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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밀감 (시 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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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감 (시 103:1-9)

95년에 우리 교회를 개척하고 Calvary Chapel of Escondido에서 처음 예배를 드릴 때는 교우들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보다 눈물이 더 많았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말씀을 마치고 축도까지 끝났을 때입니다. 보통은 문밖에 서서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날따라 진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문으로 가는 대신에 강대상 뒤에 있는 의자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오고 흐느껴 울다가 나중에는 엉엉 울었습니다. 제가 왜 갑자기 소리 내어 우는지 교우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저의 부족함이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혹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교우들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족하지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였고 그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터치를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감을 느껴야 합니다. 항상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수는 없지만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직한 예배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열정이 있고, 찬양의 깊이가 있고, 충만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 젖어듭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깊이 대면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우리의 삶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를 갈망하십니다. 

오늘은 예배 성공의 법칙 5번째인 ‘친밀감’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친밀감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두렵거나 서먹서먹한 관계에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회복하여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느낄 뿐더러 그 은혜에 감격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친밀감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라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으나 친밀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가정이나 사회에 관계의 결핍을 느낍니다. 친밀한 소통을 증진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큰 숙제입니다. 예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upgrade시키는 요소 중의 하나가 친밀감입니다. 음악은 그 자체로서 인간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친밀감은 음악이 주는 느낌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추구해야할 진정한 친밀감은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친밀감입니다. 그 

이민사회는 상처와 분열의 아픔이 특히 많은 곳입니다. 이민자들 중에는 외로움과 상실의 아픔 때문에 교회를 찾고 친밀한 관계를 갖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때 그 상처가 더 깊어집니다. 또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을 교회 안에서 해소하려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다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민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한인교회뿐 아니라 이민 일세대로 구성된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의 분열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이 예배입니다.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성령의 감화, 어루만지심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내면의 깊은 상처와 관계의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간절하게 찾으십니다. 그러려면 먼저 하나됨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24).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게 하면 된다는 사고를 거부하시고 사람 사이의 화목이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교회가 분열하면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힘을 잃게 됩니다. 분열의 영을 품고 서로를 행한 증오를 가진 채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화목을 요구하십니다.

친밀감이 예배의 핵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 히브리어가 ‘야다’입니다. 이 관계는 마치 부부가 서로를 깊이 알듯이 서로를 잘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세상을 초월하신 하나님과 이런 친밀한 관계가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에 친밀한 관계가 실제로 가능해집니다. 이 친밀감이야말로 예배의 핵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말씀하시는 예배는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유대관습에서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즉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새 시대의 예배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친밀감이 있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없으면 예배가 힘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이 있을 때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아픔, 부끄러움까지도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중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 친밀감으로 예배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대신 얼굴을 구하라

예배자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보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편 103편은 하나님이 자신을 백성에게 드러내는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7절의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는 전체 14절 가운데 중심 구절입니다. 1절부터 6절까지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103:3-6). 

그러나 8절부터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합니다.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고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고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7절은 이 전후 문맥을 분리합니다. 지도자인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행위를, 백성에게는 행하신 행사를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위와 행사라는 단어는 언뜻 보면 잘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보면 행위는 ‘His ways’로, 행사는 ‘His acts’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를 보면 행위에 해당하는‘데레크’는 길, 태도, 습관을 뜻하고, 행사에 해당하는 ‘알랄라’는 행위 또는 행적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뜻, 성품 즉, 얼굴을 알려주셨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이 행하신 일들 즉, 손을 알려주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신약시대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구약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일대일로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말은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 뜻, 습관까지도 친밀하게 알 수 있는 존재로 격상되었다는 뜻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들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친밀감으로 일하셨고 역사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 이것이 우리 사역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예배사역자들이나 찬양사역자들에게 우선순위는 어떤 뛰어난 기량이나 감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듣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예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살아있는 골방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에스더서에 나타난 친밀감

에스더서를 보면 아말렉 사람 하만이 페르샤 제국 전체에 왕의 어인이 찍힌 공문을 보내어 유다 민족을 12월 13일에 멸하라고 합니다. 모르드개가 이 모든 일을 알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으며 재를 무릅쓰고 대궐 문 앞 광장까지 나가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왕궁에 있는 에스더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다가 자기에게 시중 든 내시 하닥을 통하여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하만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오직 왕만이 자신이 내린 조서를 바꿀 수 있기에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아가 탄원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페르샤의 법도를 들먹이며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에 모르드개는 에스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4:13-14). 

모르드개의 말에 에스더가 도전을 받고 결연히 일어섭니다. 이후에 나타난 에스더의 행보는 하나님께 친밀감을 가지고 다가가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1)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아무리 왕비일지라도 왕의 허락이 없이 왕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왕비였던 와스디를 폐위시킨 아하수에로 왕인지라 또 무슨 돌발적인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이를 잘 아는 에스더인지라 왕 앞에 나아가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합니다. 먼저 기도로 준비합니다. 이미 모르드개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4:16). 

