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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우리의 신앙개혁 (왕하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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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개혁 (열왕기하 18:1-8)

오늘은 종교개혁 495주년을 맞은 주일입니다.  시간이 좀 지난 기사지만 2006년 6월호 타임지는 인류역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100대 사건을 소개했는데 그 중에 종교개혁이 최상위에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은 근대 시민사회의 발현, 개인 양심에 대한 권리, 직업과 윤리, 정교의 분리와 성경의 대중적 보급 그리고 평신도의 제사장적 위상 확립 등 사회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개혁운동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종교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와 문화 등 상당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입니다.  

1517년 10월31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독일의 비텐베르그대학 교회 정문에 붙이고 교회의 잘못을 회개하자 했던 수도사 마틴 루터의 외침을 시작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은 급속도로 전 유럽을 향해 번져갔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애초에 교회내 문제를 개혁하자는 것이었지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잘못된 관습과 성경으로부터 벗어난 오류를 시정하자는 순수한 교회개혁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지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고민하며 교회의 새로운 모습을 갈망했던 개혁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개혁운동을 시작한 결과 엄청난 사회 개혁운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종교가 곧 국가였고 정치와 문화와 생활이었던 중세 유럽의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 신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순전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미신과 신비주의가 혼합된 정체불명의 종교생활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화려한 성당건물과 그 안에 그려놓은 각종 성화와 조각상 등은 일반 성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대한 성당건물의 화려함은 사제들의 업적과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비가 되었고 고위직 사제들은 세속권력과 손잡고 종교권력을 마음껏 휘둘렀습니다.  화려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바친 헌금은 축복의 지름길로 여겨졌으며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종교 권력자들은 공공연히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팔았으며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 그 자리와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힘 없고 무지한 교인들은 잘못된 가르침, 잘못된 희망 속에 힘겨운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던 일반 민중들은 성경에 기초한 경건 보다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의 경건생활을 유지하여 수 많은 미신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예수께서 갈보리 언덕에 달리셨던 십자가는 마음에 담아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고난과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손으로 만든 십자가 자체에 의존하거나 손으로 그은 성호가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순교자들 혹은 성자들의 무덤을 찾아가 기도하며 점차 성자숭배에로 나아가는 등 온갖 미신이 난무하였습니다.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부활절 기간에만 잠간 공개되었던 성물들에 대한 숭배는 이런 미신을 조장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옥스포드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에 들어가면 왼쪽 끝방에 옥스포드의 수호성인 프라이즈와이드를 기념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직접 가서 보신 분들이 있고 그 배경도 들어 알지만 영국에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그 수호성인의 제단을 교회 밖으로 끌어내었는데 나중에 그 일부를 다시 그 곳에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 방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 부분이 깨어진 성상들이 있는데 개혁자들의 손에 의해 부숴지고 잘라진 성상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을 개혁신앙의 한 상징물로 여겨 교육적인 차원에서 전시하고 있다면 혹 모르지만 무너진 성상을 다시 복원함으로 옛날로 돌아가려는 목적이라면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성인들은 존경하고 따라야 할 좋은 분들이지만 경배를 받거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여행한 분들은 보셨겠지만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그냥 만져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성상을 만짐으로 무슨 효험이 발생하길 기대하며 만지고 그 성상이 마치 살아있는 성인이나 되는 것처럼 합장을 하고 허리굽혀 기도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이 예배당에 모셔놓은 성화들이나 성상들을 파괴했던 것은 그런 미신적 행동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던가요?

