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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위한 질투로 (민 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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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위한 질투로 (민 25:10-18)


성경에는 ‘누룩’을 비유로 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옵니다. 적은 양이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면 그 반죽 전체를 부풀리는 누룩의 성질을 비유의 소재로 삼은 이야기들입니다.

사실 누룩 즉 ‘이스트’라는 효모균이 정식으로 발견된 것은 17세기 후반이었고, 1857년에 와서야 프랑스 과학자 파스퇴르가 처음 과학적으로 규명해 냈습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이런 과학적 사실을 모르면서도 누룩을 사용해서 빵을 만들어왔습니다. 

우선 밀가루와 포도즙을 함께 반죽한 뒤 햇볕에 말려서 누룩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엿기름 만들 듯이 밀이나 보리를 물에 담가서 발효를 시킨 뒤에 이것을 누룩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발효된 밀가루 반죽을 일부 떼어 두었다가 다음 반죽할 때 함께 넣고 반죽하여 누룩으로 사용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이런 현상은 매우 신기했을 것입니다. 기술은 터득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과학을 모르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그래서 누구라도 이 일을 흥미있게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비유 소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누룩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관점입니다. 마 13:3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산되어가는 것을 누룩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룩은 긍정적으로 보면 ‘발효’를 이끌어 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 말에 들어가서 그 가루 전체를 맛있는 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한 사람 속에 들어가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이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게 될 때 그 공동체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관점입니다. 고전 5:6-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잘못된 가르침이나 풍조가 전해져서 신앙이 흔들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져 가는 것을 누룩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룩은 부정적으로 보면, ‘부패’를 일으킵니다. 적은 양이 소리 없이 들어와서 전체를 썩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공동체에 잘못된 가르침, 무신론적 사상, 세상 풍조 등이 소리 없이 전혀 져서 전체를 부패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을 멈추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체와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고, 교회다운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서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누룩 비유의 관점으로 보면, 소리 없이 누룩이 들어와 한국교회 안에 확산되고 있고,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교회가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막 8:15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소리 없이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을 부패하게 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부패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두 누룩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들어와 우리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있고, 또한 한국교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의 누룩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눅 12:1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바리새인의 누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누룩은 바로 ‘외식’(外飾)을 말합니다. 이 외식이 우리 안에 누룩처럼 번져서 우리의 신앙을 부패하게 하고, 또 한국교회를 부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식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겉으로 보여 지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마 6:5)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마 6:16)

그렇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교인들이 사람에게 보이는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여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한국교회가 지난 30여 년 동안 소위 ‘교회성장학’의 영향을 받아 교회성장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교인 수와 교회 건물과 땅 크기로 교회를 평가해 왔습니다. 목회자들도 교세에 따라 목회 성공여부를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과 교인들 모두 일단 교회를 성장시키고 보자는 태도를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한국교회 교인들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신앙적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것, 헌금 많이 하는 것, 교회 봉사 많이 하는 것, 어려운 이웃 열심히 돕는 것... 이런 것들이 겉치레가 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행동들이 외식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을 부패하게 만들고 또한 한국교회를 부패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외식이 왜 문제가 될까요?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신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회’는 예수님 당시 최고의 건축 인테리어 소재입니다. 그래서 건물을 다 짓고는 겉에 회를 칠해서 한껏 멋을 냅니다. 

그런데 무덤에 회를 칠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최고급 건축소재로 멋을 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무덤 속에는 시신이 누어있습니다. 시신이 썩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그 심령 속에 영적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그 깊은 속에 영적 생명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헤롯의 누룩

헤롯의 누룩은 무엇일까요? 헤롯이 추구했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세속주의’(secularism)라 할 수 있습니다. 
세속주의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살아가는 세계관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생관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인생관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 헤롯이 이런 세속주의적 인생을 살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로마 권력에 아부하여 권력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을 휘두르며 치부해서 큰 재물을 모았습니다. 또한 그 재물을 활용해 향락에 빠져 살았습니다. 

지난 2010년 10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개최된 제 3차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에서 오늘의 교회의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190여개 국가의 4천여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지적한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도전으로 몇 가지를 꼽았습니다. 그 중에 1위는 이슬람의 도전도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는 기독교 박해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세속주의였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도 역시 세속주의입니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한국교회 안에 만연되고 있는 물질추구 현상입니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고, 돈으로 교회의 직분을 사고 팔고, 심지어 뒷돈을 주고 교회를 매매하기까지 하는 일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나친 권력과 명예추구현상입니다. 교회 이름을 드러내고 목회자들의 명예를 드러내고자 볼썽사나운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교계의 선거가 돈 선거가 되고 있고, 한국기독교총연맹의 자리싸움의 추태는 교인들을 분노케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실종현상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편법과 불법을 자행하여 매스컴에 회자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성적 타락상이 드러나 충격을 주는 일들도 다반사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헤롯의 누룩 곧 세속주의에 물든 교인과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런 세속주의가 누룩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한국교회가 부패해 가고 있고, 교인들도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세계교회는 지금으로부터 495년 전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분연이 일어섰던 종교개혁자들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특별히 우리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 한국교회를 새롭게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재확인하며, 종교개혁주일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종교개혁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오늘의 종교개혁을 이룰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와 한국교회 안에 널리 확산되고 있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제거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본문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소위 ‘바알브올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진군을 위해 모압 평지 싯딤에 머무르고 있었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점술가 발람을 매수하여 갖가지 수를 쓰다가, 드디어 나름대로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미인계입니다.

발람은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손쉽게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이방여인들과 음행을 저질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여인들의 꼬임에 빠져 바알브올에게 제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방조한 각 지파의 지도자들을 공개 처형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알브올에 가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죽이도록 하셨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으로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 큰 충격과 슬픔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시므온 지파의 족장 시므이는 미디안 족속의 수령의 딸 고스비를 자기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진영 한 복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아는 가운데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때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의분을 참지 못하고 나섰습니다. 창을 들고 그 남녀의 음행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창으로 그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널리 퍼지던 염병이 그쳤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10-1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로 저들을 처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질투로 행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질투라는 말은 ‘열심’이라고도 번역이 되는 말인데 그 본 뜻은 ‘강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어떤 여자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 봅시다. “목사님 저는요 제 신랑이 다른 여자들 만나고 다녀도 다 이해해요” 그리고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어 줍니다.
이 분이 마음이 넓을 걸까요? 자기 신랑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마 자기 신랑보다 더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강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한 눈 파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비느하스는 이 하나님의 질투를 공감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점을 귀히 여기셨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보고 하나님의 질투를 느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 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며 신앙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형식주의와 외식에 사로잡혀 생명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에 대해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려서 신앙의 거룩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고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속주의와 타협하여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는 비느하스의 결단입니다. 비느하스는 창을 들고 단호하게 음란의 현장으로 달려가 두 남녀를 처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해소해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느하스와 그 가문을 대대로 대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새 우리 안에 번져가고 있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과감하게 척결해 내야 하겠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끊어내야 하겠습니다. 세속주의 물결에 휩쓸려 있는 것들을 끊어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교개혁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를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공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질투로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끊어낼 것은 끊어내고 잘라낼 것은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개혁하는 신앙으로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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