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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곤고한 날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 (시 4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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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날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 (시 42:1-11)
   
이 시편 42편은 “고라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시편42편과 시편 43편은 대다수의 히브리어 성경 사본에서 한 편의 시로 묶여 있습니다. 시편 43편도 내용으로 보면 42편과 같은 주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42편과 43편이 하나의 시라고 합니다. 시42:1-5이 첫 번째 단락인데, 1-4절은 애가, 탄식시이며, 5절이 후렴구입니다. 6-11이 두 번째 단락인데, 6-10절이 애가 즉 탄식시이고, 11절이 후렴구입니다. 43:1-5이 세 번째 단락인데, 1-4절이 애가- 탄식시이고, 5절이 후렴구입니다. 

후렴구를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인데, 42-43편에 같은 말씀이 세 번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후렴구가 결론이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이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고 했습니다. ‘마스길’이란 말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교훈적인 시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경건한 시인은 곤고한 나날을 보내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42편을 개정역으로 여러 번 읽어보았고, 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개정역으로도 읽어보았습니다. 여러 다른 번역성경으로 보면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고, 더 깊이 다가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성경으로 다 읽어드리지 못합니다. 1절만 가지고 다른 성경으로 읽어봅니다. 

1절, 개정역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새번역입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공동번역개정역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느님, 이 몸은 애타게 당신을 찾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개정역으로 한번 읽었으면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고, 공동번역으로 읽어보면 더욱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은 히브리 성경에 따라 고라자손의 시로 분류하고 있는데, 개혁교회를 이루신 존 칼빈은 이 시를 다윗의 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에 다윗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고라자손의 시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존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두 장에 걸쳐 이 시가 다윗의 저작임을 주장하면서 여러 다른 시들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도망가야 하고, 성막에서 멀어지게 되었을 때에 지은 시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으로 보면 그런 주장도 충분히 가능한 주장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런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고, 고민도 없이 평안하게 사시는 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런 장로님의 집 같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집에도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살만해지니, 건강에 적신호가 켜집니다. 노후를 대비하여 근근이 절약하면서 모아둔 돈인데, 그만 투자에 실패하여 하나도 건질 것이 없어집니다. 자식들을 키울 때 정말 애지중지 키웠는데, 늙어가는 부모가 짐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지, 노후에 모시겠다고 나서는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갑니다. 이제는 그만 살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외로워집니다. 인생의 곤고한 날이 찾아왔습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정신분석을 주장하는 시그문드 슐로머 프로이드((Sigismund Schlomo Freud, 1856. 5. 6- 1939. 9. 23) 박사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요, 철학자이며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기제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였습니다. 정신병자를 치료하는데 대화를 통하여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억압상태를 치료하므로 새로운 치료방법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의 성욕을 인간 생활의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롭게 정의한 사람입니다. 

프로이드는 뇌성마비를 연구하고, 자유연상과 감정전이의 이론, 꿈을 재해석하는 등등. 그의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현대에 오면서 학자들이 프로이드의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고 있습니다. 더욱 심리학 분야가 발전하면서 그의 이론에 여러 결함이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그의 방법이나 주장은 정신의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그의 학설은 인문 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훌륭한 철학자요, 유능한 의사였지만, 심장박동이 불규칙한 것을 발견한 담당 의사가 프로이드에게 지나친 흡연을 중단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중단하였지만, 다시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는 턱뼈암으로 무려 35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고통을 당하다가 마침내 아래턱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습니다. 정신의학의 아버지라는 찬사도 담배 연기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생은 평안이 없습니다. 참으로 곤고합니다. 함께 운동하는 한 분이 고위공무원으로 은퇴하고 친구들과 등산도하고 운동하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가 73세인데, 옆에서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청력이 완전히 소멸되면서 겨우 보청기에 의존하는데, 운동하다보면 보청기를 끼는 것이 불편하고 뛰다가 빠져서 땅에 떨어지면 고장이 날 수 있고, 밟을 수도 있으니, 보청기를 빼놓고 운동합니다. 그러니 옆에서 크게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건강할 때는 호탕한 사람이었는데, 점점 폐쇄적이 되고, 소심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의 부인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함께 운동하는 분 중에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신 85세 되신 분이 계시는데 그는 지금도 펄펄 날아다니면 삽니다. 그런데 그의 고민은 그의 부인- 할머니가 암수술하시고, 움직이지도 못하니 간병인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생은 참으로 곤고합니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설교자인 찰스 해돈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온하고 독실한 목회자 가정에서 신앙 생활을 하던 스펄전은 어린 청년 때부터 명설교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얻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힘 있고, 신학적이며, 감동 깊은 설교는 “설교의 황제”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27살의 나이에 메트로 폴리탄 태버나클 교회에 담임목사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이 예배당이 무려 6000석이나 되었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온 성도들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강단에까지 올라오고 통로에 서서 예배드리는 사람들까지 1만명의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3500여편의 설교를 한 번도 중복해서 설교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설교의 대가였고,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스펄전 목사님이 주기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런던의 날씨가 침울하고 어둡기 때문에 1년 중 한 두 달은 날씨 좋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에 가서 요양해야 했습니다. 목사님이 한 성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완전히 부서진 질그릇처럼 느껴집니다. 많은 밤을 자지 못하며 낮에도 눈물을 흘리며 지내고 있습니다.” 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렇게 영력 있는 목사님이신데, 왜 우울증에 빠집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목사님도 우울증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이란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영력이 있고, 잘 믿는 것 같아도 때로는 낙심에 빠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 것이 찾아오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간입니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언제 어떤 병에 걸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믿음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질병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병에 안 걸린다는 말은 이론적으로 맞는 말 같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아도 병에 걸립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제는 늙고 병들 일만 남았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중에 탈진상태에 빠졌습니다. 엘리야가 유다의 브엘세바에서 광야로 들어가는데 하룻길쯤 들어갔습니다. 도망 다니다 보니 지쳤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죽기를 간청하면서 말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왕상19: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이라도 해도 탈진상태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도 신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심한 우울과 침체에 빠지고 탈진할 때도 있습니다. 인생이 완전히 바닥을 모르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이런 고통을 알고 계시는가? 내가 이렇게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시는가? 나의 간구하는 음성을 듣고 계시는가? 회의감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 같고, 나의 모든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잘 살고 건강하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시는 지도력이 있고, 존경을 받으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우리를 보면서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너의 하나님이 어찌 되었느냐” 하면서 비웃고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습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런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인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사슴,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아나섭니다. 시냇물 바닥에서 조금의 물이라도 찾으려고 헐떡이듯이 갈급하게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혹독한 가뭄이 계속되는 중에 대지가 온통 갈라졌습니다. 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사슴이 기억을 더듬어 시냇가에 왔지만, 그 많던 물이 다 사라지고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갈급한 모습처럼 시인의 영혼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성전에 나아갈 형편이 안 되지만, 곧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를 소원합니다.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우리에게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스럽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흔들어 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살고자 하느냐 하나님을 찾아와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찾아오신 것 맞습니까? 주일을 지키고, 교회를 찾아 나온 정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오셔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당에 찾아오셨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왔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냇물 바닥을 헤매는데, 헐떡거리며 갈급해 찾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 떨리지도 않습니다. 감히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떨림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따라갈 것입니까? 