중세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것은 단지 그런 미신적 예배와 풍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교인들이 미신적인 신앙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은 사제들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일반 성도들은 사제들이 읽어주는  성경구절과 기도문을 듣는 따라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연히 말씀에 기초하지 못한 사람의 생각과 전통과 풍습이 그들의 신앙을 이끌었고 눈에 보이는 형상과 예배의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열왕기하 본문을 봅시다. 히스기야 임금이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여러 산당을 제거하며 우상들을 찍어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 임금은 유다의 왕들 중에 누구보다 우상숭배에 더 깊이 빠졌던 왕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가증한 우상숭배를 본받아 아들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일을 했고 산당과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이런 행위를 버리고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신앙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당장 가져다 부수고 그것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 하였다. 말 그대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만들었던 그 놋뱀은 광야에서 거역하며 불평하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며 죽어갈 때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 장대에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고침을 받게 하셨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그 놋뱀이 무슨 병고침이나 능력을 주는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었고 아버지 아하스 왕 시대에 더 심하였기 때문에 보다 못한 히스기야가 그 뱀을 부수고 이것은 그냥 놋조각일 뿐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어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그동안 잊어버리고 소홀하게 여겼던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회복시킴으로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신앙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성전 안에까지 들어온 부정한 물건들을 내다 버렸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제도를 바르게 세움으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집중되도록 하였습니다.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는 히스기야 왕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하나님께 연합하여 오직 그에게 집중하였던 왕,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였던 임금 히스기야의 열심은 유대 왕국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종교개혁이습니다. 하나님과 언약했던 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이것이 신앙개혁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중세시대 교회를 향해 부르짖었던 개혁자들의 개혁정신과 다르지 않고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정신이기도 합니다.  개혁이라는 말 Reformation은 ‘포맷을 다시 한다는 뜻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포맷팅을 다시 하는 것은 쉽게 말해 엉망이 된 형식, 체제, 판 form을 다시 짠다는 말입니다.  바이러스 감염이 된 컴퓨터 시스템을 치료하기 위해 디스크를 포맷하고 운영체제를 다시 설치하여 처음의 깨끗한 상태로 돌려놓습니다. 그것처럼 각종 거짓 정보와 잘못된 습관, 파괴적인 영성,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과 더러운 행동 등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우리의 신앙체계를 포맷팅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본으로 다시 깔아 새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Reformation, 신앙개혁입니다.  

그래서 신앙개혁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순종하려는 자세가 없는 한 신앙개혁은 의미없는 구호에 그치고 맙니다. 우리에게 개혁의 지침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혹은 부담스럽기 때문에 거절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심조차 두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힘이 있어 양날이 선 어떤 칼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사람의 마음을 밝히 드러내는 능력인데(히4:12)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일하지 않고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대신에 엉뚱한 것을 가져다 덛칠하고 바르고 포장하여 겉으로만 그럴듯한 모양을 내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라고 자화자찬하며 무감각한 신앙인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속이는 신앙입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읽은 기사에 아내가 성형미인인 것을 모르고 결혼했던 중국의 어떤 남성이 이혼소송에서 승소하여 위자료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낳은 딸이 너무 못생겨 아내를 의심하다 비로소 아내가 결혼 전에 성형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혼소송을 하였습니다.  그 아내는 결혼 전에 거금 1억원을 들여 성형을 했고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르고 결혼을 했는데 법원은 남편에게 이 사실을 감춘 아내에게 위자료로 1억3천만원을 지급하라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 이 여성의 포맷팅은 영 실패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굴의 판을 완전히 새로 짜긴 했는데 딸에게서 그 판이 다시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개혁은 이런 식으로 시간이 얼마간 지나면 다시 그 진실이 들통나고 마는 겉모습 치장이나 임시변통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그 무엇을 가지고 겉모습만 번지르하게 바꾸는 것은 성경적인 개혁이 아닙니다. 돈이나 교양이나 지식과 학벌과 지위, 고상한 말투, 그리고 일시적인 선행이나 자비심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는 개혁이 진짜 개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충만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삶의 열매들 그것이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며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종교개혁, 신앙개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향해 새로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교회 밖을 향해 ‘너희들 고쳐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지금 한국의 교회가 세상을 향해 개혁을 말하면 ‘너나 잘해라’는 냉소적 반응을 보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자정 의식이 없어 보이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제도의 개혁을 말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인 개인 자신의 개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이런 개혁이 없이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내고 그럴싸한 논리로 다른 사람이나 조직과 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 외쳐봐야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나 먼저 개혁되야 한다는 깨달음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절간에 들어가 탱화를 훼손하고 불상에 오줌을 누는 행동을 히스기야 임금이 우상들을 철폐하며 모세의 놋뱀을 깨뜨린 행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신앙개혁이 아닙니다. 먼저 자기 마음에 자리잡은 교만과 어리석음과 헛된 열심이라는 우상을 찍어 내고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와 교인들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거짓된 열망과 가증스럽게 포장된 거짓 신앙부터 찍어내고 깨뜨리며 불살라야 참 신앙개혁입니다.  

