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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께로 가는 길 (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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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로 가는 길 (요 14:1-6)                                                   


아버지께로 가는 길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4-16장은 흔히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대중 설교가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행하신 유언적인 교훈들입니다.  내용은 주로 주님과의 관계, 장차 다가올 일들, 성령 강림을 비롯한 영적 세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14장 서두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 (Mh; tarassevsqw uJmw'n hJ kardiva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근심하다”는 말은 물이 출렁이는 모습입니다.(5:7) 이때에 제자들의 마음은 파도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며, 그들이 바라던 주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집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의 삶은 또 어떻게 됩니까?  이런 저런 근심이 파도처럼 몰려왔습니다.  
  
오늘 나의 근심은 뭡니까?  제자들의 근심을 그래도 고상한 근심입니다.  주님을 잘 따르려는 근심이요, 주님의 일을 하려는 근심입니다.  오늘 우리의 근심은 신앙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이 더 많습니다.  120세를 살았던 모세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의 年數가 기껏해야 70이요 건강하면 80년인데, 그나마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듯 사라집니다.”(시90:10)  

산다는 것이 덧없을 뿐 아니라, 그나마 수고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살이를 ‘108 번뇌’로 표현합니다.  주님은 의식주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근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  

오늘 나는 무엇을 근심하고 있습니까?  신앙 문제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입니까?  
  
어떤 근심이든지 근심하지 마세요.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일단 근심을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근심이 눈에 보이나요?  마음에 붙어 있는데!  그래도 우선 암 덩어리처럼 마음에서 떼어내세요.  소유하지 말고 처분하세요.  그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세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다음 명령은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근심의 해답은 믿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근심을 매장하는 첫 번째 해답이고, 유일한 해답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고 또 별도로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수님께 대한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의 강조점은 오히려 “나를 믿으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예수님은 사람의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눈에 보입니다.  먼저 보이는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믿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믿지 말고, 돈 믿지 말고, 재수나 운수 믿지 말고, 별 볼일 없는 지식이나 경험 믿지 말고, 자기 재주 능력 믿지 말라는 거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세요.  그러면 근심의 뿌리가 뽑힙니다.  
  
믿음은 의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으세요.  주께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시점은 정말로 믿음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 유다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주님을 믿지 못해서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 했습니다.  도마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의심하면서 근심에 빠졌습니다.  이런 때에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아무 거나 믿으면 안 됩니다.  믿을 만 한 대상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믿으세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근심을 버리고, 주님을 믿고, 그 다음은 비전입니다.  우리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2)  주님은 아버지지 집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이 어디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장차 세상을 떠나서 들어갈 하나님 나라, 즉 천국입니다.둘째는 예수님을 통해서 있게 될 하나님의 품입니다.  지상에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지 공통점은 주님과 함께 산다는 점입니다.  땅에서 근심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의 거처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품에 살려고 하세요.  아버지 집은 나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아버지 집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동물에게는 回歸的 本能이 있습니다.  제비나 기러기는 철이 되면 자기 고향을 찾아 갑니다.  아무데나 다니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전에 머물던 곳을 찾아갑니다.  뭍을 떠난 뱀장어나 연어는 대양으로 다니다가 수년이 지나 성어가 되면 고향을 찾아 돌아옵니다.  오는 길목에서 잡혀 죽는 한이 있어도 상관치 않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몇 해 전에 소천하신 박석선 장로님은 일본에서 오래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망향의 동산에 산소를 마련하시고 그곳에 묻히셨습니다.  몸이라도 고향 땅에 묻히시겠다는 소원이셨습니다.  인간은 고향을 바라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 해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닙니다.  다만 나그네의 거처일 뿐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거할 곳”(μοναι, mansions, rooms<μενω, live, stay) 이란 말은 거실이 많은 옛날 궁전을 의미합니다.  자유롭고 무한한 공간입니다.  요즘 서울시의 주택 보급률은 97% 정도 됩니다.  주택수를 가구 수로 나눈 비율입니다.  그러나 자기 소유의 주택에 사는 사람은 60% 미만입니다.  

사람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내 집이 생기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마련한 공간이 얼마나 되나요?  25평, 30평, 40평 50평.  그만 해도 자랑스런 나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은 무한히 넓습니다.  유지비도 세금도 없습니다.  그곳은 누가 훼방하지도 않습니다.  다툼이 없습니다. 평화롭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모두 다 그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전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비취는 불들이 별처럼 많이 보입니다.  아파트도 빌딩도 맨션 주택도 한 점의 빛으로 보입니다.  “저 집집마다 여러 식구들이 있겠지?  저 먼지 같은 좁은 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누가 부자냐 따지고, 서로 네가 잘 났네 내가 잘 났네 다투는구나!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시야를 조금만 높이세요.  서울 시내 바닥에서 육칠백 미터만 눈을 높여도 세상이 부질없게 보입니다.  우리의 눈을 더 높인다면 세상 근심은 싹 없어질 것입니다.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 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고향을 볼 때 우리는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안식처를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주님은 우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2)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거처를 예비한다는 것은 하남 미사 지구처럼 무슨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T. D. Bernard는  말하기를, 주께서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위한 장소를 예비한다는 뜻 보다는, 이미 있는 아버지의 품에 인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는 뜻이라 했습니다.  아무튼지 이 세상은 어차피 심판 받아 없어질 세계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처소로 가야만 합니다.  이 영원한 거처를 주님은 준비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처소가 예비 되면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  

