니다. ④ 나귀 새끼를 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군마를 타는 세상 왕들과 구별됩니다. 스가랴의 이 예언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마 21:1-9; 막 11:1-10; 눅 19:28-40; 요 12:12-15).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왕은 나귀 새끼와 관련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10-12절에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 나귀는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나귀라고 했습니다. 이 나귀는 일반적인 용도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구약적 율법에 기초한 것입니다. 

민수기 19장 1-2절에 『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Ⅱ. 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의 영광입니다. 

1) 그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십니다. 따라서 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존재할 그 어떤 피조물도 없습니다. 악하고 간악한 마귀도 그 앞에 순종해야 합니다(빌 2:9-11; 엡 1:18-20). 

2)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왕이십니다. 
본문 11장 2-3절에 『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는 메시야 곧 주님이십니다. 주로서의 예수는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할 수 있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즉시 이리로 보내라고 하시므로 예수 자신이 만물에 대해 절대 명령자이고 유일한 명령자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겸손한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겸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셨다는 데서 간과해서는 안될 몇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겸손했으니 우리가 얼마나 겸손해야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겸손하지 못하고 영웅적이거나 잘난 체 하거나 아는 체 하거나 지혜로운 체 하는 것 때문에 주의 영광을 가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겸손하셨으니 얼마나 가치 있고 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높아지는 방법이지만 교만은 필경 낮아지고 내침을 당하게 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29장 23절에도 말하기를 『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Ⅲ.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의 영광입니다.

본문 11장 7-8절에 『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 겉옷 』을 나귀의 등에 깐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 존경을 바치는 행위입니다. 군중들도 겉옷을 벗어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에 깔아드리는 동시다발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같은 행위는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군중들로부터 받은 존경과 환호를 한 사실에 대한 성취입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에 『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군중들이 환호할 때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2-13절에 『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고 했습니다. 
마가는 종려나무 가지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군중들이 밭에서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다고 증언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9-10절에 『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 『 호산나 』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국왕 만세! 할 때 God save the King! 이라고 합니다. 본래 이 문장에는 쉼표가 있습니다.
God, save the King! 이렇게 될 때 "하나님, 왕을 구원하소서!"라는 기도문이 됩니다. 그러나 쉼표가 없으면 존경이나 환호의 뜻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초막절에 시편 113-118편을 찬송했습니다. 

시편 118편 25-26절에 『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모든 사람들이 다 환영하고 존경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께 이 같은 환영 행사를 중지할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9절에 『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환영 행사 중지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시면서 누가복음 19장 40절에 『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반대자들에게 이같이 항변한 것은 자신의 메시야 사명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땅(돌)인들 어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침묵하면 무생물들이 자신의 메시야 사명에 대해 소리를 지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반역한 고라당을 향해 진정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의 탄원을 들으신 하나님은 땅이 입을 열어 그 족속 250명과 그들의 재물을 삼켜 버리게 했습니다. 

민수기 16장 30-35절에 『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 주위에 있는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며 가로되 땅이 우리도 삼킬까 두렵다 하였고 여호와께로서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 오십인을 소멸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이지러진 길을 행할 때 나귀의 입을 열어 책망하게 했습니다(민 22:2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대속의 죽음에 대해 성부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행하시는 일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잠잠하면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인이 의로운 동생 아벨을 살해했을 때 창세기 4장 9-10절에 『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창 4:11). 아벨이 흘린 피에 대해서 가인이 모른다고 하니 땅이 잠잠할 수가 없어 호소한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23절에 『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다른 피조물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 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통한 자기 동족의 구원에 대해서 로마서 9장 3절에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했습니다(요 15:1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요 15:13).

예수님의 사랑은 정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교권주의적 사랑이나 권위주의적인 외식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살리는 사랑입니다.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리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랑이 되었습니다. 조선조 19대 임금 숙종 당시 장희빈의 소생 세자(경종)의 가례嘉禮가 있는 해에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숙종은 세자의 가례보다 더 우선한 것이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숙종은 내탕고內帑庫(임금의 사재물을 넣어 놓는 창고)를 열어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남김없이 내어주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도성에 큰 솥을 걸고 죽을 끓여서 굶고 있는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먹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과 육을 살려주시는 참된 떡이며 참된 음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자기 백성을 죽기까지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중들의 영광 곧 오늘날 우리들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20절에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랑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죽음으로써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 사랑운동, 즉 교회운동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운동은 이런 이유 때문에 천하보다 크고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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