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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준비된 헌물 (고후 9:1-5) -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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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헌물 (고후 9:1-5)
    
엊그제 금요일 웨일즈 스완지에서 검도 체육관을 열어 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안세혁 선교사님으로부터 이메일로 감사편지가 왔습니다.   얼마전 우리 여전도회에서 안 선교사님의 선교사역을 위해 약간의 선교헌금을 보내드렸는데 귀한 헌금을 감사하게 받았으며 그동안 체육관을 수리하고 부족했던 검도장 장비 구입에 잘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자매님들이 모은 회비로 여전도회와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면서 일부분 비축된 금액을 선교헌금으로 보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였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번 토요일에 열리는 남전도회 주관 선교기금 마련 바자회도 교우 여러분의 귀한 섬김을 통해 좋은 열매를 거두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당부했던 바울의 연보와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정신이 무엇인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연보 또는 헌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여 자원함으로 드리는 마음이며, 그 은혜를 나누는 마음은 물질을 나눔이라는 행동을 통해 실제로 보여진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드려진 물질이 하나님 나라의 선한 사업을 위해 쓰여질 때 이웃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모두에게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으로 나누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뿐 아니라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심고 거둘 수 있도록 씨앗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누는 사람과 위로를 받는 사람이 함께 경험하는 기쁨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어 일용할 양식을 삼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날마다 좋은 것으로 주심을 믿고 살아갑시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9장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준비된 마음과 자세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질 연보를 준비하는 고린도의 성도들을 칭찬하며 다시 한 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을 보면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 바랍니다’ 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2절에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했습니다.   

바울은 이 다음에 고린도를 방문하면 신실한 일군을 추천 받아 교우들이 모은 물질을 그들 편에 예루살렘으로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내용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으니 그사이 바울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고린도의 성도들은 벌써 1년 전부터 이 선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칭찬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렇게 일찍부터 준비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열심은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의 성도들과 함께 고린도에 갔을 때 바울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것과는 달리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고린도의 성도들은 물론 바울과 또 함께 간 사람들이 피차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직한 사람 디도와 또 다른 형제들을 먼저 고린도로 보내어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고 또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5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으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렇게 준비하라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 주일 첫날에 연보를 드려 저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 주일 첫날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였던 주일예배를 말합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여 얻은 수입의 얼마를 떼어 주일에 모일 때마다 헌금하여 예루살렘에 보낼 연보를 저축하게 했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면 그동안 저축해 놓은 물질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거액의 헌금을 모금해야 할 부담도 덜어질 뿐 아니라 갑작스런 헌금을 드리는 일로 교인 중에 누구라도 마음에 시험 들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헌금을 할 때마다 그 물질을 받게 될 예루살렘 형제들을 생각하며 마음으로 교제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연보가 참 연보답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참과 억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하지만 어떤 헌금은 참 헌금답고 어떤 헌금은 억지가 될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이 말씀에 얼마나 주의깊게 반응하며 또 실천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헌금봉투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들이 헌금봉투를 사용합니다.   봉투를 사용하는 것은 미리 준비하자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떤 분은 헌금을 드릴 때 지폐를 사용하고 어떤 이는 동전을 드리기도 합니다.   깨끗한 지폐가 있는가 하면 많이 사용하여 낡아진 지폐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동전 소리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릴까 신경이 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마음이 중요하지 얼마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나 자신이 불편합니다.  

