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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월절 음식을 드신 예수님 (막 14: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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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음식을 드신 예수님 (막 14:17-21)

막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막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막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막14: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대화하셨던 내용입니다. 때는 목요일 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어느 다락방이었습니다. 

눅22:15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드시기를 몹시도 원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날 밤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하셔야 될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유월절을 마감하시고, 그것을 대체할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요13:1이 말씀하듯이,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서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끝까지, 곧 최대한의 사랑을 제자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 날 밤 사랑으로 예수님은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할 것임을 아시면서도, 사랑으로 그들의 발도 씻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에 두고 슬퍼하는 제자들을 사랑으로 위로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실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그 뒤 마지막으로 사랑으로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뜻밖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막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 날 아침 예수님은 두 제자 곧 베드로와 요한을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내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유월절을 준비케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두 제자는 성내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물 한 동이 가지고 가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집 주인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자, 집 주인은 그들에게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유월절 준비가 다 끝나자, 그들은 베다니로 되돌아 왔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데리시고, 유월절 음식이 준비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내의 다락방으로 가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호시탐탐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길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서 예수님이 유월절 음식을 드시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14: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다 앉아 먹을 때에.” 출12:11 말씀을 보면, 본시 유월절 음식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관습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는 앉아서, 오래토록 유월절 음식을 먹었습니다.   

아무튼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 편에서 보면, 이는 전연 뜻밖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편에서 보면,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참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이 이처럼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셨으니까,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틀림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이중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One of you!”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태연하게 유월절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바로 예수님을 판다는 것은 너무도 가증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는 순전히 제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야에 물을 떠서, 열두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본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그런 후 요13:17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앞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남을 섬기며 사랑함으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13:18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실수로 가룟 유다를 잘못 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임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입니까? 

시41:9에 있는 말씀, 곧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남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그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발로 찬다, 또는 발로 목을 짓밟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는 엄청난 배신입니다. 

시편 41편의 배경이 사무엘하 15장∼17장에 나옵니다. 다윗에게 아히도벨이라는 모사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아히도벨은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아히도벨은 자신의 계략이 시행되지 않자,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한 것처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다가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처럼, 가룟 유다도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과 가룟 유다의 관계는 다윗과 아히도벨의 관계에서 미리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요13:19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생각해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말씀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택하신 것은 실수였으며 잘못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의 믿음은 약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여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음으로 견고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충격적인 사실이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알리신 것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헬라어 성경에는 “그”라는 대명사기 나오지 않습니다. 원어로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는 “I am,” 곧 “나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있는 말씀처럼, 이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처음부터 아셨습니다. 전지성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전능성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영원성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마다 함께 하십니다. 전재성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지성과 전능성, 그리고 영원성과 전재성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그인 줄, 곧 하나님이신 줄 그들이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반을 미리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요13:20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사명도 확고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사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높이셨습니다. 

그 날 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요한복음 16장까지 이어집니다. 그 결론이 요16:33에 나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밖의 환난을 당했더라도 낙심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세월 지나 갈수록 의지할 것뿐 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예수님을 힘껏 의지합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했습니다. 

막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그들이 근심하며.” 만일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면, 제자들은 별반 놀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중의 한 사람, 곧 예수님과 함께 먹는 자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말씀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작다고, 또한 때로는 깨닫지를 못한다고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를 받을 때, 행여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래. 너는 아니다.” 아무튼 그들은 자기들 중의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인지 전연 예측하지를 못했습니다. 

마26:25 말씀을 보면, 이 때 가룟 유다도 “나는 아니지요”라고 예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가룟 유다만 듣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면 다른 제자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리라고 공개적으로 밝히지를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끝내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철저한 위선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가르침을 똑같이 받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기도 할 때, 그도 함께 기도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도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상 마귀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가라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밭에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보였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의아스럽게 여기며, 주인에게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마13:28∼29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원수 곧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렸습니다. 따라서 곡식이 있는 곳에는 가라지도 있기 마련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그 안에는 곡식이 아닌 가라지도 있습니다.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곡식과 가라지가 자라나는 동안은 둘 사이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로서는 위선자를 구별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가룟 유다의 실체를 전연 눈치 채지를 못했습니다. 그만큼 가룟 유다는 능숙하게 자기의 속을 감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가라지임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칠까봐, 때가 될 때까지 그를 내버려두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가룟 유다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히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그러나 곡식과 가라지가 구별될 때가 있습니다. 추수 때입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각자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곡식은 모아서 주인의 곳간에 넣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거두어 불에 사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근심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부족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곧바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연약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그들은 잠들고 말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이 그들을 깨우셨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예수님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여종에게 또한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하나같이 연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주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순교하기까지 힘써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근심하면서 예수님에게 여쭐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나는 가라지가 아니지요?” 비록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우리가 연약할수록, 예수님은 우리를 더욱 귀히 여기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가는 날 천국 가게 하소서.” 이와 같이 늘 예수님을 소망 삼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각자 자신을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막14:20 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제자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님은 구체적인 지명은 피하시고, 그저 암시적으로만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열둘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 모두가 가라지는 아니었습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는 곡식이었습니다. 단지 한 제자만이 가라지로서, 가라지인 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식탁에는 양념을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카로셋이라고 불리는 양념은 여러 과일과 견과류를 으깨어 식초에 버무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벽돌을 만들 때 사용했던 진흙을 상징했습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떡과 쓴 나물을 양념에 적셔 먹었습니다. 양념 그릇은 두세 사람이 공유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다는 것은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애틋한 정을 보이시면서, 그가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바라심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세도 전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예수님은 시41:9에 기록된 말씀 곧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하신 대로, 예수님과 함께 먹으며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에 의하여 팔리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컨대 시편 22편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했으며, 이사야 53장은 십자가의 의미를 상세하게 밝혔습니다.  

또한 슥11:12 말씀을 읽어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은 삼십에 팔리셨습니다. 

계속해서 슥11:13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난 뒤에 어떻게 행했습니까? 

마27:3∼10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받지 않자, 그는 그 돈을 성소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록했습니다. 고전15:3 말씀과 같이, 실로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팔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됩니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룟 유다에게는 화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졌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영혼을 은 삼십에 판 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영원히 화를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지 아니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미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 말씀을 보면, 그는 바로 이 시점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14:1 말씀과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도 없었고, 또한 내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돌아보면서,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내세를 소망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른 막대기와 같습니다. 마른 막대기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들고 쓰시면, 홍해를 가르기도 하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면, 우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우리의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큰 역사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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