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넉넉하지 못한 축복 (왕상 17:1-16)

첨부 1


넉넉하지 못한 축복 (왕상 17:1-16)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변하는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변하는 것을 변하게 하는 것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변화를 선택하는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그리고 살려면 변해야 합니다.  변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변해야 하는 것도 시간과 때가 있습니다.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면 인생은 고난을 당하던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아픔입니다.  변화해야 할 때에 변화하지 않으면 기업이 무너집니다.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하지 않으면 부부가 깨어집니다.  나라도 지도자도 변해야 할 때 변하지 않으면 망하고 맙니다.  우리가 그런 일들을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끝없이 변화에 진입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때를 지나고 나서 "그 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그 때에 변했어야 하는데"라고 하지만 그때는 늦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변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변하면 내 가정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나라가 변합니다.  지금 우리는 변화의 목표를 잡고 그 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들 주위에 끝없이 인생을 기쁘고 즐겁고 활기차게 사는 사람을 보면 그들은 끝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사람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변화의 주체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내가 변해야 하는데 우리는 상대방을 향해서 변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변화하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러면 상대방도 힘들지만 본인 스스로가 더 힘들어집니다.

제가 어느 글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 나이 삼십이 훨씬 넘어서 결혼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늦게 결혼을 하면서 나름대로는 결혼에 대한 정보도 많고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인간에게 준비가 부족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결혼에 대한 준비이고, 또 하나는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대개는 결혼에 대해서 준비를 안하고 "그냥 하면 되겠지"하면서 결혼을 했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이 준비한 것은 결혼하자마자 "남편 개발 5개년 계획과 법칙"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자마자 그 계획과 법칙을 적어서 남편의 수첩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보니까 내가 고쳐야 할 단점이 얼마나 확실한지, 그것을 사명적 존재로 남편 앞에 서서 그 날부터 뜯어고치기 시작합니다.  7년이 지나고 애도 두 명이 생겼는데 남편의 얼굴에 웃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밝고 좋아하던 사람이 눈빛도 안 줍니다.  말이 적어졌습니다.  하는 일에 자신이 없어합니다.  모든 것을 부인에게 의지합니다.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점점 싸웁니다.  살기 싫어졌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래서 헤어질까 하고 몇 번을 생각하다가 담임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남편이 엉망입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요?"
"집사님도 엉망이 되세요."

이 분의 이야기를 보면서 미국에 유명한 부흥강사 목사님이신 빌리 그레이함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기자들이 모여서 빌리 그레이함 목사님의 사모님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사모님, 사실은 목사님이 신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남편을 저렇게 개발시켰습니까?"

기자들의 물음에 사모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정말 알고 싶습니까?  빌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고, 빌리를 사랑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 남편을 조그마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일보다 마음에 드는 일이 한 가지만 있으면 그것만 붙들고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했습니다.  내가 한 일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고, 사랑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절망과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사람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은 멀어집니다.  어느 순간엔가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심판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변화해야 하는데,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지 않는 상대방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심판자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에 대해서는 스스로 거룩한 변화를 시작해야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더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칭찬과 격려는 사람을 세우는 거름과 같습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를 칭찬하십시오.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를 품고 칭찬하기 시작하면 내 마음이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방에 대해서 변화를 요구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자신만 초라해 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시간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붙잡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붙잡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비천에 처할 줄도 알지만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  우리가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붙잡는 순간 우리는 모든 억눌림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너무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속에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 환경이 아닙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 속에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에 대해서, 그 일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싸워야 할 것은 내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입니다.  변해야 할 것은 환경이나 그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반응하는 내 마음의 상태입니다.

나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할 때마다 나는 날마다 풍요롭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의 심리에서 자유하십시오.  패배자의 심리에서 자유하십시오.  판단자의 심리에서 해방되십시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마음의 넉넉함을 누리십시오.  풍요의 심리, 너그러움을 마음 속에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혼자서 해야 하는 자신의 작품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자기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의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풍요로움이 철철 넘치는 넉넉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해방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삶의 여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체의 해방의 감격, 해방의 자유, 해방의 은혜에 잡혀 있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비하고 예비하신 더 큰 세상이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정치적인 암흑기를 경험해야만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종교적 타락의 시기를 경험하게 됨으로서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어둠이 절정에 달했던 역사의 황혼기라고 불렸던 암울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두가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암울한 시대, 모두가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에 한 사람을 역사의 무대 위로 끌어내십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어느 설교가는 엘리야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역사의 황혼기에 등장한 황혼의 별"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엘리야는 어느 날 갑자기 별처럼 등장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합왕이 살고 있는 궁전 앞에 서서 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앞으로 엘리야가 말하지 않으면 비도 이슬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가 오지 않을 때에는 이슬에 의지해서 농사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슬까지 끊어지는 끔찍한 비극이 수년 동안 이 땅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별처럼 갑자기 등장했던 엘리야, 그가 아합 왕 앞에서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재앙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난 후에 그는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별처럼 사라집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엘리야는 거기를 떠나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었습니다.  그가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쓰시고자 하시면 계속해서 아합 왕과 대결을 시켜서 승리하게 하실 일이지 왜 아합 왕에게 재앙의 메시지를 선포하기가 무섭게 그로 하여금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가 이 기분 나쁜 메시지를 선포한 다음에 이 소리를 들은 아합 왕은 몹시 감정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목숨을 노렸을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잠시 보호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숨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 말씀을 자세히 묵상해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생애를 통해서 잊지 못할 영적인 훈련을 제공하시려고 숨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8장 1절에 보면, 한 3년쯤 지나고 나서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여기에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이 있었습니다.  "숨어라"는 명령과 "다시 나타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이 두 가지 명령이 있었던 그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관심을 이 숨어있는 엘리야의 시간으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하나님이 엘리야라는 한 사람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말씀의 초점입니다.

