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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외감 (시 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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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감 (시 25:12-14)

올림픽의 꽃이라면 지구상의 가장 빠른 사나이를 결정하는 100m 경주를 들 수 있습니다. 금년 런던 올림픽에도 우사인 볼트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볼트가 400m 경주에 참여하였더라면 우승을 할 수 있었을까요?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단거리와 중거리는 달리는 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라는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 때의 실화를 배경으로 만든 것으로 1981년에 나왔을 때 아카데미상을 네 개씩이나 탔습니다. 주인공은 Eric Liddell인데 선교사 부모로 인해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육상을 포기하고 다시 중국에서 선교를 하도록 끊임없이 애원하는 여동생 때문에 갈등을 겪었습니다. 하루는 리델이 달리는 훈련을 하다가 교회 기도회를 빠지자 여동생은 리델이 하나님께 제대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때 리델은  “하나님은 내게 한 가지 목적을 주셨다고 믿어. 그분은 내게 빨리 달리게 하셨어. 내가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리델은 몇 년 동안의 고된 훈련 끝에 드디어 100m 경주 영국 대표로 올림픽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파리로 가는 배안에서 자신의 출전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알고 갑자기 출전을 포기합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영국의 왕세자가 설득하고 영국 올림픽 위원회가 출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지만 리델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영국 언론은 리델을 국가의 명예보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이때 리델의 동료인 Andrew Lindsay가 자기 대신 다음 주 목요일에 있는 400m 경주에 출전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합니다. Linday는 이미 400m 장애물 경주에서 은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리델은 100m 예선이 열리는 주일에 파리에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이사야 40:31을 인용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리델이 400m 경주에 출전하기 전에 미국 육상 코치는 자기 선수들에게 리델이 자기의 주종목이 아닌 400m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기 직전 미국 선수인 Jackson Scholz가 리델의 손에 메모 하나를 쥐어줍니다. 거기에는 삼상 2:30의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리델은 예상을 뒤엎고 쟁쟁한 미국 선수들을 물리치며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느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 리델은 “처음 100m는 내 힘으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달렸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리델은 그 후 중국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1945년 그가 죽었을 때 온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애도했습니다. 리델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시고 이기게 하였습니다. 그의 경주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리델은 진정 예수님의 흔적을 남긴 자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경외는 입술의 구호요 여전히 내 중심으로 살아가십니까? 예배시리즈 5주차가 되었습니다. 이번 주의 주제는 경외감입니다. 이번 기회에 예배의 자세에 경외감을 더함으로 드리는 예배마다 깊이를 더해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어떤 위대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칭송할 때 그 사람의 이름을 칭찬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섭리주이시며 구원주이자 심판주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으며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 삶에 의미를 주시는 분이요 영원한 삶과 죽음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호흡 있는 것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해야 하며 그 이름에 대해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 99: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예배하고 섬겨야 할 대상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거나 취할 수 없습니다. 설령 천상이나 지상에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그분이 누구신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그 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시편 25편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 복은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삶에 임하는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1) 택할 길을 아는 복(12절)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느 학교를 가야하고 어느 직장을 구해야 하고, 어떤 배우자를 구해야 하고,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 “순간의 선택은 영원을 좌우한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선택 중에 가장 중요한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선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선택은 우리가 한 것 같지만 실상 우리의 뒤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기도, 말씀, 사람이나 상황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깨우쳐 주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십니다. 

2) 영혼이 평안을 누리는 복(13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에 평안하고 의인들의 자손은 땅을 물려받는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7절에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은 ‘하나님을 향한 확신 속에서 얻는 고요함과 안전함과 건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확신함에서 얻는 진정한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 

3) 언약 속에 사는 복 (14절)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언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 때 이스라엘은 언약에 기록된 대로 복을 받습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호소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당연히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를 친밀하게 대하십니다. 여기서‘친밀함’은 언제든지 격의 없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친밀한 사람 사이에는 아무 때든 만나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언제나 그들과 의논의 상대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성     

다윗의 평생의 소원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그러나 이스라엘 땅에 아직 shalom이 임하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지으려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성전을 지을 수 없는 것이 섭섭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다윗의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대상 29:1).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는 이유는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대상 29:5)하며 성전 건축에 동참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먼저 자기 소유의 금은을 바치자 백성의 리더들이 다윗을 따라 즐거이, 전심으로, 자원하여, 정직하게 드립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백성이 또한 성심으로 즐거이 예물을 드립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즐거이 드리는 모습을 지켜본 다윗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대상 29:11). 

다윗의 찬양 속에 세 가지 고백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을 가지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밝히는 것인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초월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어휘들을 나열합니다. 

둘째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참 주인이시고 우리가 가진 것이 다 주께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 나라의 왕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대 왕권 사회에서 한 나라의 모든 것은 그 나라 왕에게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14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분의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뿐이지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나를 통하여 어딘가에 쓰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부요하신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신 만물의 머리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며, 자신의 뜻 가운데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능력의 신이십니다. 다윗은 모든 자를 크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 손에 달려 있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아침부터 밤까지 뛴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 ...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시 97:6,9) 예배자는 초월자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감이 필요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능력, 경험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틈틈이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분의 위대함을 겸허한 마음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일주일의 하루인 주일은 그분 앞에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고 묵상하고 경배하고 높임으로 그분의 임재와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구원과 회복, 평안과 치유를 경험합니다.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

