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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량대로 주신 은혜 (엡 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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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대로 주신 은혜 (엡 4:7-16)

 
내 용 

오늘 제가 설교할 의미를 지금 핸드벨팀이 다 해주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협력적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분량대로 주신 은혜를 우리가 사용하면 그것이 하나의 협력적 유기체가 되어서 교회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오늘 에베소 교회에 이야기를 한 것인데 지금 보십시오. 12사람이 했는데 각자 자기 소리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듣기에는 하모니가 이루어져서 아주 멋지게 들리잖아요? 이게 협력적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명만 했는데 자기에게 주신 것만 했는데도 아주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진 것이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사람이 많이 있는데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나뿐만 아니라 누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다 다르게 태어날 수가 있을까?’ 수억 명이 모여도 다 다릅니다.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다 다릅니다. 앞으로도 또 다릅니다. 

인구가 얼마가 되든지 다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각본을 가지고 계시기에 그렇게 다 다르게 세상에 태어나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감탄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날보고 어떤 아줌마가 이 아저씨는 이필재 목사님 많이 닮았다고 했는데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가다 동물을 볼 때 분간이 안 되잖아요? 사자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놈이 그 놈 같고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주 다 다릅니다. 그런데 성격도 또 다릅니다. 취미도 다 다릅니다. 걸음걸이도 다 다르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쌍둥이도 다릅니다. 정말 똑같으면 엄마도 분간을 못합니다. 그러나 어딘가 다릅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틀리지 않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솜씨인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협력적 유기체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아마 정말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사람이 많다면 혼란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별 우스운 일이 다 벌어질 것입니다. 남편이 바뀔지도 모릅니다. 똑같으면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아마 복제인간이 나오면 어떨지, 아직 안 나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말소리가 다르든가 어디든 좀 다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세기 1장, 2장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씨 맺는 채소를 종류대로” 또 “동물을 종류대로” 그래서 이 수많은 종류가 하나의 원리를 위해서 나열이 되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좋았다는 것이 협력적 유기체란 말입니다. 자기의 색깔을 분명히 나타내었는데 다른 사람의 색깔이 조화가 되어서 아름답게 보이는, 마치 학생들이 카드섹션 하는 것처럼 나는 내 것만 들었는데 초상화도 되고 도시도 되고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나는 내 것만 들었습니다. 수많은 종류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식물이 그렇게 종류가 많을까? 수만 가지의 식물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또, 곤충에서부터 동물도 또 수만 가지입니다. 또 우리가 이름을 알 수 없을만한 수없이 많은 다양성의 조화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만들어놓으셨는가? 그래야 인간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이 다양하잖아요? 색깔도 다양합니다. 수박은 빨갛고 오렌지는 노랗고 다양합니다. 

그 색깔별로 따라서 우리 몸에 유익한 효소가 나와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하게 먹고 건강하라는 것입니다. 풀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수만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먹고 살아야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삶의 문화는 ‘다양성의 조화다. 협력적 유기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을 하고 공동체 생활을 해야 이게 하나의 기본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저 사람은 저럴까?’ 이렇게 생각이 들게 됩니다. 다양한 것을 어떡합니까? 이 다양한 것이 모여져야 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보십시오. 어떤 때는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잖아요? ‘저 사람은 왜 저런 직업을 가지고 살까? 저게 얼마나 위험한데….’ 저는 취미 활동이 딱 하나가 있습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사자를 봐야 잠이 옵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물의 세계”를 좀 보고 잡니다. 그런데 재미있게 보지만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생명을 걸고 촬영을 했습니다. 사자들 틈에 가서 가까이 바로 옆에서 찍잖아요? 