종교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통계를 보면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천주교와 불교의 절반 수준 밖에 안된다는 결과가 나왔답니다.  더 염려되는 것은 이런 현상이 몇 년 전보다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발표된 <크리스챤 뉴스위크>라는 주간지에 보면, 고위 공직자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42명, 카톨릭이 20명, 불교가 9명, 무종교가 26명, 기타가 3명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소위 상류층으로 갈수록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다는 말이며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막강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질책 중에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인들의 수가 전체 인구의20% 가까이 되고 상류층으로 갈수록 기독교인이 42%나 되고 천주교까지 계산하면 62%나 되는 데도 한국 사회의 도덕수준이 이처럼 썩었는가라는 질책입니다.  한국 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바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요, 교회가 오직 부흥과 성장에만 주력해 왔기 때문입니다.  급성장하던 한국교회가 1980년대 후반부터 거의 성장이 멈추고 지금은  하락세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조정하시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야야 할 것은 기독교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소수라 할지라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어야 함이 더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지금처럼 기독교를 향해 비난하는 소리가 더 높아지고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숫자가 지금보다 더 줄어야 교회가 정신을 차릴지도 모릅니다.  부풀려진 기독교인 숫자의 거품이 빠지고 제대로 된 기독교인들이 새롭게 다짐하며 시작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릅니다.  

반기독교 정서의 영향으로 동네의 작은 교회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동안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은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리며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활발한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개발하며 고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보다 편리하고 부담이 없이 다니며 종교생활을 즐길 수 있는 교회, 내 수준에 맞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위한 교회로 모여들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세워진 동네와 그 지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교회, 주일마다 온 동네 주차장과 간선도로가 예배 드리러 모인 교인들의 자동차로 가득 차 정작 그 동네 주민들은 주차난과 교통 혼잡 그리고 소음으로 불편을 겪어야 하는 현상을 부흥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덩치만 큰 교회, 그래서 큰 교회가 있는 동네 주민들은 기를 쓰고 예배당 신축을 반대하며 싫다고 아우성 치는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민폐이며 이기적인 욕심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집 가까운 곳에 한인교회가 없어 멀리서부터 옥스포드까지 찾아오시는 교우들을 보며 그 마음이 귀하고 고맙기도 하지만 기왕 우리가 옥스포드한인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면 우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이 지역사회에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이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옥스포드 한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한인학생회, 한글학교 그리고 교회 밖에 더 많은 한인들이 있습니다. 지구촌 반대편 저 멀리 땅끝 한국에서 영국까지 찾아와 교회를 이루고 주일마다 모이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영국인 교우들과 이 지역의 주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더 넓은 곳에 우리가 나가야 할 세상이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여기 모인 우리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우리가 그 변화된 삶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 숫자가 많아야 부흥이고 성장이며 성공이라 말하지 맙시다. 주의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참 부흥과 성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 나와 우리가 포함되길 바랍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교회가 참으로 교회다워질 수 없습니다. 나와 우리가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시는 개혁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하여 요한 칼빈과 쯔빙글리, 존 낙스와 같은 분들이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을 때 그들과 함께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릅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프로테스트 즉 항거한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교회의 불의와 거짓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오늘날은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응하는 모든 개신교를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개신교는 새롭게 고치는 개혁하는 교회라는 뜻을 가지는데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난 모든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 전통이나 관습을 거부하고 항거하며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는 교회를 말합니다.  종교개혁은 500여년 전에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들을 돌아보며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이며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는가?나의 생활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하길 바랍니다. 그 말씀, 곧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하나님께만 영광을 부르짖었던 개혁자들의 외침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개인과 교회와 사회가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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