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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 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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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 위에 세운 교회 (마 16:13-19)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비록 짧지만 그 속에는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에 대한 정의입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삼년 반의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분들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 분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대단한 호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같은 말에는 아무 대꾸도 않으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지구상에는 개신교와 천주교, 정교회를 통틀어 약 20억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신교인이 약 860만이고, 천주교인이 약 500만 명 됩니다. 그러니까 1300만 명 이상이 기독교를 신봉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인수가 아닙니다. 이 가운데는 지난날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개중에는 예수님을 위대한 선생으로 알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좋아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는 여러 가지 동기로 나올 수 있지만, 점차 올바른 신앙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이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이 진리를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이르기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님이시며 그리스도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며, 교회의 설립자와 주인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이 말씀이 특별히 중요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을 때, 이 반석이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로, 이 반석을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베드로란 이름의 뜻이 반석입니다. 그는 최초로 완전한 신앙고백을 하였을 뿐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그가 한 번 나가서 외치니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초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만 교회의 초석인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다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20절에 이르기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교회의 터라고 한 것은 그들이 전하여 준 복음의 진리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천주교가 사도 베드로를 교회의 유일한 터라고 하며 그가 천국열쇠를 맡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내세우기 위한 계략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성경은 물론이고 교회사를 살펴볼지라도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 된 사실은 전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같은 그릇된 가르침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성경적으로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1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유일한 터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일컬어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6절)이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8절)고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초석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이 교회의 기초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이 “반석”을 베드로가 말한 신앙고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성경적으로 타당합니다. 이때는 “내가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그 같은 신앙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뜻이 됩니다. 과연, 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말한 신앙 고백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이 신앙 고백을 무시한다면 교회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만약에 신자들이 이 신앙 고백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신앙 고백은 비단 사도 베드로의 고백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도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였으며, 초대 교회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설립자가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교파를 교회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어떤 교파에 속한 교회는 교회지만,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교파가 아니면 다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정죄하는 무서운 범죄 행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 교회가 어떤 신앙 고백을 채택하였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교회에서 복음의 진리가 올바로 선포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혹 보면, 장로교는 다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장로교는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는 종교가 아니요 국가의식이므로 해도 된다고 가결함으로써 한국교회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은 이단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교파는 종교개혁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빈이 어떤 교파를 세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는 장로교가 강하지만, 영국은 성공회와 감리교가 우세합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장로교가 우세하고, 독일과 덴마크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루터교를 믿습니다. 미국에는 하나님의 성회 교단이 가장 우세하고 그 다음이 남침례 교단이고 그 다음이 장로교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파나 교단을 교회의 자격으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오늘 상고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을 그 척도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교파나 교단에 속해 있더라도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그런 목사는 주의 종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할 때 진정한 교회로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교회를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나눕니다. 유형교회라 함은, 각처에 흩어져서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 지역이 다르고, 교파나 교단이 다를지라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구분을 초월해서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요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유형교회는 그 수준이 다 다릅니다. 어떤 교회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교회지만, 어떤 교회는 인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교회도 있습니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들입니다. 이 일곱 교회 가운데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으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받았고, 나머지 네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았습니다. 

이처럼 유형교회는 그 신앙 수준이 천차만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형교회에 소속된 신자들 역시 여러 수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가 있는가 하면,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신자도 있습니다. 소위, 알곡 신자가 있고 쭉정이 신자가 있는 것입니다. 지상 교회에서 때로 문제가 생기고 시험에 드는 일이 생기는 것은, 이 두 종류의 신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무형교회는 하나의 우주적인 영적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시대와 지역과 교파를 초월하여 진실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진실한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유형교회와 무형교회에 다함께 소속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인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형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소위 무교회주의를 표방합니다. 이는 성경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지상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파당을 짓고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곧 예수파,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가 있었습니다. 또한 윤리적으로 심각한 오류를 범한 신자들이 있었고, 은사에 대한 오해와 불협화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일컬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속받아 영적 교회인 무형교회에 소속된 것과 같이 지상의 유형 교회에 소속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 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오해를 살 만한 일도 생깁니다. 다른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 자신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신자는 교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근거하여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같이 교회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말해 줍니다.

첫째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이르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였고,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이 하나요 결코 나뉠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교회는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몸이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 이르기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하였고, 1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 소속된 여러 성도들이 저마다 역할을 맡아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여러 성도님들이 저마다 지체로서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구역장으로 봉사하며, 어떤 성도님은 집사로서, 어떤 성도님은 성가대원으로, 또 어떤 성도님은 주일학교 교사로, 그리고 어떤 성도님은 남녀 선교회 임원으로서 헌신합니다. 몸에 붙은 지체 가운데 쓸 데 없는 것이 하나도 없듯이, 우리 교회에 속한 성도님들 가운데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성도님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과거에 선진국 사람들은 맹장은 쓸 데 없는 지체라고 생각해서 아기를 낳으면 맹장 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맹장은 진화가 덜 된 부분이므로 수술로 제거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한 오늘에 와서 보니 맹장이 쓸 데 없는 지체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맹장은 소장에서 소화와 흡수가 끝나도 남아있는 수분과 염분의 흡수를 돕고 외부의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침입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면역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또 우리 발에는 각기 다섯 개의 발가락이 있는데, 그 중에서 쓸모없는 발가락은 하나도 없습니다. 엄지발가락은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러면 새끼발가락은 무시해도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새끼발가락 역시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새끼발가락이 없으면 우리가 바로 서 있거나 걷는 데 큰 불편을 느끼게 됩니다. 다섯 개의 발가락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저마다 존재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장 어리고 연약한 성도를 위해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지체된 성도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정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를테면, 우리 손이 무슨 일을 했더라도 그 결과를 손이 책임지지 않고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집니다. 손이 남의 물건을 훔치면 그 손의 임자인 그 사람이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손이 좋은 일을 하면 이 때에도 손이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그로 인한 결과는 우리 개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전체에 미치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이로 인해 교회에 유익이 될까, 주님께 영광이 될까를 먼저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선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비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시고 이스라엘은 아내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가리켜 유부녀가 다른 남자와 행음한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부를 데리려고 오는 신랑에 비유하셨으며, 요한계시록 19장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잔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처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유한 것은,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지극히 친밀한 사랑의 관계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신랑이요, 교회는 신랑인 그리스도만을 섬기며 그를 위하여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순수한 신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나 교회에 속해 있는 성도들에게도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를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주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성전은 지금도 계속해서 지어져 가고 있는 건물과도 같습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로 22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터전이요 모퉁이 돌이 되시며,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산 돌로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짓는 데 쓰임 받습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2장 5절에 보니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산 돌 곧 살아 있는 돌들입니다. 

혹 예배당 건물을 교회로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명이 없는 죽은 돌로 지은 건축물이 교회일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단체가 있고 회합이 있습니다. 어떤 단체이건 아무나 참여할 수 없고, 정해진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만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영예로운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보다 더 고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와 성도님들을 우리 교회의 지체로 삼아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주님의 칭찬만 듣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우리 각자의 신앙 고백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요, 성전인 교회의 지체로서 사랑과 충성으로 교회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에 순종하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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