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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그 시대에 멸망한 백성 (신 2:13-15, 행 3: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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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에 멸망한 백성 (신 2:13-15, 행 3:22-24)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루터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개혁 95개 조항을 비텐베리크 교회 정문에 붙이고 결연한 자세로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날을 기념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 중심의 삶, 날마다 새롭게 개혁되는 우리교회,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혁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진행적 삶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아밋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엘리사 이후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 직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에 앗수르는 항상 이스라엘에게 위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원수 같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적극 거부하여 반대방향으로 갔습니다.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욥바까지 가서 거기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왜요? 앗수르의 니느웨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셨다가 고기가 토하여 나와서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게 하십니다. 요나서 마지막 장면에는 박 넝쿨 얘기가 나옵니다. 요나는 박 넝쿨 밑 그늘에서 쉬고 있었는데 작은 벌레가 나와서 넝쿨을 갉아 먹었습니다. 그늘이 없어진 요나는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죽는 것이 내게 낫겠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 한 박 넝쿨을 아꼈거든,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 명과 가축을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세요. 요나가 회개시킨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시키는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이라”, “돌로 치라”, “삼사 대까지 멸하리라”고 하신 사랑이 아닌 살인의 하나님이라는 오해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교훈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한 영혼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은 18:14은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뜻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입니다”(요12:47). 
  
복음의 요약이며 루터가 ‘작은 복음’이라고 한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왜 멸망하고, 왜 심판 당하고, 왜 죽음을 당합니까? 
  
인간이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인간이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사람 탓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오해는 그 멸망이 하나님의 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의 가장 확실한 징후는 불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어떤 이는 이런 것들을 망국 백성의 근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세상은 술 취한 농부를 닮았다. 말안장 한쪽으로 올려놓으면 곧 다른 한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육체는 항상 술취한 사람처럼 어는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입니다. 탕자 같은 명백한 불순종이 아니면 장자 같은 위선적 순종, 둘 중의 한쪽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나안에 염려하지 말고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까지는 직선거리가 약 130km입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게 들어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38년 동안을 헤매었습니다. 그들의 오랜 세월의 유랑과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이 방황한 것은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었음을 명백히 상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듣고 천국을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순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백성들이 가나안 목전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하였습니다. 

신명기 2:14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라고 합니다. 
  
민수기 1장에 보면 출애굽 2년 2월1일 시내광야에서 제1차 인구조사 결과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자가 603,5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정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이 불순종의 결과로 광야에서 38년을 헤매다 다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내어 미리 약속의 땅을 보게 하시고 가나안으로 진격하여 들어가라고 하셨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죄를 지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20세 이상 된 사람들 즉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은 전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하나님이 살게 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민수기 14:28-3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생명이고, 불순종은 죽음입니다. 
  
베드로전서 2:6에는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8절에는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합니다. 6절의 ‘믿는다’와 8절의 ‘불순종하다’는 서로 반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믿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탄의 시험에는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서 욕구를 일으킵니다. 둘째는 의심을 하게 합니다. 셋째는 거짓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마지막 넷째는 불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는 법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까지는 일주일 만하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38년을 헤맸습니다. 이 말은 출애굽 1세대들은 목적지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못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목적 앞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적지가 눈앞에 있을 때 잘해야 목적을 성취합니다. 어느 보고를 보니 장거리 운전을 하는 중에 가장 사고가 많이 날 때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5분 전이라고 합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게 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합니다. 목적지에 안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인터넷의 어느 동영상을 보니 자전거경기를 하는데 선수에 있던 선수가 결승점을 약간 앞두고 일등을 했다고 두 팔을 들고 환호하다가 자전거가 삐끗하며 흔들려 넘어졌습니다. 2등으로 오던 선수가 앞서 가니 눈앞에서 자전거를 다시 타려다 타지 못하고 끌고 뛰어 들어갔는데 2등을 했습니다. 눈앞에서 놓친 우승이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닌 가나안입니다. 광야에서 죽으면 허사입니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목적을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1952년 7월 4일 수영선수 플로렌스 채드윅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섬에서 해안까지 수영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녀는 영국 해협을 횡단한 최초의 여성입니다. 강도 높은 훈련 끝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차가운 물과 거친 파도에 시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15시간 55분간의 수영 끝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포기한 후에 기자들이 질문하였습니다. 