그때 달려들면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사실 그 분야에서 제일 몸을 바치고 동물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제일 많이 찍고 실제로 동물들과 씨름을 하면서 그 동물의 생태를 알려고 애쓰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결국 그것을 하다가 동물에게 잡혀 죽었습니다. 아주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일평생 위험한 것을 하면서 저 직업을 가지고 살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없으면 저는 심방을 마치고 무엇을 보느냐 말입니다. 협력적 유기체라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있으므로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교회 청년이 강도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장례 준비를 하는데 제가 그 장의사를 만났습니다. 제일 장례 집례를 잘 하는 사람이 ‘그리니스’라고 하는 미국에 있는 장의사입니다. 제가 거기서 장례식을 했는데 “이 청년이 죽었는데 어떻게 되었느냐? 그가 어디 있느냐?” 그랬더니 아무도 안 보여줍니다. 절대 보여주지 않는 것입니다. 시체 처리하는 방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거기 하도 자주 가고 그 사람과 친하니까 “보고 싶습니까?” “내가 그 청년을 좀 봐야겠다.” “그러시면 아직 준비가 잘 안되었는데 오십시오.” 그래서 그 처리하는 지하실로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보고 아직까지도 마음이 안 좋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는 일단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에서 관 뚜껑을 열어놓고 다 보면서 하고 마지막에는 한 사람씩 일렬로 쫙 서서 관 앞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장례식을 치루니까 얼굴 모습이나 옷 입은 것을 평소 때와 똑같이 만들어냅니다. 그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즐겨 입었던 양복, 와이셔츠 색깔, 넥타이를 다 갖다 줍니다. 그리고 사진을 갖다 주면 살아있는 것과 같고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화장도 얼마나 예쁘게 잘하는지 금방 잠자고 일어날 것만 같이 해놓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시체 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가서 보니까 이미 다 부패한 내장들은 다 쏟아버립니다. 그래서 건조해야 하니까 마치 나쁘게 표현하면 가축 같은 것은 잡아서 쫙 걸어놓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것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잘해서 처리를 하는데 저는 그때 가서 그것을 보고 나와 친하니까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매일 그런 일을 하면서 괜찮나요? 나는 한번 보고도 충격 받아서 밥도 못 먹겠네요.” 그분이 아주 명답을 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해야 되니까요. 그래서 내가 이 직업을 정했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장례식이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협력적 유기체입니다. 다 필요합니다. 

저는 이틀 전에 분당 경찰서에 가서 아침에 설교를 했습니다. 경찰서장이 새로 오셨다고 해서 제가 설교를 하고 식사를 같이 했는데 앉아서 식사하면서 경찰 직업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오래 살았는데 미국 경찰은 까딱하면 죽습니다. 왜냐하면 강도들도 다 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괜히 손짓 잘못했다가는 경찰관이 총을 빨리 쏘는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자기도 죽기 때문입니다. 

마켓에 가면 총이 배추 파는 것처럼 진열되어 있어서 아무 거나 살 수 있습니다. 총도 얼마나 좋은 총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총이 흔하니까 사람마다 다 총이 있단 말입니다. 저만 없지 다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경찰관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까딱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직업을 평생 동안 어떻게 하느냐?” 그랬는데 그 위험스러운 직업의 신청자가 100대 1이라는 것입니다. 1명 뽑는데 100명씩 와서 줄을 섭니다. 

미국 아이들은 제일 인기 있는 직업이 경찰관과 소방관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 교회에서 소방관 5명 뽑는 인터뷰를 하겠다고 해서 빌려주었습니다. 5명 뽑는데 2천명이 왔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 힘들잖아요? 왜 이런 직업을 지망하느냐고 했더니 그렇기 때문에 오는 거라는 겁니다. 모험심들이 강합니다. 직업도 다양하고 사람들의 생각도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협력적 유기체로 성격도 취미도 다 다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등산가들을 보십시오. 그 에베레스트 올라가는데 8,000미터 올라가는데 발 한번 잘못 디디면 떨어져서 죽잖아요? 그 얼음벽을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런데 한층 한층 올라갑니다. 도로 내려올 것을 왜 저렇게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까? 눈이 쏟아져서 수 없이 죽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네팔의 등산가들은 살아 돌아와야 살아 돌아온 거란 말입니다. 저도 중간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올라갑니까? 위험한 것은 말도 못합니다. 발 한번만 미끄러지면 눈 속에 파묻혀 죽어버립니다. 이런데도 하잖아요? 왜 하는가? 그 사람의 취미인 것을 어떡합니까?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이 기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내가 정복했다는 쾌감과 정상에서 눈보라를 맞으면서 태극기를 꽂고 두 팔을 벌리는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가서 올라가잖아요? 저도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저더러 “이필재 목사님! 목사님은 내가 볼 때 얼마든지 다른 거 해도 행복하게 잘 사셨을 거 같은데 뭐 하러 목사를 하십니까?”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목사도 있어야 합니다. 경찰관도 있어야 합니다. 이 다양성을 인정할 때 어떻게 되느냐? 협력적 유기체 문화가 이루어지면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이것을 인정하라고, 다양성을 인정하라고, 그래서 이 은사의 다양성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이렇게 다양하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주님의 뜻이 이런 우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 땅에 세워지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목표를 정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 에베소보다도 더 깊이 협력적 유기체 설명한 것이 고린도전서 12장 아닙니까? 거기서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아주 심각하게 사람의 신체 구조의 연합성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왜 설명을 그렇게 길게 했는가? 고린도교회가 협력적 유기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무슨 역할인지 아느냐? 한 몸이다.” 우리 모두 고린도전서 12장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한번 같이 읽어보면 얼마나 바울이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와 에베소교회에게 간절히 협력적 유기체를 강조했는가 알게 되는데 12장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아멘. 