금식을 동반한 기도를 하면서 왕을 만날 담대함을 얻습니다. 에스더는 또한 왕이 원하는 것들, 왕이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어떤 식으로 일을 추진할지 철저하게 준비를 합니다. 그래서 왕을 만나는 날 저녁에 있을 잔치를 정성껏 준비합니다. 예배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께 최고의 경배를 드릴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음 주 드리는 예배는 오늘 예배를 마치면서 준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사모하고 준비한 만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2)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춥니다

준비를 마쳤을 때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섭니다.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움직여 에스더가 아름다워 보이고 또한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게 합니다. 왕이 손에 잡았던 금홀을 에스더에게 내어 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홀 끝을 만집니다. 초대받지 않았지만 왕과의 만남을 허락받습니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순간 에스더는 자기 문제를 다 말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다 주겠다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더구나 에스더는 유대 민족의 구원이라는 긴급한 청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이 운명적인 날, 에스더는 법에 근거를 둔 호소를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윤리나 정치적 이득에 근거를 둔 논리를 펼칠 생각도 없었습니다. 우선 왕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에스더는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5:4) 라고 말합니다. 왕의 마음만 잡을 수 있다면 왕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잔치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왕은 또다시 에스더에게 묻습니다. “에스더 솔직히 말해보시오. 무엇을 원하오. 진심으로 묻는 거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소.” 이에 에스더가 대답합니다. “별 것이 아닙니다. 내가 폐하께 은혜를 입게 되어 폐하께서 기꺼이 나의 간청을 받아 주신다면, 나는 내일도 잔치를 차리고, 두 분을 모시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는 하만과 함께 오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폐하의 분부대로 나의 소원을 아뢰겠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어떻게 합니까? 그곳에 들어서면서 하나님께 바로 자기의 소원을 구하고, 모든 문제를 이야기합니까? 에스더는 우리에게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먼저 청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 당면한 문제들은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하나님만을 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는 복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좇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를 이끌어내려면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 성실한 경배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경배할 때 진심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한 손에는 우리의 문제와 과거를 쥔 채로 다른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경배를 올립니다. 자기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해결해줄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까? 

오직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적절한 때와 장소를 골라 부탁할 줄 아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더욱 풍족하고 더욱 훌륭하게 응답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하나님을 먼저 섬기고 하나님을 먼저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배후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수에로 왕이 풍성한 음식으로 배가 부르고 그녀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의 부탁이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오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갑자기 역대일기를 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두꺼운 책 중에서 하필이면 모르드개와 관련된 부분을 읽게 하십니다. 모르드개가 자기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마땅한 보상을 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왕이 모르드개에게 보상을 내리는 법을 묻기 위하여 모사를 불렀는데 마침 그때 하만이 궁중에 들어옵니다. 자신이 예비한 50규빗 높이의 장대에 모르드개를 매어달게 해달라는 허락을 받기 위하여 오는 중입니다. 왕이 허락이 떨어지면 모르드개는 당장 나무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왕이 존귀하게 여기는 자를 어떻게 높여야 할지 하만에게 묻습니다. 모르드개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왕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하만은 평소에 품었던 생각을 말하며 자신이 왕이 되고 싶다는 잠재의식을 나타냈습니다. 

“왕께서 사람을 존귀케 하시려면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6:7-9). 

그의 교만은 그를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몰락과 파멸을 더욱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왕은 하만이 말한 그대로 모르드개에게 행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자기가 죽이려는 자를 도리어 정중히 모시면서 다녀야하니 하만의 속이 얼마나 뒤집혔겠습니까? 굴욕을 당하는 자와 높임을 받는 자의 위치가 뒤바뀌게 됩니다. 진심으로 왕이신 하나님에게 높은 가치를 둘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친밀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라고 끊임없이 훈계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28-30). 

염려는 마음이 나뉜다는 뜻이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믿음을 작게 만들기에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필요를 이미 아십니다. 성도들이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걱정하면서 그것을 기도라고 부릅니다. 다른 이들은 손을 치켜들고 걱정하면서 그것을 경배라 부릅니다. 경배는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은 문제를 확대시키기만 할 뿐, 해결해주시는 주님의 가치와 힘과 능력을 오히려 작아지게 합니다. 

많은 이들이 한 달 안에 자기들의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거나 집을 차압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될 때 경배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경배는 주머니에 보너스가 그득할 때보다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드리는 경배가 더 값집니다.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계획을 짜고 시간을 관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경배는 언제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영적인 무기입니다. 사탄에 맞서 내가 직접 이 싸움을 치르겠다는 오만한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적들보다 강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어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경배할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다면 우리의 적은 그분의 적이 되고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해결을 향한 발판이 됩니다. 구원과 도우심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께 승리를 부탁하고, 도움을 갈구하고, 기적을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에스더서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열정적인 준비와 아낌없는 경배를 통하여 바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탁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높여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잠시 제쳐두고 먼저 하나님의 식탁에서 시중들며 하나님의 허기를 경배로 채워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지 해 주실 것입니다. 

“궁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사람 수는 적어지지만 풍성함은 늘어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궁전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수고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준비할 것이 너무 많다고, 왕이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맞추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를 싫다고 생각하여 들어가기를 주저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전의 바깥뜰을 지나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철저히 하고, 그분에만 초점을 맞추며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의 풍성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게 가장 친근한 감정을 담아 부르는 호칭이 아빠입니다. 성령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시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셨던 것처럼, 그들 또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닥쳐 마음이 흔들리고 몸이 지쳐 쓰러지게 될 지라도 모든 문제의 해결을 쥐고 계신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와 보호의 망대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잃지 않을 때, 에스더와 같이 구원을 경험하고 욥과 같이 풍성한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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