본문의 3절 이하 4절부터 계속되는 명령을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의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먼저 4절에 명령이 나옵니다.  3절에 "숨어라"라는 말도 명령이지만 4절에 명령이 계속 됩니다.  "그 시냇물을 마시라."  그러니까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라"라는 명령을 듣자마자 엘리야는 즉각적으로 이런 반응을 보였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제가 거기에 가서 무엇을 먹고 삽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거기에 가서 그 시냇물을 마셔라."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만 마시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니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  "아니 하나님, 물만 먹고 어떻게 삽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이것은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다음 5절의 말씀은 엘리야가 어떻게 순종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엘리야가 갑니다.  왜 갑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 앞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이 한 가지 사실을 통해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즉시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들을 때에 내 마음 속에 감동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떻게 순종하는가?  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올바른 삶이 형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하나님께서는 그릿 시냇가에 숨은 엘리야에게 까마귀들을 통해서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십니다.  하루에 두 번씩 정확하게 이 까마귀를 통해서 공급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기적이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요구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자연 질서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양식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을 시작했을 때 성경은 말하기를 "이제 하늘에서 내려오던 만나가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늘에서 항상 만나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은 거기에서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왜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적을 꼭 행하실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행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성과 상식과 능력과 노동력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해결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처한 지금의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아침 저녁으로 공급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주시면서 음료수까지 같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마시는 물은 시냇물에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냇물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다 하시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사람이 해야 할 부분을 남겨 두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기왕에 떡과 고기를 공급하실 바에야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서 생수까지 공급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다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상적인 책임의 몫을 항상 남겨 두십니다.  "그것은 네가 해라.  그리고 나머지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러다가 드디어 엘리야에게 한 가지 시험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본문 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자신의 생명을 위해 의지하고 있었던 그 시냇물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냇물은 이미 말랐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라는 명령을 주실 때까지 엘리야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과 감동을 줍니다.  우리 같으면 다급해지면 그냥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분명한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분명한 것은 시냇물이 말랐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음 명령이 주어질 때까지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결코 고생의 자리, 고난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어쩌면 엘리야는 이 한 말씀을 자신의 삶의 모토로 붙잡았을 것입니다.  "순종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이냐는 사실보다 지금 이곳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 곳인가 라는 물음에 더 큰 관심을 쏟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분명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말라 가는 시냇물을 바라보면서 엘리야는 무엇을 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경제적인 시냇물이 말라져 가는 것을 눈으로,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건강의 시냇물이 말려져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질과 건강과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말라버려도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저는 오늘 추수감사절에 말씀의 제목을 "넉넉하지 못한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세상적인 눈과 판단으로 본다면 작년보다 금년이 더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남들처럼 넉넉하지 못한 삶의 자리에 서 있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하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때때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넉넉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야가 자기의 삶의 조건 속에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넘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예금 통장만을 의지하면서 당당하게 인생을 살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영적 축복을 놓쳐버렸을 것입니다.  그랬다고 한다면 그는 이름 없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누리고 있는 그 많은 것들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 인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면 그 건강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나에게 물질이 많아서 그것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벗하면서 호화로운 삶을 산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입니다.  그러나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혜가 모자란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가 있다면, 그 모자람과, 연약함과 허약함은 오히려 축복의 전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넉넉하지 못함" 속에 축복이라는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말라버린 시냇가에 앉아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그곳의 과부에게서 음식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아마 이쯤 되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릿 시냇가에서 고생한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이제는 드디어 나를 위해서 백만장자 과부를 준비하셨구나.  거기에 가면 나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고 편안하게 살 수가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까?  저는 얼마든지 가능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사람에게는 보상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삼년 동안 그릿 시냇가에서 얼마나 초라하고 궁핍하게 생활을 했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여인은 백만장자 과부가 아니었습니다.  옷은 남루해서 초라하게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약간은 실망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떡 한 조각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입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실망을 넘어서 절망입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 여인의 총 재산은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 그리고 그 남은 것을 먹고 죽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여인에게 나를 보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잘못 판단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엘리야로 하여금 이런 곳으로 보내셨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한 것은 엘리야를 향한 하나님의 훈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엘리야를 훈련시키는 목적은 눈에 보이는 환경을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 넘치는 물이 있었다면 그 눈에 보이는 넘치는 축복 때문에 엘리야는 한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렸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시냇물이 다 말라들었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괴로운 환경 때문에 엘리야는 다시금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에는 다시 사르밧으로 인도하십니다.  지독히 가난한 사르밧의 과부, 그래서 죽음을 기다려야만 하는 과부의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만약에 백만장자 과부의 집으로 갔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성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엘리야는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지도자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르밧이라는 지명의 이름은 '훈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훈련의 장소로 인도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훈련이었습니다.
"엘리야야! 너는 나만 바라보아라.  전능한 나 여호와만을 의지하거라!"

제가 앞부분에서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숨어라"고 하셨고, 나중에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향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역사의 무대 위에 드러내셔서 쓰시기 전에 엘리야에게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그 훈련의 목적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이나 세상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통에 있는 가루 한 움큼과 얼마 안 되는 기름을 엘리야가 의지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엘리야는 환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암담한 현실, 각박하고 메마르고 황폐한 이 현실을 넘어 저 건너편에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넉넉하지 못한 환경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넉넉한 것만이 반드시 축복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넉넉한 인생들이 자신의 창고를 자랑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때로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축복일 것입니다.  넉넉하지 못한 삶의 자리와 환경과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우리 모두가 넉넉하지 못한 이 삶의 자리와 환경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며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고백했던 이 말씀을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폭풍우와 비바람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때까지는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훈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