요즈음 결혼시절입니다. 나이가 좀 먹은 처녀가 있습니다. 나이가 30이 넘어갔습니다. 이제 40이 다 되어갑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통사정합니다. “야, 너 따라다니는 그 청년에게 가거라. 제발 가거라 응.. 내가 사정하마.” 엄마가 딸에게 결혼하라고 다그칩니다. “엄마, 아무런 떨림도 없는데, 필이 꽂히지 않는데 어떻게 그를 따라가라는 거예요” 결혼하는데, 감동이 있어야 하고, 필이 꽂혀야 딸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감동이 없다면 되겠습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감히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니,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감동이요, 감격이고 세상에 없는 축복입니다. 세상에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가 되시다니... 

지금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다면... 그는 세상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정욕으로 인생의 목적을 삼으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할 때에, 믿음으로 산다는 하면 빼내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덧셈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에 복을 받고, 넘치는 복을 받고 또 받고, 대대손손이 먹고 남을 것으로 쌓아 두고, 또 쌓아두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더하기가 아닙니다. 빼기입니다. 지금까지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려고 하면 빼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곱셈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누기입니다. 나의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고 흩어 섬겨야 합니다. 모자람의 은혜가 진정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 만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하는데, 찾아 만나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자리를 비우게 하십니다. 날마다 잔치요, 날마다 산해진미로 먹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면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형편을 두시려고 하십니다. 환난 날이 와야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가난하여야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으니, 사실 곤고한 환경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다윗은 부족함의 은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23:1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함의 은혜도 진정한 은혜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저는 많은 사람을 알고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참으로 좋은 사람으로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믿음이 좀 있는 사람인 것도 같고,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도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가정을 흔들어보고, 자존심을 건드려보니 하나님도 없고, 자존심만 남아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집단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의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내버려두십니다. 알곡은 안으로 안으로 모여들지만, 쭉정이는 훨훨 바람에 날려 불구덩이로 내려갈 것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실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가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갈급하게 사모하는 사람을 소중하게 보십니다. 

어디에서 처음 사랑이 떨어졌는지,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오늘 시42편의 시인은 전에 감격스럽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수많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습니다. 

5절의 말씀과 11절의 말씀은 후렴구요, 결론적인 교훈의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절망에 이르러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에게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환난 날에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출구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심경이 괴롭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하여 괴로워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요, 다시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역대하16:9에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렘29: 12-13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아주 은혜롭게 부른 성가가 ‘목마른 사슴’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예전에 이 “목마른 사슴”라는 복음성가를 참 많이 불렀습니다. 이 달의 복음성가로 부른 노래들을 잘 익히시고, 집에서도 많이 부르시면서 은혜 받아야 합니다. 찬송은 제사입니다. 


1)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 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2)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 주신 주/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이 곡은 Martin J. Nystrom 이란 분이 쓰셨는데, 이 분은 성시를 쓰고 작곡하는 음악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선하신 목자 날 사랑하는 분” Martin J. Nystrom 이란 분은 수많은 곡을 지었습니다. 


1-2절을 부르고 마치려고 합니다. (악보 PPT)


   음악이 가진 힘이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가곡이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음정과 박자, 운율을 통하여 가사가 감동적으로 전달됩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시고, 하나님이 있어 행복하고, 하나님 때문에 떨리는 감격으로 살아가시고, 남은 생애 모든 날에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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