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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 (빌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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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 (빌 3:12-14)   

아인슈타인이 기차역에 나갔습니다. 들어가려고 표를 찾으니 없어요. 계속 찾으니 검표원이 말합니다. “박사님, 걱정 마세요. 유명한 분인데 그냥 들어가세요.” 그래도 여전히 찾고 있어요. “아인슈타인 박사님이 무임승차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믿습니다. 들어가세요.” 그의 대답입니다. “표가 없으니 내가 어디 가는지를 몰라서요.” 

여기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는 데 천재면 뭘 하나요. 사람들이 열심히 살지만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면 동물들과 뭐가 다른가요? 신자는 천국 가는줄 알지만 자신이 무엇을 목표로 사는지 모르는 분도 많습니다. 가는 곳이 분명하다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로 성취했는지도 알 수 있어요. 

1. 푯대가 삶을 강하게 한다 

불의한 재판장을 초라한 과부가 움직입니다.(눅18) 방법은 끈질기게 찾아가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의한 재판장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무언가 “이건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목적의식이 과부로 하여금 모든 멸시천대를 이기고 도전하게 합니다. 이게 있는 분은 복됩니다. 

미국에서 어떤 여자 분 간증입니다. 매일 6km씩 파워워킹 하는 이가 차에 받힙니다. 수술 여러 번 했지만 몸이 엉망이 되어 서 있기도 힘들어요. 물리치료를 2년이나 했는데 잘 걷지도 못해요. 어느 날 트레이너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목표를 세워요.” “목표 있어요. 잘 걷는 겁니다.” “아니, 아주 구체적으로 생생한 것으로요.” 

이런 몸으로 무슨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랴! 몇 달 후에 외동딸이 결혼을 합니다. 그때까지 온전해져야지. 피로연에서 춤을 추어야지. 엄마로 여자로 너무도 강력한 목표가 살아나옵니다. 물리치료 할 때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그 생각입니다. 자면서도 꿈을 꿉니다. 피로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도전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해냅니다. 

이렇게 성공하고 나니까 다음에도 도전할 내용이 나옵니다. 역시 아주 구체적으로 생생한 목표를 또 세우고 도전하는 겁니다. 그건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닙니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강하게 원하는 것을 향해 움직입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간절히 원하면서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정도의 막연한 목표만 있어요. 목표가 애매하니까 도전의식도 없습니다. 사실 목표라고도 할 수 없어요. 차사고 난 사람이 아픈 몸으로 막연히 “나았으면 좋겠다” 원하는 정도입니다. 과부가 막연히 재판에서 이겼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도 이길 힘은 본래 없어요. 목표는 이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2. 삶의 이유가 푯대를 만든다 

제 경험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생 때 한국에서 교수들이나 목사님들에게서 별 배움을 얻지 못했어요. “더 넓은 데 가서 공부해야겠다. 그래야 하나님의 일도 제대로 하지.” 이 소원이 미국유학을 목표로 잡습니다. 당시는 유학가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여권, 비자 받기가 별 따긴 줄도 모르고 토풀 공부부터 시작합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나선 겁니다. 과정도 너무 많고 돈도 많이 들고 위험도 많은데 삶의 이유와 목표가 바쁜 사람으로 만듭니다. 영어도 공부도 실력도 돈도 형편없이 약했지만 그래도 해냅니다. 밤에 네 시간 청소하고 교회 일 하고 과외로 별별 일을 다 하지만 햄버거 하나 살 돈도 없어요. 그래도 목표가 분명하니까 살만해요. 

목표의식이 이렇게 대단한 겁니다. 저를 일으켜 세워준 것입니다. 전부 5년의 세월이 흐르고 결국 지도교수들 전원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질문에 답하고 나니까 밖에 나가있으랍니다. 최종 결론입니다. 조금 있더니 들어오랍니다. 모두들 일어납니다. 손을 내밀며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김박사님.” 결국 목표가 이루어졌어요. 

행복했을까요? 여유가 없었어요. 다리에 맥이 풀리고 정신이 없습니다. 나를 지탱해 주었던 지주가 사라졌어요. 분명한 목표입니다. 그게 있으니 힘들지만 참을 수 있어요. 잠 못 자도 선생님에게 욕먹어도 다 이깁니다. 남루한 옷에 최하층의 삶을 살아도 별로 창피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박사학위는 종이 한 장뿐입니다. 이제는 뭘 해야 할지 몰라요. 목사가 선생해야 하나요? 졸업식까지 몇 달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의욕이 없으니 잠으로 보냅니다. 깨달았어요. 세상 어떤 목표도 다 이와 같다는 것을. 나를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답게 하는 참 목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학위도 고생도 다 복이 됩니다. 과정입니다. 


3. 영원한 산 목표를 세우라 

가장 위대한 삶을 산 바울, 그에게 푯대가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그의 앞에 있었습니다. 박사학위처럼 가보면 사라지는 목표가 아닙니다. 감옥에 가고 굶어도 힘을 줍니다. 대접받고 높이 되어도 거기 빠지지 않습니다. 낙심도 교만도 않고 참된 제자의 길을 감격으로 걷습니다. 바로 그의 목표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예수께 잡혔기에 그 목표가 보입니다. 예수께 잡혔기에 달려갈 힘도 생깁니다. 학위를 받고 높은 사람이 된다.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해진다. 모두가 과정입니다. 이미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 상 받기를 목표로 한다면 다 유익하게 쓸 수 있어요. 

어떻게 그런 목표를 얻느냐고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정해야 합니다. 삶에서 구체적으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강해집니다. 운동이건 취미건 사업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의욕이 생깁니다. 반드시 목표를 세우세요. 하지만 영원한 목표가 구체적으로 없다면 결국은 실망합니다. 무언가 확실하고도 영원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더 나은 부활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믿음의 수준이 있어야만 봅니다. 하늘의 별들이 다 아름다워도 그 영광이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지만 영원히 누릴 영광은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욕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 푯대를 항상 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마치 고교생이 목표하는 대학을 품고 공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삶의 모든 과정은 다 유익입니다. 예배와 헌신과 봉사, 특별히 전도가 영광을 줍니다. 또한 바울처럼 외로움과 가난과 병 심지어 모욕과 실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한 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다 유익입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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