이렇게 긴 설명을 한 이유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잘났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는 지혜의 도시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지식을 너무 강조하고 배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보니까 서로 잘났다고 협력적 유기체 교회가 되지 아니하고 분파가 많이 생겨서 도저히 어떻게 교회를 잘 운영해 나가기 힘들게 되었는데 무슨 파가 생겼느냐? 바울이 전도했기 때문에 바울파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는데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이 생겨서 “우리는 절대 바울파다.” 바울이 “내 파 만들라고 누가 그랬느냐?”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한 공동체에서 한 파가 생기면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또 다른 파가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쟤네들이 바울파한대. 그러면 우리는 베드로파다.” 바울파, 베드로파! 이 파의 주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전도는 했어도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 아니다. 베드로가 12사도 중의 제일 큰 인물이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졌다. 바울파보다 베드로파가 우수하다.” 그래서 또 베드로파가 생겼습니다. 그랬더니 또 한 파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예수파다. 그리스도파다.” 이렇게 파를 만들기 좋아해서 협력적 유기체가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파벌 문화만 교회에서 조성하는 이상한 교회가 되었는데 에베소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한심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기본적인 진리가 무엇인데 본질과 비본질의 문제,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가 나왔습니다. 예수 믿는 본질이 무엇이냐? 그런데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싸움들을 하고 파를 만든 것입니다. 어쨌든 이 파를 만드는 것은 유대인이나 한국 사람이나 얼마나 은사가 많은지 모릅니다. 협력적 유기체를 만들지 못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는 외국인들이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제일 시끄러운 소리를 많이 했잖아요? “한국 교회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날마다 싸운다.” 이런 소리를 들어서 당연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에는 “은사가 다 다르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느냐? 다 병을 고치겠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사도 다 다양성이 있으니까 그 다양성의 유기체적 협력 활동을 해야 한다. 그게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가 세상에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하는 목사들에게는 이 문제가 제일 힘이 듭니다.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고 에베소 교회고 날마다 이 문제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협력적 유기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거 참 잘 안됩니다. 우리가 교회관을 가질 때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 혼자 예수 믿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서 혼자 찬송하고 혼자 기도하고 성경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있습니다. 혼자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교회 나오지 말고 신앙생활을 각자 해보십시오.

벌써 한 달만 지나도 ‘내가 예수 믿었던 집사였나?’ 잘 분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사도를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협력적 유기체 공동체를 만들어주어서 이렇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훌륭하게 잘 성장해야 되고 교회를 어렵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어렵게 하는 사람이 교인이지 다른 사람입니까? 어느 교회가 하도 싸우고 날마다 분열하고 쉴 날이 없습니다. 

또 싸우고 갈라지고 또 싸우고 갈라지고 날마다 재판하니까 그 교회 옆에 사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그 교회 교인들을 보고 “그러지 말고 무당들을 데려다가 굿을 해보시오. 그러면 귀신이 나갈 겁니다.” 했답니다. 협력적 유기체가 안 되면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은사가 제일 많은 나라가 우리 한국이란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전 세계 222개의 나라에서 한 민족, 두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싸움 준비만 하고 언제 무엇이 터질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도 북한 방송에 그 아줌마는 나와서 공갈 협박을 하시네요. 