“포기할 당시 도착 예정이던 해안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까?” 

“나는 목표 지점을 볼 수 없었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해안만 보였더라도 끝까지 해냈을 겁니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포기하고 그녀의 도전은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두 달 후 9월에 그녀는 다시 도전하여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전히 안개도 파도도 방해가 되었지만 끝까지 도전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성공 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목표 지점을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목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목적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해야 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을 등정하는 등산가들이 악천후로 말미암아 목표를 눈앞에 두고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목표를 눈앞에 두고 실패한 것입니다. 물론 자연조건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신의 부족이나 준비 부족으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군관학교를 다닐 때에 교관이 물었습니다. “같은 병력과 같은 무기와 같은 전력을 가지고 있는 두 군대가 전투한다면 어떤 군대가 이기겠는가?”. 그 때 나폴레옹은 “최후의 5분을 잘 싸운 군대가 이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끝까지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절대 불순종하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순종하면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가야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농구경기에서는 버저비터로 승리가 바뀔 수가 있습니다. 축구에서는 인저리타임에 골을 넣기도 합니다. 골프나 다른 게임에서 서든데쓰라는 제도도 있습니다.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끝내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가나안인 천국을 향해 가는 자세입니다. 

  
둘째, 불순종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치셔서 멸망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2:15에는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고 합니다. 출애굽 1세대는 38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늙어서 죽은 자연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징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출애굽하게 하신 백성을 이유 없이 죽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나안을 주시려고 출애굽하게 하셨는데 광야에서 죽이겠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부부가 여행 도중에 남편 생일을 맞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미안해요. 내가 선물 준비를 못했네요. 깜빡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괜찮아, 여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 존중해 주는 것, 내게 순종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니요. 여보, 내가 그냥 선물 사 드릴께요” 하더랍니다. 순종은 누구에게나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순종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의 불순종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영적 자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손보십니다. 하나님이 멸망하게 하십니다. 
  
불순종은 마귀의 특허입니다. 사탄의 장기입니다. 사탄의 자녀는 사탄에게 순종하고, 하나님께는 불순종합니다. 에베소서 2:2에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의 길이와 그 정도와 깊이는 다양하지만 가지치기는 영원히 하지는 않습니다. 쳐야 풍성하게 되고, 
쳐야 열매를 많이 맺고, 쳐야 나무가 튼튼해집니다. 하나님이 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셔야 풍성하게 되고, 열매를 많이 맺고, 튼튼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게 때리다’(smite)란 말에서 ‘은 세공인’(silversmith)이라는 단어의 일부인 ‘대장장이’(smith)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장인은 스스로 만족하게 완성됐다고 생각할 때까지 두들깁니다. 자기 얼굴을 비추어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자기가 만든 것을 문질러 윤을 냅니다. 두드리는 것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윤을 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짓기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두드리십니다. 
  
에베소서 5:6에는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온갖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부모를 거역합니다. 살인합니다. 간음합니다. 도둑질합니다. 거짓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계명을 어기면 인간에 대한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때리셔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아들들에게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이미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 약속을 절대 변치 않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선악과를 동산 가운데 두신 목적이 그것을 따먹고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따먹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5:17에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매 맞지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 안에서 흥하고, 복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목사님이 천국이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설교를 듣던 청중 가운데 한 분이 “목사님은 천국에 가보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천국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쉽게 알 수 있지요”. “어떻게 쉽게 알 수 있습니까?” “천국에 간 사람 가운데 지금까지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잖아요. 좋으니까 안 돌아왔지요”. 
  
천국은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저의 선친께서 병상에 계실 때에 “천국에 갔다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습디까?” 라고 물었더니 “너무 좋더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좋은 것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얼마나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선친께서는 “너무 좋아서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갈 천국은 이렇게 좋은 곳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우리의 천국을 눈앞에서 잃지 말고,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 천국을 얻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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