혹시라도 고액권을 드리는 사람과 동전을 드리는 사람의 인간적인 마음이 드러난다면 좋은 헌금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있을 때 어떤 분이 지갑에서 고액권을 꺼내어 보란듯이 헌금 주머니에 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성전의 헌금궤 앞에 앉아 헌금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셨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부자들은 헌금궤에 쩔렁쩔렁 소리를 내며 많은 돈을 떨어뜨리고 들어갔습니다.  자랑스럽게 날 보란듯이 헌금했다 그말입니다.   그걸 꼭 사람들에게 드러내야 합니까?  그래서 헌금하는 돈이 눈에 보이는 것이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 봉투를 사용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봉투를 사용하는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헌금시간이 되어 갑자기 지갑을 꺼내거나 호주머니를 뒤적이다 손에 잡히는 것을 즉흥적으로 드리는 헌금보다는 예배 전에 미리 준비한 헌금이 참 헌금답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억지로 하지 않는 헌금이 됩니다.   교회 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 봉투에 담아온다면 준비하는 마음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헌금봉투는 예배당 들어오실 때 받아 사용해도 좋지만 가능하면 집에 가져갔다가 교회 오기 전에 준비된 헌금을 담아오시는 것이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진 것 중에 가장 깨끗한 돈으로 골라두었다 헌금으로 드리기도 합니다.   은행에서 빠빳한 신권을 바꾸어 드리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다리미로 한장씩 다려 깨끗하게 펴서 헌금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 생각됩니까?   똑같은 돈이지만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드리는 나의 감사와 신앙고백이 담겨있기에 헌금을 아무렇게나 다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헌금봉투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구별하여 두었다가 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레위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짐승들은 흠이 없는 정결한 소와 양이나 염소였습니다.   흠이 없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 먼 것이나 상한 것,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 괴혈병이 있는 것이나 비루 먹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릴 짐승의 첫 새끼를 따로 구분하였고, 가진 것 중에 가장 건강하고 흠이 없는 짐승을 제물로 구별하여 두었다가 성전에 올라갈 때 가지고 갔습니다.   여기에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짐승을 보면서 자기의 죄를 생각하였고 그 짐승이 피 흘려 죽음으로 나를 대신하여 희생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헌물의 참된 정신입니다.

구약 말라기서를 보면 헛된 제물을 드리던 백성들과 제사장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한 책망이 나옵니다.   책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멸시했다는 말일까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 제단에 더러운 떡을 드렸고 눈 멀고 병들고 절룩거리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어제 드렸던 떡, 아니 몇일 전에 드렸다가 물린 곰팡이 나고 쉰 떡을 다시 제단에 올리며 ‘날마다 드리는 이 제사가 참 귀찮구나’코웃음치고 남의 것을 도적질한 물건과 병든 것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러고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 너희가 내 단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0)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의미와 정신을 깡그리 잊어버렸고 고의로 무시했으며 제사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드리는 형식적인 행사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그 이름을 멸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습니까?  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3:9, 10)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타락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면서도 도리어 큰 소리를 치던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와 함께 깨끗한 헌물을 드리는 사람에 대한 복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못된 짓 다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이 십일조와 감사의 헌물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것이 하나님께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고 도리어 영광을 가리우는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배경을 생략하고 무조건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면 복을 쌓을 곳이 없이 주신다는 말씀만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귀찮지만 할 수 없이 드렸고 성한 것을 드리기 아까워 병들고 상한 짐승으로 드렸습니다.  품꾼의 삯을 주지 않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만들어 모은 부정한 돈, 도적질한 돈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정직한 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온전한 헌물을 드리지 않으면서 도리어 방자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도 큰소리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부터라도  정직한 헌물을 드려보라,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정직한 마음으로 헌물을 드려보라 그러면 너희가 복을 받지 않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느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당연한 의무를 강조하시는데, 사람들은 더 큰 복에 관심을 둡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드리는 헌물의 정신은 은혜에 대한 감사고백과 그 은혜를 실제로 나눔에 있습니다.  복을 많이 주시고 덜 주시며 주시거나 거두어 가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은혜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돌릴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각자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즐거이 드리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으면 넉넉하게 드릴 수 있고, 형편이 어려우면 형편에 맞는 헌금을 드리면 됩니다.   그래야 인색함이나 억지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물 중에는 소나 양처럼 큰 제물도 있지만 그런 것을 드릴 힘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드리게 하였고 그것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을 위하여 고운 가루를 가져다 드리게 하셨습니다(레5장).   소와 양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개인의 형편을 따라 누구나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시는 배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르치신 헌물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싫어하셨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타락하면 그 제물도 부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제사의 목적과 방법이 부정하면 그 제물도 부정했습니다.   헌금의 목적과 방법이 부정하면 역시 그 물질도 부정한 것이요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용되는가 또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에 있는 것으로 받으십니다.  작은 것으로도 부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시며 가난한 자의 깨끗한 헌물을 선한 일에 크게 사용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 드리기 전에 미리 준비한 헌금이 하나님께 즐거운 드림이 됩니다.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아직 준비하지 못하고 드리는 분들이 있었다면 다음 주일부터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주일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에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준비하는 것처럼, 예배자로서의 마음가짐이 훨씬 단정해지고 감사의 고백도 보다 구체적이 될 겁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충만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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