남한에 800km 로켓 거리 연장했다고 가만 안둘 거라고 합니다. 북한은 태평양까지 넘어가는 거 만들어놓고 우리들은 만들지 말라고 하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시대가 어떻든 종족이 어떻든 인간의 계급이 어떻든 시대와 지역과 종족과 인간의 계급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는다.” 에베소서 1장 23절, 4장 16절에 다 했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이 인종을 초월해서 시대를 초월해서 지역을 초월해서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 땅에 세우는데 필요한 부분을 부분적으로 일을 한다 이겁니다. 내게 주신 일을 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많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것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설교만 잘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엌에 가서 김치 담그고 밥하는 거 못합니다. 그러면 그거 잘하는 사람이 또 있잖아요? 다양하게 자기 것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사람이냐?” 이렇게 다양한 은사의 일체감을 설명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곤고히 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훈련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권징을 시행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출결을 시켜서 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 헌법입니다. 권징조례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괜히 교회 안에서 마귀 같은 일을 계속하잖아요? “그런 사람은 권징하라.” 성경에서도 출결시키라 했습니다. 왜? 교회 공동체를 어렵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교회에 위탁하신 임무가 있는데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가서 바로 복음을 전파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도록 그 사명을 우리가 가지고 지금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두 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보이는 교회요 보이지 않는 교회,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또 일꾼도 보이는 사도와 보이지 않는 사도로 나눕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는 유형교회라고 하는 보이는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교회, 할렐루야 교회는 보이는 교회로 유형교회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교회인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교회가 세상에 또 있습니다. 그것을 또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도 보이는 직책에서 일하는 사람, 저 같은 사람은 항상 보여야 합니다. 

만약 오늘 수요일인데 이필재 목사가 설교하기로 했는데 안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무슨 소문이 들리느냐? 죽었나? 교통사고가 났나? 아픈가? 별 소문이 다 나잖아요? 시내산 밑에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모세가 안보이잖아요? 모세가 측근들에게만 “내가 기도하러 갔다 올 테니까 가만히 있으라.” 그리고 시내산 속에 들어가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오래 했습니다. 40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죽었나 보다. 어디 간 거야?”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는 형태로 바꿔 놓은 것이 금송아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사도를 세워서 보이는 제자 역할과 잘 안 보이는 제자 역할 두 가지를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제가 지금 설교를 하는데 어디에서나 나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중앙에 높이 만들어 놓았잖아요? 잘 보이라고 그런 것입니다. 이것도 모자라서 얼굴의 점까지 다 나오는 스크린도 만들어서 잘 보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는 보일수록 효과가 납니다. 거리에 다니다가도 여러분이 저를 만나잖아요? “목사님! 어디 가세요?” 반갑게 인사하십니다. 제가 은행에 갔더니 “목사님도 은행에 오세요?” 그러시더라고요. 

사도는 잘 보여야 합니다. 모세가 안보였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는 안보이면 큰일 납니다. 요즘에 보십시오. 강대상은 제가 선택해서 갖다 놓은 것인데 사실 세련된 교회는 유리 기둥 하나에 유리판 하나를 갖다 놓았습니다. 설교자의 몸까지 다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 가서 설교하면 발장난도 못합니다. 그것을 “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라고 합니다. 몸 전체로 훌륭하게 설교를 합니다. 어느 교회는 강대상이 성을 쌓은 것처럼 높이 올라오는데 그런 데에 가면 항상 “이렇게 강대상이 큰 줄 알았으면 바지는 안 입고와도 될 뻔 했습니다.”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여야 되는 사도적 일꾼은 어디에서나 약속한 시간에 정확하게 자리에 나타나서 “할렐루야!” 이래야 사람들이 “와!”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지금도 제가 이렇게 높은데 서서 화면을 비추면서 설교를 하니까 여러분들이 좋잖아요? 

그 다음에 보이지 않는 봉사자가 또 있게 마련입니다. 누가 이렇게 항상 꽃을 이렇게 갖다 놓는지 아세요? 저기 저 손수건과 물은 마시든 안마시든 항상 저 자리에 갖다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하는지 안보입니다. 여기 주일날 교회 오면 종이 한 장도 안 떨어져 있습니다. 종이 줍는 차량 봉사위원들이 일찍이 나오셔서 다 집게를 가지고 교회 전체를 돌아다니며 담배꽁초까지도 모두 주워서 내어버립니다. 6시 이전에 모두 내어버립니다. 누가 했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만 압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역이 협력적 유기체라는 게 뭐냐면 자기 은사대로 어떤 사람이 더 우월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기 은사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안 보여도 열심히 할 뿐입니다. 내가 헌금하는 것을 누가 봅니까? 안 보입니다. 지금은 거의 교회들이 교회에 감사헌금을 냈다고 이름 쓰는 것을 다 없애버렸잖아요? 하나님과 나만 알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부흥회를 하러 가면 제일 힘든 일이 담임 목사님이 시키는 것이 봉투가 이만큼 올라온 것이 일일이 이름 부르라고 할 때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이름 안 부르고 부르라고 해도 “하나님 아버지! 다 아시나이다.” 그리고 그냥 축복기도해주고 맙니다. 안 보여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왼손이 하는 거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입니다. 