“다시 와서”란 말씀, “나 있는 곳에”란 말씀 역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심으로써 완전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하나님 품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나 있는 곳에”라는 말씀은 곧 주님의 품에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의 품에 살게 됩니다.  둘째로는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은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십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300여 곳 이상의 재림 약속이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영원히 하나님 품에 살도록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 있는 곳”은 곧 영원 천국입니다.  그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모든 악이 제거된 곳이며, 불행이 사라진 곳입니다.  오직 기쁨과 소망과 신뢰와 행복만이 있는 영원한 곳입니다.(21:22,23, 요일2: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러면 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품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품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도마가 반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  도저히 그 길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앞서서 베드로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13:33,36)  
  
오늘날 모든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모릅니다.  그 까닭은 두 가집니다.  

첫째, 그 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길이 아니고 영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경부 고속도로나, 아니면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노력해서 찾을 수 있겠지요.  인간의 노력과 첨단 과학 장비로 찾아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질 수단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길로 가야만 됩니다.  돈으로나 권력으로 찾지 못합니다.  인간 학문이나 지식으로 찾지 못하며, 고행과 선행 속에도 없습니다.  오직 영적 눈이 열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둘째, 인간에게 영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시조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진 순간부터 인간의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육체만 바라보고 영혼을 보지 못합니다.  물질세계만 볼 줄 알았지 영적 세계를 볼 줄 모릅니다.  양심의 눈도 어두워졌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예주님 자신이 바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갑니다.  이 말씀 속에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강조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무슨 길을 찾지 말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잠깐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매 순간 누군가를 의지하고 의탁합니다.  법에 무식해서 변호사 사법서사를 찾아갑니다.  기계를 몰라서 서비스 센타를 찾습니다.  집수리 할 재주가 없어서 미장공 부르고 배관공을 부릅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에 무엇 하나 제대로 알기 때문에 내 손으로 하는 것이 없어요.  우리는 잠깐 해외여행을 떠나면서도 자기 힘으로 비행기나 배를 조종하고 다니는 사람 없습니다.  전문가의 손에 맡깁니다.  조종사에게, 항해사에게, 또는 가이드에게 생명과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을 우리의  손과 머리로 어떻게 찾겠습니까?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안내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찍이 “나는 선한 목자라!”  양은 목자를 따라가는 재주만 있으면 됩니다.  양은 천하의 지리를 익힐 필요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를 따라가는 재주 하나만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알고, 듣고 따라갈 줄 알면 됩니다.(10:19-20,히10:19-22)  도마는 길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길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용서받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모든 수단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6)  

이 귀절은 세 개의 정관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Egwv eijmi hJ oJdo;" kai; hJ ajlhvqeia kai; hJ zwhv:”(I am the way, I am the truth, I am the life)  강조형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길이요, 참 진리요, 참 생명이라!  이 길과 진리와 생명은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우주를 계시하는 ‘진리’십니다.  육체와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곧바로 나와 주님과 아버지가 한 세계에 살게 됩니다.
  
두 번째 강조점은, 예수의 유일성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얼마나 확정적인 단언입니까?  요즘 종교 다원주의가 강조됩니다.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유독 기독교 신앙이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왜 오직 예수만 믿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메시아는 많다는 주장입니다.  누구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 논리로는 그렇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종교는 다원화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고, 교주도 될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세울 수도 있고, 신학자가 될 수도 있고, 교리를 가르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다고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니며, 종교라고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도 아니며, 교리를 주장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종교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한 분입니다.  세상에 무수한 별이 있어도 지구를 살리는 것은 태양 하나 뿐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하나뿐이며,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분도 한 분 뿐입니다.  우주의 질서가 하나이며 그 운행자도 하나뿐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8:4-6,딤전2:5)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모세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5:6)


예수님은 지금 내 삶의 어디에 계십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믿음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내 마음 중심에 계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근심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고, 주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품 안에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인생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실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죽는 날 저녁에 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십자가에 매달릴 사람이 ‘내가 곧 길이요’ 했고, 흉악한 군병들이 십자가 아래서 승리를 구가하는 순간에 ‘내가 곧 진리요’ 했으며, 잠시 후면 무덤에 들어갈 사람이 ‘내가 곧 생명이니’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믿음 없이는 납득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모든 제자들이 다 믿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세요.  주께서 나를 영원한 고향으로 안내하십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렀으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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