오늘날 예배가 너무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히 음악스타일만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80년대 시작된 예배의 변화가 결국 의식의 변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변화까지 가져왔습니다. 80년대 찬양운동은 엄격한 예배의식에서 생동감 있는 찬양으로 전환되면서 예배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경우 예배에 대한 기대감이나 자신을 추스르고 하나님을 경외할 여유도 없이 교회에 오자마자 바로 예배에 참여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의 품격, 진지함, 경외감이 약해집니다. 예배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자칫하면 ‘나의 필요’, ‘내 공허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추구하다 보니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모세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상)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이 친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친구 같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하)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는 개념 자체가 귀합니다. 그러나 친구도 친구 나름입니다. 인간의 친구와 하나님의 친구 되심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동년배 친구와 경륜과 지혜가 있는 할아버지 친구와 다르듯이 우주만물의 창조주 친구는 인간적인 친구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관계입니다. 그분은 원래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하늘 보좌에서 말씀 한 마디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나 같은 존재를 친구 삼으신 것이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만듭니다.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의에 따라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르바 던은 지적합니다. “우리 예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노를 균형 있게 제시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자비와 사랑처럼 편안한 부분에만 일방적으로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무한한 위엄을 가진 분이 아니라 단순히 어디에나 계시는 ‘친구’나 ‘형제’로 축소되지는 않습니까?” 

어떤 예배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 내재성, 친밀감과 함께 그분의 거룩성, 초월성, 경외감에 대해 균형 있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인도자나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 모두가 예배 가운데 이 부분에 실패할 때 우리의 예배는 저급한 사랑 타령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존경과 두려움이라는 복합 감정

경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레’인데 ‘두려워하는’, ‘경외하는’의 의미를 가집니다. 존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공존하는 것, 그것이 경외감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 

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갖고 있는 양면성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공경합니다. 두려워하면서도 그분의 한없는 사랑을 알기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뜨거운 사랑과 깊은 존경심이 교차하는 경외감으로 예배드린 경험이 있습니까? 

두려움만 있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두려움만 주는 신은 참 신이 아닙니다.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렘 30:10)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흩어진 땅에서 이끌어 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다시 인도하실 것과 그곳에서 태평과 안락을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우리가 주변 상황을 인하여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품어야 할 마음은 존경심과 두려움의 복합감정인 ‘경외감’입니다.


경외감의 극치는 십자가 

하나님의 초월성도 경이롭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도 경이롭습니다. 그런데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한 인류구속 사건이 훨씬 더 경이롭습니다. 경외감의 극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주의 왕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렇게까지 고통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한 괴로움 속에서도 잠잠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분은 말 한마디로 십자가 선고를 바꾸실 수 있습니다. 자신의 피 한 방울이면 온 인류의 죄를 사하고도 남을 분이십니다. 그런데 쉽고 편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온 몸에 채찍을 맞으셨고 살을 찢기셨습니다. 군중들 앞에 벌거벗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돌아가시던 순간은 하나님마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깊고 친밀한 관계가 창조 이전부터 단 한 순간도 단절된 적이 없으셨는데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처절한 상황에서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육체적으로 완전히 죽었던 몸이 다시 사셨고, 단 한 번의 골고다 피 흘림으로 인류구속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자주 듣다 보니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종교적 교훈, 역사적 기념사건, 아니면 목걸이 장식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세상의 어떤 죄성도 그 영향력도 힘을 잃게 만듭니다. 약이나 식물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의 약효는 2000년이 지나도 여전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주시는 역사는 오늘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예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는 자주 죄에 빠집니다. 그러나 죄를 지어도 의인으로 짓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백하면 됩니다. 구약의 제사는 단회적인 씻음입니다. 죄를 씻기 위해 매번 제사드릴 때마다 피를 흘립니다. 그러나 신약은 단 한 번의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피 흘림의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비는 단지 죄 사함의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21세기를 사는 내가 2000년 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예수의 부활하심을 힘입어 나도 의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아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경외는 경배의 뿌리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주의 집, 성전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풍성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없이는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보혈의 공로 없이 감히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시인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해 경배한다고 합니다. 경배하는 마음의 깊숙한 곳에 경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경외감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합니다. 

‘경배’라는 단어는 자주 찬양과 연계해서 사용됩니다.  밥 소르기는 찬양과 경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지만, 그분이 진정으로 찾으시는 것은 예배자입니다. 둘째, 찬양은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행위이고, 경배는 하나님과 주고받는 친교의 행위입니다. 셋째, 찬양은 외향적, 회중적인 반면 경배는 내향적이고 개인적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칭찬할 때 경배로 하나님의 성품을 예배합니다. 경배는 예배의 더 깊은 단계라는 점입니다. 즉 경배는 너무나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데 초점을 둡니다. 따라서 찬양과 경배의 시간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표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찬양과 경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시록 7:9-10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궁극적인 지향점인 ‘천상 예배’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분 백성의 이마에 인을 치셨습니다. 인을 치셨다는 것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인 치심은 주님이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왕으로 고백한다면 인침 받은 증거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주님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인침 받은 또 다른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합니다. 즉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 속한 자들로부터 모여든 자들로 구성됩니다. 이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찬양합니다. 흰옷은 어린양의 피로 씻음을 받아 깨끗하게 된 자의 옷입니다. 

이들은 구원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에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 것처럼 주님을 인한 승리와 구원을 축하하고 경배합니다. 큰 무리가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의 완성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면서 구원의 하나님께 찬양으로 나아갔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례자들로서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날마다 천국의 소망을 품고 찬양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의 귀가 열려져 찬양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고통 앞에서 찬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찬양을 다시 부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육신의 문제, 재정상의 문제, 관계의 문제 등등 환경을 보아서는 도저히 노래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으로 인하여 우리부터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감격 속에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존경하는 이 경외의 태도는 오늘 우리 시대의 참을 수 없는 예배의 가벼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십자가 사건과 보혈의 신비는 묵상하면 할수록 더 큰 경외감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깊이 있는 예배를 경외감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의 대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찬송의 대주제 역시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복음 구원 진리의 사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찬송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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