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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하시는 하나님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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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시는 하나님 (마 22:34-40)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세분화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열 가지 계명을 613가지로 세분화해서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을 365개로, ‘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248개로 분류했습니다. 613가지도 부족해서 계속 더 많은 세칙을 만들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복잡해지면 본질이 흐려집니다. 그들은 모여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것에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보통 주로 몇 년도에 어느 교회에 다녔고, 목사님은 어떤 분이었고, 건축 헌금한 이야기, 봉사한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남자 분들은 술이나 담배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우리는 이런 외적인 것들이 신앙의 본질이고 핵심인가를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잡다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신앙이라고 할 때 이런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신앙에 열심히 있었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 애를 썼지만,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분노하시고 책망하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보도록 의도적으로 규칙을 깨뜨리기도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에게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주님은 손을 대셨고, 어떤 때는 그들이 말하는 안식일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어기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자는 돌로 쳐 죽이던 시대에 주님은 용서를 베풀기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규칙을 깨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의 행동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는 질문에 아주 명쾌하고, 쉽고,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주님은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던 율법사들과는 달리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셨습니다. 율법의 종류에 대해서 늘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중심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니” 양보할 수 없는 최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선명한 기준을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에게 일격을 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지켰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느냐’인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형식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는 가운데 찾아오는 유혹은 내용은 빠지고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그때 형식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당시에 가장 열심을 다하던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과격할 정도로 책망하셨습니까? 그들 안에는 내용이 빠져버리고 형식만 남은 형식주의자들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장 어귀에서도 기도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하고, 한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할 정도로 열심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들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으면 신앙이 아니라 종교행위가 됩니다. 생명을 가진 신앙의 삶이 아니라 외적 껍데기만 남은 종교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종교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종교생활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종교생활이란 진심이 없이 규격화된 행위의 수행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의무를 지키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행위에 기쁨이나 즐거움, 감동이나 열정도 없고,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안 지키면 기분이 찜찜하고, 때로는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어서 지키긴 하지만 자발성도 없고 그저 그런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괜히 어떻게 될 것 같은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구약시대 신앙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고, 성전의 핵심이 제사였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만나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라는 의식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구약시대에 그들은 제사에 생명을 걸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음에도 인애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애는 마음을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미 6: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 

그러므로 하나님이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드리고 있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태도입니다. 마음이 담긴 의식이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올려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어떤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의 반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의 진심 어린 마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봉사하고 수고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숫양이나 기름진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에 유대 종교는 낡을 대로 낡아져서 성전이나 제사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장사하는 상들을 뒤집어엎으시고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그 당시는 멀리서 양을 바치러 오면 양에 흠이 생기면 안 되니까 성전 입구에서 깨끗한 양을 팔았고, 동전을 바꾸는 등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엉뚱한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형식뿐인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크게 대립되는 중대한 국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보이는 성전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 곧 보이지 않는 성전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형식만 남아, 이미 생명이 다한 종교의 폐기에 대한 비장한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맞아 죽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망합니다. 잘못하면 고등사기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성전 건물이 아무리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힌 의식으로 제사를 드린들 그 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전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교회에 다녔는가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내용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은 출석도장을 찍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에게로 향해 있는가, 예배 안에서 나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마주침이 일어났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결, 친밀한 대화, 자연스러운 영적 접촉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거나, 혹은 진실된 신앙생활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내면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점검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도 나를 속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위선으로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쉽게 병이 들거나 나도 모르게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외형적으로는 날마다 제사가 드려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던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사라는 형식은 있었지만,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숭배하며 떠나갔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행음한 여인으로 비유하며 질책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으로 소개합니다. 질투는 인간적인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불꽃 튀기는 감정입니다. 질투하는 여호와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랑은 언제나 일대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도 일대일로 만나십니다. 사랑이 삼각관계를 만들 때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와 같이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여인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면 당연히 아내의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질투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아주 예민하게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대충 사랑하는 관계라면 질투할 것도 없습니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는 아주 작은 감정의 파장도 서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깊이 들어간 사람은 아주 작은 것도, 내 마음이 빼앗긴 것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의인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속된 감정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강렬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어떤 것과 비교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들어지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찬송을 불러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을 아십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우리와 더없이 친밀해지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다윗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았고, 실수와 허물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보신 것은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보면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틈을 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의 사이에 어떤 틈이라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위기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하던 봉사가 힘들어지고, 자발적인 헌신이기보다는 의무감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기쁨으로 하기보다 억지로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감사와 감격이 없다면 영적 위기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다양할 수 있지만 가장 핵심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생활에서 여러 문제를 겪지만, 가장 위기는 부부가 사랑에 금이 가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 관계에서도 핵심은 사랑입니다. 주의 일을 사명감으로 하지만 사명감이 바닥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은 사라지더라도 주님과의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사명감은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 사명감보다 더 큰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중국 내지 선교의 길을 열었으며 OMF의 창설자인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선교사 후보들이 어떻게 중국 선교사로 가게 되었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사명도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순종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저절로 됩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안에 있을 때 순종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살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영어 성경을 보면, ‘heart(마음), soul(목숨), mind(뜻)’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마음이 끌려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너무 사랑해서 시간만 나면 닦고 닦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아들이 날카로운 못으로 차를 긁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순간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망치로 아이의 손을 내려쳤습니다.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짓이겨진 아들의 손을 치료한 후에 보니까 아이가 자동차에 “아빠, 사랑해요”라고 쓰던 것이었습니다. 아빠의 잘못된 사랑이 아이의 손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해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빼앗기지 말고, 그분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라는 말을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에 푹 빠지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사랑에 잠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분이 없다는 고백이 예배 안에서 가슴으로 터져 올라야 합니다. 사랑은 형식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표현됩니다. 형식이라면 오늘 예배에 왔으니 하나님께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시간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 돈 개념이 없습니다. 계산 불능입니다. 사랑하는 곳에 마음이 갑니다. 사랑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멋진 신앙은 사랑에 빠진 신앙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전부인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입니다. 마리아는 다 바치면서도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사랑을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사랑 없이 행하는 것은 재미가 없고, 힘들고 피곤합니다. 형식을 의무로 지키는 것처럼 재미없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전성기, 우리에게 은혜가 흘러넘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는 것이 실제로 느껴질 때입니다. 분석하고 이해만 했던 교리적 하나님이었는데 어느 날 갈보리 언덕에서 그 아들을 통해 나에게 주신 그 은혜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사랑을 폭포수처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개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몸으로 느끼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계명이 무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613가지의 조항으로 너무나 힘들어하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마 11:2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짐은 바리새인들의 무거운 종교적 짐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 안에 들어가면 계명들이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고 특권이고 신 나는 일입니다. 힘든 요구라 할지라도 피곤한 줄 모르고 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다고 하십니다. 최근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은 아무 부담을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세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딱 한 가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면 그 사랑에 내가 반응하고 경험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들은 자기를 만족하게 하는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빠지면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분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붙잡으십시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신앙이 깊어져 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을 통해서 사랑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그 사랑이 점점 부어지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과 반응이 흘러나올 때 그것이 우리 신앙의 변화, 인격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라도 출발지점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외적 행위만 남은 것은 아닌지, 의무적 수행에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들의 평가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흘러나오는 부수적인 산물인 것입니다. 신앙은 부담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하거나 액땜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은 뇌물이나 복채가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선도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배나 봉사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율법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도 열심이었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껍데기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식주의,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반응하십시오. 신 나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랑보다 가장 강렬하고 농도 짙은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마음껏 경험하고, 그 사랑에 빠져 그분과 접속하십시오. 그 사랑에 이끌려 주를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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