자기 사명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보여야 될 사람은 숨지 말고 잘 나타내고 숨어서 할 사람은 숨어서 하고 그래도 하나님이 다 아셔서 협력적 유기체가 잘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곧 교회라고 하는 유기체이다. 그런데 왜 싸우고 야단이냐?” 옛날에는 목사님들이 우리 몸을 가지고 소재로 설교를 많이 하셨잖아요? 특별히 이 손가락을 가지고서 우리 몸은 소우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지구보다 큽니다. 우리 몸의 혈관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손끝에만 해도 발로 찌르면 피가 나잖아요? 왜 피가 납니까? 혈관이 거기까지 와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찔러도 피가 납니다. 그래서 동맥이라는 것이 있고 거기에서 핏줄이 수도 없이 많이 뻗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혈관의 길이를 전부 한 줄로 늘이면 얼마냐?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돕니다. 약10만km입니다. 지구가 한 바퀴 돌면 4만km 아닙니까? 그런데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아야 될 만큼 내 혈관의 길이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의 천하보다 귀하다는 겁니다. 지구보다도 내가 더 큽니다. 그렇게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내 생명의 본체가 지구를 두 바퀴 반을 돌만큼 깁니다. 과학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가락도 길고 짧게, 굵고 가늘게 협력적 유기체로 만드셨습니다. 

축구 선수가 월드컵에서 발로 차서 골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발이 좋아야 할 텐데 얼굴이 먼저 좋아합니다. 수고는 발이 했는데 얼굴이 환하게 웃습니다. 크리스천은 기도한다고 손을 모읍니다. 협력적 유기체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들은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입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다 이것이 협력적 유기체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함께 가는 유기체적 연결인 것입니다. 제가 새끼손가락을 다쳤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도 그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새끼손가락 하나를 다 펴서 접어보십시오. 그런 상태로 세수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잘됩니까? 안됩니다. 이게 맨 마지막에 받쳐주어야 됩니다. 새끼손가락 없이 세수를 해보십시오. 세수가 안 됩니다. ‘이 조그만 게 그렇게 큰 역할을 했구나!’ 그러잖아요? 이 엄지손가락은 굵어도 제일 꼴찌 아닙니까? 그러나 제일이라고 할 때는 항상 엄지가 먼저 나옵니다. 어쨌든 협력적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협력적 유기 공동체입니다. 손을 다쳤는데 발도 괴롭습니다. 발도 다쳤는데 얼굴부터 찡그러집니다. 이쪽이 아프면 이쪽도 좋으면 이쪽이 좋으면 저쪽도 좋아지는 협력적 유기체!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서 바로 은사대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받은 것이 뭔가?’ 이것만 잘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남이 가진 은사를 자꾸 부러워한다든지 왜 나는 저런 은사를 안주셨느냐고 불평을 한다면 공동체는 아주 어려워집니다. 

제가 어느 교회 부흥회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설교하기 전에 성가대가 찬양을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앉아서 이렇게 성가대를 쳐다보는데 ‘어? 저거 누구야?’ 암만 봐도 나보다 몇 년 선배 목사님이세요. 그런데 남의 교회 성가대에서 베이스 파트에 앉아서 찬양을 하는 겁니다. ‘아니, 저 어른께서 왜 여기 와서 찬양을 하시지?’ 그래서 제가 설교하기 전에 물어봤습니다. “저기 앉아계신 분이 아무개 목사님 아니십니까?” 그랬더니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일어나보십시오.” 그 지역에서 20년 이상 목회해서 존경받는 분입니다. 저도 그 분 모셔다가 부흥회 했고 저도 그 교회를 가서 부흥회를 했고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런데 은퇴하셨어요. ‘은퇴하고 나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조그만 교회, 자기 후배가 목회하는 교회에 성가대원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베이스 파트에서 찬양하시는 겁니다. “저런 분이 계셔서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전제를 하고 설교를 했는데 그 교회에서는 그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성가대 나와서 앉아있는 것 때문에 부흥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 좋아하던 교인들이 또 그쪽으로 다 가는 겁니다. “저거 보세요. 우리 목사님 저렇게 훌륭하시잖아요?”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아주 작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그 은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우리가 열심을 다할 때 협력적 유기체가 이루어져서 “주님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되느니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고린도 교회도 에베소 교회도 큰 문제가 발생하여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협력적 유기체가 못하는 어려움을 겪을 때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 주신 이 말씀을 저희들이 기억하고 오늘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믿음 안에서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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