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첨부 1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우리 시대를 고도의 지식 시대라고 합니다. 지식 팽창의 시대이고, 정보화 시대, 전문화 시대입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누구든지 취할 수 있습니다. 요즘 환자들은 너무나 많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알고 와서 오히려 의사들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생활이 첨단화되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을까요? 오히려 지식과 이론으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무엇인가에 늘 목이 마릅니다. 이전보다 정신적 질병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지식이 생존의 수단으로서는 문제가 없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직장인들의 상당수는 먹고 살만한 돈만 있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토로합니다. 그래서 ‘직장인의 내면적 자기 퇴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퇴직한 상태로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에 재미가 없고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날까요? 생존의 수단을 붙잡고 있지만,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붙잡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고린도 지역은 문명이 발달했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고, 그런 도시 안에 있던 교회도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반응인데, 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믿고자 했던 그들에게 힘없이 죽어버린 유대 청년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심오한 철학이나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을 중요시하는 헬라인에게 바울의 복음 메시지는 천박하고 무식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강한 신들을 섬기던 로마인들에게는 힘없이 나무에 매달린 채로 죽은 예수에게서 복음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살던 로마인들에게 예수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헬라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다양한 철학들을 추구해서 다양한 학파와 웅변술, 토론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길거리에서도 논변자들이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사람들은 지식 쌓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느 스승에게 배우는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관심거리였습니다. 

이런 문화 때문에 고린도 교회 안에도 아볼로파, 바울파 등으로 분파를 만들어 복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치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그 영향으로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고상하고 수준 높은 지식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이런 현상들이 있습니다. 주지주의적인 현상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수준 높은 내용을 듣기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변화, 성장하고 복음 안에서 삶이 풍성해지는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아는 것에 몸부림칠 때가 많습니다. 각종 성경공부와 훈련으로 사람들의 머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훈련프로그램이 많아지지만, 어떤 과정을 마친 것이 계급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지적 만족, 그냥 똑똑한 신자로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유수 대학들도 처음에는 순수한 신학교로 출발했지만, 학문화되어 갈수록 신앙을 포기하고 철저히 인본주의의 본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세속적인 학교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지성, 은혜가 없는 이론적 성경지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성이 하나님을 떠난 것일 때 그것은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은 어느 시대보다 영적인 시대처럼 보입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영성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달라이라마 혹은 탓닉한과 같은 사람의 글과 강연에 매력을 느낍니다. 물질적 풍요로 인한 내면의 공허함을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의 세상에서 지성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집니다. 

바울이 처한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고린도 이전에 바울은 아덴(아테네)이라는 철학과 지식이 숭배되는 도시에 가서 철학적인 실력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철학이 가미된 복음을 전파했을 때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철학과 지식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목마르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다른 모습입니다. 

한국의 지성의 상징인 이어령 교수는 기독교 신자가 되고 난 후, 최근에 기독교 서적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성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만, 요즘 그는 자신의 지식의 한계, 지성의 무기력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지식이 전혀 쓸모없고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지식의 탑을 쌓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여준 태도도 분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사로잡혀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도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지만 자신의 화려한 학문적 경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이론적 무장과 지성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확고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도’ 외에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것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지혜나 지성에서 나온 자랑들을 늘어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지식을 쌓으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지적 허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자 하는 유혹이 많습니다. 말씀 이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는 죄 문제, 십자가, 회개, 종말, 하나님의 나라, 이런 주제들이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도덕적 설교나 일상의 가벼운 주제들이 주류를 이루며 청중과 타협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C.S 루이스는 “당신을 편안하게 해 줄 종교를 찾는다면 나는 절대로 기독교는 추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리를 갖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그렇게 붙들었습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소개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의 신앙은 성립이 안 됩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교훈과 원리들을 발견하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정행복의 원리, 비즈니스의 원리, 사회 개혁의 원리, 인간관계의 원리, 리더십의 문제 등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것들을 발견한들 십자가의 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상에 전달해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인간 구원을 위한 완벽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덮어 버리면 신앙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는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이나 활동들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와야 신앙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회봉사를 많이 하고 활동을 많이 해도 십자가가 빠지면 세상 단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은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는데 그 신앙의 뿌리는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헌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인간의 지성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나 돈을 제공해준다고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것들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고 탁월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선택할 것인가? 언뜻 보기에는 인간의 지성에서 나온 소리들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진짜 예수쟁이로,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살려고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고 그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물을 보는 관점과 해석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이 세상입니다. 지금 당장 행복과 성공이 중요한 것이지 영생의 삶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만족과 행복보다 영원한 세계, 영생의 삶, 구원을 추구합니다. 정신과 치료의 목표는 미친 사람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목표는 세상에서의 정상인을 예수 안에서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지만, 신앙의 논리는 죽어야 산다고 합니다. 세상은 끝없이 높아지려고 발악을 하지만, 신앙은 낮아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고, 약할 때 강함이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기꺼이 가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마디로 미친 짓을 하라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말씀하는 ‘전도의 미련함’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이나 바울은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고, 그것만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혜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철학과 사상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하고, 득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소망이 없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은혜의 세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간단한 복음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아무도 믿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미련함이란 단어를 씁니다. 엉성해 보이고, 비지성적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확실히 미련해 보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굉장히 유식하게 말을 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전도할 때는 복잡하고, 어렵게 말하거나 자기의 생각과 말을 집어넣지도 말아야 합니다. 누가 전도의 미련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복잡한 이론이나 어떤 철학에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내 인생을 흔들고 다 쏟아놓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났을 때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해서 내 인생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니까 성경의 지식이 내 인생에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깐깐하고 지적이고 논리와 철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또 다른 철학과 논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고 삶이 뒤바뀐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자신의 영혼을 파고들어 왔을 때,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그의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밀려오는 풍성함에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의 경이로움에 무릎을 꿇었고, 자신의 모든 삶을 압도했습니다. 그가 붙잡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내가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나 철학에 내 생명을 던질 용기가 있습니까? 지식은 가질수록 비겁해집니다. 그것을 위해 내 생명을 헌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앎은 가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성공적인 인생이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고, 믿고 있는 그것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멋진 인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정보일 뿐입니다. 예수도 알고, 성경도 아는 것일 뿐입니다.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올 뿐 아니라 삶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바울은 지식쟁이, 말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설명해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을 바쳤고 다른 사람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음을 확신하고 온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귀중한 생명을 바칠만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실 생명을 바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삶이란 뜬구름 잡는 인생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인생의 끝은 어느 날 황급히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를 위해 생명을 걸고 산 사람은 죽음의 문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으나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에 삶을 바친 사람은 생명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칼 막스는 ‘기독교는 아편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오해한 말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무엇을 알고 말한 것 같습니다. 칼 막스가 보기에 기독교는 무엇인가에 미쳐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로도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집단이 기독교입니다. 북한도 무서워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아편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힘이 복음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의 진위를 확인해 보십시오. 교회라는 곳에서 기독교의 문화를 익히고 봉사하기 이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이 농축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 없이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문화화되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에서, 우리의 삶에 수많은 사건과 계획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붙들고 있는 이념도, 철학도, 사상도, 내가 가진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합니다. 아무리 깨어지고, 망가지고, 상했어도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다가가면 다시 살아나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진지하게 십자가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내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직도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입니까? 십자가가 부끄럽습니까? 이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자랑스럽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십자가 안에 우리 인생에 모든 해답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온 세상에 담대하게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이규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2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